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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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마을 수비대’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안 PD는 촬영장에서 연기하던 오지한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에 미소를 걸었다.

그 배우가 자신이 연출을 맡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다니.

봉구는 설레는 마음에 땀이 난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드디어!’

이날이 왔다.

“다들 한 번 더 점검해 주세요.”

봉구가 바쁘게 움직였다.

밖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장을 끝낸 지한이 먼저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지한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웅성웅성

그때 촬영장 한쪽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보였다.

스태프들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쪽으로 힐끔 시선을 옮기다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는 걸 보고 지한이 더욱 진한 미소를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

또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촬영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구두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당당한 걸음

몸매에 딱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메이크업을 받고 준비가 끝난 지연이 스태프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미 배역과 일치된 것 같은 모습에 그녀에 대해서 수군거리던 스태프들도 잠자코 지연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아우라를 내뿜어 촬영장을 지배하고 있는 지연을 보고 지한이 다가갔다.

또각

검은 정장을 입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지연이 동생의 앞에 섰다.

“누나 왔어?”

“어. 귀걸이 바꿔 끼고 오느라 조금 늦었지.”

“아니야. 내가 먼저 나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도.”

“됐어. 이제 곧 시작한대. 준비해야지.”

“알았어.”

지한이 지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대본을 보고 대화를 하자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멈춰 있던 사람들이 다시 움직였다.

“우와. 방금 뭐지.”

“나 뭔가 후광 같은 걸 본 거 같은데. 저기 조명 없었지.”

지연의 등장에 압도된 이들이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메이크업을 받은 지연의 얼굴은 얼굴만으로도 박력을 느끼게 만들었다.

거기다 배역에 반쯤 몰입해 있는 지연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누나 방금 들었어?”

“들었어. 누나도 귀 좋잖아?”

작게 중얼거린다고 해도 남매가 못 들을 리 없었다.

가면 갈수록 시력도, 청력도 전부 다 좋아졌거든.

“누나 나 여기 앉아 있으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는 얘길 들었거든?”

“무슨 얘기?”

“다들 누나 연기가 궁금한가 봐.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하더라고.”

중요한 사실이라도 알아온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하고 작게 말하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피식 웃었다.

“그거 들으려고 일찍 나온 거구만?”

“아닌데?”

“아니기는.”

오늘 내가 처음 촬영하는 날이라서 다른 사람들 반응을 먼저 보려고 나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된다.

원래 소문과 날조는 진실 앞에서 약한 법이거든.

팩트로 후려친다는 말을 들어 봤으려나?

“걱정 마. 오늘 누나가 컨디션이 좀 좋아.”

“큰일인데. 다른 사람들 걱정할 게 아니었잖아? 내가 주인공인데!”

진지한 얼굴로 대본을 더 봐야겠다고 말하는 동생을 본 지연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랜만에 보는 안봉구 PD의 얼굴이 보였다.

아! 이제 PD 됐지?

그럼 내 씬까지 다른 배우들 연기 구경 좀 보면서 촬영장 분위기를 파악해 볼까?

지연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113. 생각보다 잘하는데?

“컷! 다시 한번 더 갈게요.”

안 PD의 말에 NG를 낸 배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도 알았다 지금 왜 PD님이 NG를 내렸는지.

톱스타이자 대한민국 국가대표 배우라고 불리는 오지한이 남주인공이고 SBC에서 밀어주는 스타 PD인 안봉구가 연출을 맡았다.

로맨스 장인이라고 불리는 김은희 작가의 보조작가 출신이자 지난번 드라마에서 시청률 17%를 찍은 신인작가 송하나가 쓴 드라마 <친구 이상, 연인 미만>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채소담은 자신도 모르게 촬영장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배우가 보였다.

‘히익!’

자신을 노려보는 건 아니겠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해부하는 듯한 시선에 소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마치 선생님이나 교수님 앞에서 연기하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눈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했고, 어떤 생각으로 대사를 했는지 전부 파악한 것 같은 저 눈!

자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드라마 촬영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저 배우에게서 자신의 선생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괜히 주눅이 든 소담은 애써 지연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의 NG를 내면 안 돼.

정신 차려 채소담!

“후우.”

소담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연의 귓가에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누나한테 완전 기가 죽은 느낌인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난 알 거 같아. 누나 앞에서 연기를 하다니. 그 느낌 알지. 암.”

지한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과장해서 끄덕였다.

놀리는 것 같은 동생의 행동에 지연이 고개만 옆으로 돌려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미안. 안 할게.”

“나 연기 이번만 하고 안 할 거야.”

“아, 누나! 안 한다니까. 미안해. 잘못했어.”

지한이 잘못했다면서 지연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징징거리는 동생을 똑같이 골려준 지연이 동생의 손에서 팔을 쓱 빼냈다.

멀리서 다시 씬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숨죽인 남매가 장난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어때? 잘할 거 같아?”

“모처럼 네가 내 시선도 치워줬는데 잘해야지.”

“앗 들켰어?”

“내가 네 누나다.”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에 지한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배우 20대 배우치고는 연기를 좀 하는 것 같은데 긴장을 너무 많이 하더라고. 이번에 처음으로 주연 맡는 거래.”

“지한이 네가 나오는 드라만데 주연으로 저렇게 경력 없는 사람을 썼다고?”

“나랑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써야 하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도 충분히 20대 중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나도 모르지. 아무튼 나랑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배우는 안 썼다고 하더라고. 비주얼 합이 맞아야 한대.”

다른 배우의 캐스팅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저렇게 연기하는 게 불안해서야.

긴장만 안 하면 될 거 같은데.

“지한이 네가 힘들겠네. 긴장 많이 하는 거 같은데 잘 이끌 수 있겠어?”

“누나. 나 오지한이야.”

“알아. 내 동생.”

“그거 말고. 나 할리우드 배우야!”

“그래그래. 내 동생.”

지한이 입을 내밀었다.

귀여운 행동에 지연이 동생의 튀어나온 입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 * *

힘들었던 채소담의 씬이 끝나고 다음 차례였던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과 같은 씬을 촬영하는 단역 배우들이 하나둘씩 세트장으로 모여들었다.

“안녕하세요. 지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안녕하세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지우현입니다.”

“지우현 씨. 꼭 기억할게요. 우리 잘해 봐요.”

“네, 넷!”

“안녕하세요, 지연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지연이 단역 배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눈을 마주쳤다.

같이 이 씬을 만들어야 할 동료들이다.

“그럼 저는 저기에 가 있을게요. 우리 다 같이 힘내요.”

“넵!”

“아자아자!”

“네!”

인사를 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같이 연기할 이들을 파악한 지연이 자리로 이동했다.

동생이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얼굴 가득 개구진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니까 지금 이 상황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모든 스태프들의 의심, 불안, 기대가 담긴 눈빛을 받으며 지연이 자세를 잡았다.

지연이 눈을 감았다 뜨니 그곳에는 일평생 오점을 만들지 않고 엘리트의 길을 걸어와 초고속 승진을 한 젊은 팀장이 있었다.

“배우분들 준비 되셨습니까?”

“네, PD님.”

“준비됐습니다.”

배우들의 대답을 들은 안 PD가 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준비됐다는 판단이 든 봉구가 큐를 외쳤다.

“그래서 다들 이번에 들어온 신인 어때?”

“신인이 다 그렇죠. 아직 뭘 알겠어요. 시키는 것만 잘 해도 감사하죠.”

“맞아요. 괜히 뭐 하겠답시고 나서서 우리 파일 다 날려 먹는 것보다 낫죠.”

“저 그거 들었어요. 누가 열심히 하겠다고 나대다가 콘센트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작업하던 거 싹 날아갔다면서요?”

“끄아악! 듣기만 해도 끔직해.”

“세상에. 지금 바로 ctrl+s 누르고 싶어 졌어요.”

봉구의 사인에 곧바로 연기에 들어간 배우들이 능청스러운 디자인팀 연기를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연기에 보고 있던 봉구의 눈빛이 달라졌다.

‘꽤 괜찮은데? 처음에는 긴장하는 것 같더만.’

단역들의 연기를 지켜보던 봉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을 봤을 땐 몇 테이크를 찍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지금 보니 꽤 잘했다.

실전에서 강한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건 아닌 것 같고, 저들의 긴장을 풀어준 무언가가 있겠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지연이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는 사이 딱딱하던 모습이 많이 풀어졌어. 마지막에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다 같이 힘내자고 했었지. 벌써 상대 배우를 이끌 줄 안다는 건가? 이제 첫 촬영인데?’

누가 오지한 누나 아니랄까봐.

아니지. 그 소문이 맞다면 오지한이 오지연 동생이라서 그런 연기를 보인 걸 수도.

봉구의 눈빛에 흥미로움이 담겼다.

또각또각, 벌컥

“다들 지금 뭐 하세요.”

고막에 꽂히는 구두 굽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디자인팀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티, 팀장님!”

“밥 먹고 또 수다라도 떨고 있었나보죠. 다음 시즌 준비 안 합니까?”

“해, 해야죠.”

“정소연 씨. 스케치 몇 장 그렸어요?”

“지금 갑니다!”

“저도 갑니다!”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리로 돌아갔다.

무뚝뚝한 얼굴로 팀원들을 업무로 복귀시킨 팀장이 긴 다리를 움직여 본인의 자리로 이동했다.

드륵

의자에 앉은 팀장이 마우스를 집었다.

“커트!”

순식간에 끝난 씬에 배우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방금 나 좀 잘한 것 같아.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지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좋아요. 다들 오늘 첫 촬영인데도 합이 좋은데요? 이대로만 갑시다.”

“옙!”

“네!”

“알겠습니다!”

자신감과 뿌듯함이 가득한 배우들의 얼굴을 본 지연이 작게 웃었다.

다들 생각보다 잘한 모양이다.

제 실력 이상을 한 것 같은데?

꽤 괜찮은 조합에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닌데? 역시 동생빨로 여기 꽂힌 거구만.”

옆에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가 지연의 연기를 보고 깎아내렸다.

조명팀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다른 스태프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넌 눈이 옹이구멍이냐.”

“왜 갑자기 욕 하냐?”

“으이구.”

자신을 멍청이를 보는 것처럼 보는 스태프를 보고 옹이구멍 소리를 들은 다른 스태프가 발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뭔데.”

“나는 다른 촬영장에서 저 단역 배우들을 본 기억이 있어.”

“그런데.”

“거기서 저 사람들은 대사 하나 있는 것도 제대로 못해서 NG를 몇 번이나 냈었어.”

“그래서?”

여기까지 말해줘도 눈치를 못 채는 스태프를 보고 말을 하던 이가 혀를 찼다.

이 업계에 있으면서 보는 눈도 없고 눈치도 없다니.

더 높은 곳을 가기에는 무리군.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면서도 하던 말은 마저 해 줘야 귀찮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옹이구멍이라고 말한 스태프가 말을 이었다.

“긴장하고 말도 잘 못 하던 사람들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사를 한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 설마 지연 때문이라는 거?”

“그래. 지연이 촬영 시작하기 전에 눈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잖아.”

“겨우 그거 때문이라고?”

“겨우 그거? 다른 촬영장에서 단역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냐?”

“알지. 배우 취급도 못 받잖아.”

“아네. 무시받으면서 대사 한 줄 해 보겠다고 나오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들이야. 화면에 얼굴 한 번 비추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저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배우 취급도 못 받던 사람들이 유명인이 다가와 먼저 인사하고 다 같이 잘해보자고 하는데 힘이 안 나겠냐? 저 사람들이 제 실력을 발휘한 건 전부 지연 덕분이야.”

“그걸로 NG 내던 사람들이 NG를 안 냈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냥 오늘은 컨디션이 좋았겠지.”

“됐다.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말해줘도 들을 생각도 안 하는 스태프를 보며 설명해준 사람이 혀를 차며 자리를 이동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듯이 억울한 표정을 짓던 스태프가 볼을 푸르르 떨며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맞는 말이잖아. 말 몇 번 한 걸로 긴장을 풀게 했다고? 겨우 그딴 걸로 잘 찍을 거였으면 다른 사람들은 왜 못했는데.’

옹이구멍이라고?

두고 보자.

지연이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내가 지켜보겠어.

무시당한 스태프가 불타는 것 같은 시선으로 지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

“누나 아까부터 이상한 스태프가 누나 노려보는 거 같은데.”

“날 왜 노려보지.”

“몰라. 저 사람 알아?”

“조명팀 팀원이잖아.”

“그건 나도 아는데. 어디 다른 데서 마주친 적 있어?”

“아니. 여기가 처음인데. 누나는 음방 외에는 다른 데 잘 안 갔잖아.”

“그렇지?”

그런데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걸까.

지한이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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