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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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담긴 감정이 숨에 묻어나왔다.

짝, 짝짝!

지한이 박수를 쳤다.

“누나. 진짜 잘한다.”

“너도 잘하던데. 순식간에 대사에 깊은 감정을 담아내는 걸 보면 많이 연습했나봐.”

“감정연기는 나도 이제 좀 하는 거 같아.”

“어쭈? 바로 받아친다?”

누나의 말에 지한이 히히 웃었다.

“내가 잡은 캐릭터 어떤 것 같아?”

“좋은 거 같아. 누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후회하는 모습이 기대되는걸.”

“그런 걸 생각하고 만들긴 했는데 누나 입으로 들으니까 엄청, 좀, 그렇다.”

“걱정 마. 사람들은 가족 간의 오해, 갈등, 화해! 이런 걸 좋아한다고.”

“답답하면 고구마라고 하지 않아?”

“뒤에 사이다가 등장할 거니까 괜찮아. 그리고 누나는 그런 역할이잖아. 남녀 주인공 간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맞아!”

누나가 한 번에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분석하자 지한이 신이 난 얼굴을 했다.

“이 대본의 소재라든가 줄거리 같은 건 솔직히 뻔해. 이런 상황을 살릴 수 있는 건 뭐다? 바로 캐릭터지. 그리고 작가가 대사를 얼마나 쫀쫀하게 써 주는지가 중요해.”

“응응. 그래서.”

“대사를 잘 살릴 수 있게 연구하는 거지.”

“응응.”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지한이 누나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그냥 이 시간이 좋았다.

누나랑 같이 연기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누나도 지금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말해 주는 거겠지.

“누나가 만든 캐릭터는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누나지?”

“맞아.”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냉정한 척하는 거고.”

“맞아. 스스로 상처 입지 않으려면 철벽을 둘러야했거든.”

“왜 혼자 힘든 걸 감수한 거야?”

“어렸을 때 가족들에게 빚진 게 있어서. 조금 아팠다는 설정을 넣어봤어.”

“왜?”

“독한 마음 먹고 연 끊은 엄마가 왜 다시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을까 고민해 봤어. 그런데 보통 엄마가 그런 경우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을 때라고 생각했거든?”

“응응.”

“그런데 그런 상황이 되려면 자식이 엄청 아프면 그러지 않을까?”

“아하! 맞아.”

오답풀이처럼 누나가 풀어주는 캐릭터의 역사에 지한이 박수를 치며 맞장구쳤다.

이미 서로의 캐릭터를 다 분석했으면서 굳이 풀어서 설명을 하는 남매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오랜만에 어릴 때처럼 연기 놀이를 하니 재밌었다.

“그럼 다른 씬, 다음 거!”

“그래!”

지한의 제안에 지연이 동의했다.

연습실에서 다시 아이들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 * *

[오지한, SBC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주인공으로 캐스팅]

[오랜만에 드라마로 복귀하는 배우 오지한]

[‘친구 이상, 연인 미만’ OST 라인업 공개]

[가수 지연, SBC 드라마서 동생과 호흡]

아이들이 함께 출연하는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간대에 예정된 경쟁작들도 만만찮았기에 SBC는 남매를 카드로 꺼냈다.

이는 오래 전에 아이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던 예능 국장과 드라마 국장이 임원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직도 SBC에 있을 줄 몰랐는데.”

“나도. 요새 종편에서 돈 많이 주고 지상파 실무진 스카웃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남아 계셨네.”

“너희들 어디 가서 함부로 아저씨라고 하지 마라. 그래도 방송국 임원인데.”

“에이. 형도 참. 우리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 잘 안 해.”

“맞아. 오빠는 우리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

우리 애들 어째 크면 클수록 더 사고뭉치가 되어가는 거 같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지 않도록 영훈이 긴장하자고 다짐했다.

“그럼 오빠 나는 중반부터 등장하는 거지?”

“응. 한 5화나 6화쯤?”

“어키어키.”

“지한이는 홧팅!”

“누나 치사해.”

“어쩔 수 없잖아. 누나는 단역이고 넌 주연인걸.”

“금방 단역에서 벗어날 거면서.”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 누나 연기 계속 안 할 거야?”

“누나 본업은 가수잖아.”

“그치만!”

“이번 드라마 재밌으면 더 생각해 볼게.”

지연의 말에 지한이와 듣고 있던 영훈의 눈이 번뜩였다.

이번 드라마에 재미를 느끼게 하면 되는 거지?

두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112. 소문의 중심

타다다타

불빛 아래 한 여성이 정신없이 타자를 치고 있었다.

눈도 깜빡하지 않고 노트북 불빛에 의지해서 글을 쓰는 여성의 눈에는 희미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우우웅-우웅-

어질러진 책상 어딘가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하지만 타자 치는 것에 열중한 여성은 책상 전체에 퍼지는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만 빠르게 움직였다.

웅-뚝,

책상을 울리던 진동이 멈췄다.

타자를 치는 여성은 진동이 온 줄도 모르고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벌컥!

“작가님!”

어두컴컴하던 방이 조금 환해졌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방을 밝히고 어지럽게 A4 용지와 먹고 남은 쓰레기들이 널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

“작가니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방에 들어왔던 또 하나의 여성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작가님, 송하나 작가님!”

“어, 응?”

어깨를 흔드는 다른 여성의 말에 타자를 치고 있던 송하나 작가가 잠에서 깬 것처럼 흐리멍덩하게 대답했다.

“작가님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PD님이 전화했는데 작가님 답이 없어서 저한테 전화 거셨어요.”

“안봉구 PD님이? 왜?”

“작가님 대본 어디까지 쓰셨는지 물어보려구요. 그리고 우리의 비장의 카드 분량이 어떻게 됐는지도요.”

“흐흐흐흐흐흐.”

보조작가의 물음에 갑자기 송 작가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보조작가 박은빈이 살짝 몸을 떨어트렸다.

“우리의 히든카드. 치트키. 내 보물!”

“작가님. 진정 좀 하세요.”

발작하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몸을 들썩이는 하나를 보고 은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꾹 눌렀다.

의자에 몸을 붙인 하나가 희번득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우리의 비밀 병기는 훌륭하게 분량이 늘었다고 답해줘. 덕분에 아주. 멋진 작품이 될 거 같아!”

“이번에 같이 일하는 PD님이 SBC에서 스타 PD로 밀어주는 안봉구 PD님이죠?”

“맞아. 입봉부터 시청률 20%대를 만든 PD지. 김충환 CP라인이기도 하고.”

“잘됐어요. 안봉구 PD님이 이전에 오지한이랑 같이 드라마 만든 적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아요?”

“맞아.”

“작가님 이번 작품 대박 날 거예요!”

김은희 작가 밑에서 보조작가 생활을 하다가 2년 전 단막극 데뷔를 한 송하나는 이제 겨우 드라마 1편을 끝낸 신인 작가였다.

지난 드라마가 아쉽게 시청률 17%로 끝나서 이번 작품에 기합을 빡 주고 썼다.

그랬는데 오지한이라는 대어가 걸려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작가님은 진짜 천재예요!”

“에이. 내가 뭘.”

그렇게 말하는 하나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보조작가의 칭찬에 하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작가님. 지한이의 분량을 늘리는 건 이해하겠어요. 너무 잘하고 그 잘생긴 얼굴! 안 쓸 수 없죠. 그런데 지연은 왜 분량을 늘렸어요? 지연이 연기 잘해요? 대본리딩 때 안 왔죠?”

“나도 잘 몰라. 그리고 지연이 맡은 배역은 6화부터 등장한다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지연의 연기력에 하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하나에게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그런데 나도 작가님한테 들은 소문이 있어.”

“소문이요? 작가님이라면 선생님이 보조작가로 있었다는 김은희 작가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드라마 판에서 로맨스 장인이라고 불리는 김은희 작가의 등장에 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가 눈을 좌우로 굴려 주변을 살피는 척 하더니 은빈에게 손짓했다.

소문이라는 솔깃한 단어에 혹한 은빈이 송 작가의 행동에 응해서 주위를 살피고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오지한의 연기를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 오지연이었대.”

“네에!?”

“아! 내 귀! 아이고 내 귀야.”

가까운 거리에서 터진 고음에 하나가 귀를 막았다.

“오지한 연기를 오지연이 가르쳤다고요!?”

“아우우. 내 귀야. 그래. 맞아. 작가님이 그랬다고 말했어. 그래서 작가들 사이에서 오지연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했었어.”

다른 유명한 작가들이 오지연을 노리고 있었다는 소식에 은빈이 눈을 빛냈다.

“작가님 그럼 우리 대박 난 거예요? 우린 오지한도 잡고 지연도 잡은 거잖아요. 꺄악! 어떡해!”

“그래! 우리 이번에 대박 날 거야!”

“꺄아아악! 작가님 축하드려요!”

송 작가와 은빈이 손을 마주잡고 방방 뛰었다.

그래, 우린 대박 날 거야!

송 작가가 행복회로를 가동했다.

이번에야말로 시청률 20, 아니 30% 넘겨보자!

* * *

지한이가 대본을 선택하자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다.

캐스팅, 투자, 대본리딩까지 순식간에 끝냈고, 내일 바로 촬영이 시작된다.

듣기로는 작가가 대본 내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던데 덕분에 첫 드라마 촬영에 쪽대본은 없을 것 같았다.

“내일은 아역배우들이 촬영한다면서?”

“응. 빨리 촬영하고 싶다.”

“오랜만에 촬영하는 거지? 신나?”

“어. 그것도 있고.”

동생의 의미심장한 말에 지연이 보고 있던 대본을 내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내일 아역배우들이 촬영한다고 해서. 물론 나랑 촬영을 하는 건 아닌데 나도 나보다 어린 배우들이랑 촬영을 한다니까 신기해.”

“그러게. 네가 이제 아역배우들이랑 같이 촬영을 다 하게 됐네.”

지한이가 또래와 함께 촬영한 적은 있었어도 지한이의 어린 시절을 연기할 배우와 같이 촬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춘기 때 1년에 몇 cm씩 쑥쑥 커버렸으니까.

덕분에 미나 언니가 사 놓은 옷 다 못 입혀서 무척 아쉬워했었지.

“지한아. 저번에 건강검진 했을 때 키가 181cm 나왔지.”

“응. 그랬을걸?”

커버린 동생을 보고 흘러간 세월을 실감했다.

언제 이렇게 컸지.

진짜 잘 입혀 놓으면 내 동생 17살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겠어.

“여기서 더 크고 싶지 않은데.”

“왜?”

“너무 크면 상대 배우랑 한 화면에 잡기 힘들어지잖아.”

“…크흡.”

“누나 왜 그렇게 웃어.”

지한이 웃음이 터진 누나를 보고 눈을 샐쭉하게 떴다.

미안, 네가 촬영할 때 매너다리 하고 찍을 거 생각하니까 웃겨서.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지만 지연의 생각을 읽은 듯 지한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미안 안 웃을게.”

“…두고 봐.”

더 크고 싶지 않다는 동생의 말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안 크겠네.

그동안 목소리가 준 선물에 익숙해져서 사용법을 어느 정도 깨우치게 되었다.

이 선물은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보정을 해 주기도 하지만 자동으로 우리 외모를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은연중에 우리가 바라는 대로 외모를 수정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딱 164까지만 가자! 라고 생각하니까 거기서 키가 멈췄다.

내 동생은 사춘기 이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지.

모두가 걱정하는 역변 없이 무사히 어릴 때의 외모를 그대로 가져왔고.

덕분에 한동안 정변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그 타이틀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다.

“내일 첫 촬영이라면서. 잘하고 와.”

“누나 안 올 거야?”

“이제는 누나가 안 가도 잘 하잖아.”

“그래도 누나 첫 드라마잖아.”

“흐음. 가면 좋겠지. 하지만 누난 대본 더 볼래.”

“또 봐?”

“동생한테 업혀 가는 건데 내가 발목 잡을 순 없잖아.”

지연의 말에 지한이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말해.”

“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정말이지?”

“그래. 누나 몰라?”

허공에서 남매가 시선을 마주쳤다.

누나의 마음을 읽은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내 연기력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겠지?”

“다들 아닌 척하면서 걱정하고 있긴 할 거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지금 내가 말한 것처럼 동생 등에 업고 배역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지연의 말에 지한이 인정은 하지만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인생의 반을 연예계에 몸을 담그고 있었지만 이쪽만큼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는 곳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 때문에 엉뚱한 소문이 도는 것은 예사고 같이 촬영하거나 누나 음방 대기실에 놀러 간 걸로도 열애설을 쓴 기사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공 사장님이 혼쭐을 내 주긴 했는데 그런 소문이 지긋지긋해서 더 촬영 외에는 바깥 활동을 잘 안 한 것도 있었다.

“영훈이 형이 왜 기자들 싫어하는 줄 알겠어.”

“할리우드 배우들이 왜 파파라치에 질색하는지도 알겠지?”

“그 사람들이 한국까지는 안 와서 다행이야.”

“와도 바로 티나지. 여긴 한국이잖아.”

“맞아맞아. 우리 팬들은 전부 착해서 우리 집까지 안 찾아 온다고!”

어린 나이. 불우한 가정, 특출난 재능

그 모든 것 때문에 아이들은 팬들에게 어딘가 소중하게 지켜줘야 한다는 이미지가 생겼다.

덕분에 회사에서도 우리 팬들을 좋아해주긴 하지.

“팬 하니까 생각났다. 누나 이번에 드라마 촬영할 때 같이 사진 찍어서 파랑새에 올리자.”

“그래. 누나가 찍어줄까?”

“나도 미나 누나한테서 배웠어. 나도 이제 잘 찍어.”

“알았어. 네가 찍어.”

“내 행성이들이랑 누나 바라기들이랑 전부 좋아하겠지?”

“좋아할걸?”

팬카페 운영진끼리 연합해서 지한이 생일이랑 내 생일에 지하철 광고, 버스 광고를 해 주기도 했으니까.

우리 둘을 다 파는 사람도 많고, 우리가 잘 지내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고 해 준다.

이번에 나 진짜 잘해야겠다.

지한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둘의 팬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날 위해서라도.’

연기라.

카메라 앞에 서는 게 기대된다.

* * *

“세트 준비 다 끝났어?”

“네! 세팅 다 끝났답니다!”

“배우들은 스탠바이 다 됐어?”

“다녀오겠습니다.”

“우리 이번 주 첫방이야. 첫방 시청률이 중요한 거 알고 있지? 다들 힘내자고!”

“안 PD, 우리도 다 알아. 이상하네. 안 PD답지 않게 이번 드라마에 너무 기합 들어간 거 아니야?”

“이번 드라마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배우님 말이지?”

“네. 오지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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