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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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수능을 치기로 했다.

왠지 그냥 한 번 쳐보고 싶었다.

“누나 편지 써?”

샤워를 하고 나온 지한이 젖은 머리로 거실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는 지연이에게 다가왔다.

“너는 머리도 안 말리고 나오면 어떡해. 감기 걸려.”

“미안. 말릴게.”

누나의 잔소리에 지한이 눈웃음을 치며 잔소리에서 벗어났다.

정말이지 해가 지날수록 능청스러워진다니까.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내 콘센트를 연결한 지한이 머리를 말렸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소리에 동생 주위를 돌던 인절미가 도망쳤다.

“에구구.”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이 머리를 말리는 동안 마실 걸 갖다 줄 생각이었다.

“지연아지연아지연아!!!!!!!”

어제 축하파티를 한다고 늦게까지 있던 바람에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잤던 미나 언니가 일어났는지 윗층이 시끄러웠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물컵에 물을 따르던 지연이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기만 대충 말리고 온 지한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게. 누나는 주스 마실 거야?”

“아니. 나도 그냥 마실래.”

“알았어.”

아이들이 부엌에서 목을 축이고 있자 단번에 아이들이 있는 곳을 찾은 미나가 지연에게 달려들었다.

“지연아. 혹시 괜찮으면 오늘 그거 해 봐도 될까?”

“그거?”

“그 왜 있잖아. 수험생들이 당일 저녁이나 다음 날에 바로 해 보는 거 말이야.”

그냥 대놓고 말하면 될 텐데 나를 배려하는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미나를 보고 지연이 피식 웃었다.

“가채점 말이야?”

“그래! 그거!”

지연이 대놓고 말하자 미나가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래. 이 언니는 솔직한 점이 장점이라니까.

가끔은 너무 솔직해서 걱정이 될 때도 있지만 같이 있던 세월이 세월인지라 지연은 미나의 말에 담긴 순수한 감정을 좋아했다.

“다 같이 거실로 나가서 채점해볼까?”

“응응!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지연이 너는 성적이 잘 나왔을 거 같아서 가채점 하는 거 꼭 보고 싶었어. 나는 수능 안 쳤거든.”

“미나 누나도 수능세대야?”

“이 녀석이! 내가 수능을 안 쳐서 그렇지 수능세대거든?”

자신은 그렇게 나이를 먹지 않았다면서 미나가 지한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찰싹찰싹 내리쳤다.

영훈 오빠의 등짝을 내리치며 숙달된 손놀림이 보였다.

흠. 찰지군.

물을 마신 지연이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자 미나가 지한의 팔뚝을 때리던 것도 멈추고 다가왔다.

“지연아 지금 해 볼래? 응? 응?”

“누가 보면 언니가 시험 본 줄 알겠다.”

“아, 아니. 그냥. 나는 네가 1년 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고생한 성과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그러지.”

“알았어. 가자. 가.”

“잠시만 내가 노트북 가져올게!”

지연의 말에 미나가 노트북을 가지러 후다닥 나갔다.

“저 언니는 결혼해도 똑같네.”

“미나 누나잖아.”

아이들이 웃으며 거실로 걸어나갔다.

* * *

노트북을 가지러 가면서 영훈 오빠도 깨운 건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영훈까지 거실에 모였다.

운동을 끝나고 온 형석 아저씨와 지은 언니까지 다 모인 가운데서 지연이 가방을 가져왔다.

“채점한다?”

“그래.”

“꿀꺽.”

긴장감 어린 모두의 시선 아래 지연이 수험표 뒤에 적어왔던 답과 모니터에 띄워진 답안지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슥, 슥, 슥

수험표 뒤에 동그라미가 하나씩 그려질 때마다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쓰윽, 쓱, 쓰윽, 쓱, 탁!

마지막 문항까지 빠르게 채점을 한 지연이 펜을 내려놓았다.

수험표 뒤에 적힌 번호를 체크한 빨간 동그라미의 물결에 보고 있던 이들이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거 뭐야.”

“설마.”

“응. 답안지 밀려 쓰지 않으면 아마 가채점한 점수 그대로 나올 거야.”

“그러면!”

“지연아, 이대로라면!”

기대에 차 얼굴이 상기된 얼굴들을 본 지연이 덩달아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응. 나 만점일 거야.”

“으아아아아!”

“아이고 우리 지연이!! 잘했어! 진짜 잘했어!!”

월드컵에서 골이라도 넣은 것처럼 함성을 터트리며 달려드는 두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오빠랑 언니가 날 잡아 품에 안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한이랑 형석 아저씨랑 지은언니까지 합류했다.

“고마워. 고마운데 숨막혀.”

“으아아아아!!”

“잘했어!! 진짜 넌 천재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장하십니다, 아가씨.”

“누나 너무 멋져.”

숨막혀 이 사람들아!

제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는 건 좋지만 이러다가 나 질식하겠다고!

모두가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30초를 기다려 준 지연이 30을 세자마자 가차 없이 모두를 떨어트렸다.

강제로 밀쳐 떨어져도 좋은지 뒤로 넘어간 모두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110. 누나 해 줄 거지?

수능 끝내고 점수를 확인한 지연이 다시 회사로 나갔다.

원서접수를 할 게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점수 나오는 날만 기다리면 됐다.

“저건 뭐야.”

로비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현수막에 지연이 멍하니 말했다.

뒤따라오던 지한과 영훈이 지연이 보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축 오지연 2011학년도 수능 만점(가채점) 축>

지연이 떨떠름하게 손가락으로 현수막을 가리키자 로비를 오가던 직원들이 아이들에게 모여들었다.

“지연아. 너 수능 만점 받았다며!”

“세상에 어떻게 1년 공부하고 만점을 받아?”

“축하해! 그리고 수능 치느라 고생했어.”

이제는 진짜 친척들처럼 아이들을 대하는 직원들이 지연의 가채점 만점 소식을 듣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어. 다들 감사합니다. 아니, 그런데 다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확답을 얻고 싶었던 지연이 몇 년 동안 부대끼며 같이 살았던 탑엔터 이모, 삼촌들을 바라보자 다들 눈빛으로 전했다.

‘알고 있으면서 뭘 그래.’

‘우리 회사 로비에 저걸 달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지.’

‘지연아. 알잖아….’

아련하게 전해져오는 눈빛에 지연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할 딱 한 사람이 아이들이 있는 로비로 걸어왔다.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사장님!”

“하하.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남 비서를 뒤에 달고 내려온 공 사장이 말 한마디로 직원들을 흩어버리고 지연이에게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철저히 비즈니스 모드였던 공 사장의 얼굴에 어느새 칠칠맞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장님. 저거 사장님이 건 거예요?”

“그래. 네가 무려 만점을 받았잖니!”

“가채점인데요.”

“가채점이지. 하지만 OMR 밀려 쓰지만 않으면 가채점한 대로 나올 거라며.”

공 사장의 말에 지연이 영훈을 휙 째려봤다.

영훈 오빠도 진짜.

그새 일러바쳤어!

지연의 눈빛에 영훈이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겠는가.

자신이 아무리 실장이 되었어도 나는 월급쟁이에 불과한 걸.

영훈을 잠시 째려본 지연이 다시 주민을 돌아봤다.

“수능 치느라 고생했다. 올라가자. 회의실에 맛있는 거 준비했다.”

“사장님은 아직도 제가 어린앤 줄 아세요?”

나 어릴 때에도 먹을 거에 안 넘어갔는데.

지연이 짐짓 입을 삐죽이는 시늉을 하자 주민이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물론 아니지. 그냥 수능 끝나고 같이 축하파티 하기로 했는데 못 간 게 미안해서 그러지.”

“사장님은 애 아빠잖아요. 당연히 사장님 집에 가야죠.”

“하지만 와이프도 네 파티 못 가서 아쉬워하던데.”

“어쩔 수 없죠. 유나는 엄마 아빠가 필요하잖아요.”

이제 유부남에다 어엿한 애 아빠까지 된 주민이지만 여전히 지연과 지한을 챙겼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도 어느새 애가 생긴 애 아빠구나.

처음에 주민이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었는데.

심지어 그 상대가 가수 2실 팀장이라니!

얘기를 들어보니 나 때문에 자주 오가다가 눈이 맞았다고 한다.

험하고 힘든 일인데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웬만한 남자 못지않은 카리스마로 방송국을 상대하고 가수들을 휘어잡는 모습에 반했댔나?

그렇게 3년 동안 연애하다가 작년에 결혼에 골인.

나랑 지한이가 축가를 불러주는데 둘 다 펑펑 울더라.

둘 다 우는 바람에 내가 부른 게 축가가 아니라 이별송인 줄 알았잖아.

‘사장님 왜 울었어요.’

‘내 허리까지 오던 애들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자라서 내 결혼식 축가도 불러주고. 크헝.’

‘팀장님은 또 왜 울어요?’

‘너희들 언제 이렇게 컸어. 흡. 잘 자라줘서 고마워.’

축가 부르다가 신랑 신부 눈물 닦아준 적은 처음이었다.

결혼하고도 사장님 와이프는 모두에게 일할 땐 다 같은 직원이라고 말하며 결혼 전과 똑같이 일했었다.

그러다가 올 초에 갑자기 임신 소식을 알려왔지.

깜짝 놀라서 어영부영하는 사이 팀장님 배는 불러왔고, 9월 모평 하고 난 다음 날 사장님 딸 유나가 태어났다.

“다음에 유나 보러 한번 갈게요.”

“그래. 와이프도 좋아할 거야.”

주민이 집에 있는 아내와 딸 생각을 했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어서 가자. 음식 식겠다.”

“다 같이 먹는 거죠?”

“그래.”

수능 친 날부터 계속 축하와 파티가 이어지니 조금 어색했다.

원래 다들 이렇게 오래 축하받는 건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편이 계속 붕 뜬 기분이었다.

“가요!”

자신도 모르게 지연의 얼굴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우물우물. 쩝.

앨범 컨셉 회의를 할 때 쓰는 회의실에 음식물을 섭취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파티 업체라도 불렀는지 회의실 벽에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문구가 붙어 있었고 천장에는 헬륨풍선이 둥둥 떠 있었다.

“사장님 파티플래너라도 불렀어요?”

“와이프가 아는 사람이 있대.”

불렀단 말이구만.

고작 수능 한 번 치른 것치곤 과한 대접이었지만 회사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오직 지연만 조금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사장님. 오전 중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만.”

“남 비서가 알아서 해.”

“사장님이 가셔야 합니다.”

남 비서의 재촉에 주민이 아쉬워하면서 일어났다.

“그럼 맛있게 먹어. 지연아 다시 한번 축하한다.”

“네. 사장님 잘 먹을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일하러 나가는 아빠를 배웅하는 것처럼 지연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지한이 옆에서 같이 손을 흔들었다.

주민이 사라지고 사장이 없는 자리에서 직원들이 신나게 음식에 달려들었다.

“지연아. 우물. 너도 이제, 우물. 다시 활동해야지.”

“아 거참. 먹는데 말하지 마.”

은주 언니가 입 안을 보여주면서 말하는 팀원에게 물티슈를 건넸다.

팀장님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입을 가린 팀원이 입을 막고 빠르게 턱을 움직였다.

“꿀꺽. 그래. 지연아 이제 다시 활동할 거지?”

은주의 팀원이자 가수 2실 소속인 장훈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해서 이 업계에 들어온 장훈은 온갖 스펙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였다.

몇 년 사이에 엔터 업계에서 위상을 드높인 탑엔터에 들어오기 위해서 온갖 외국어와 운전 실력을 쌓은 장훈은 면접 때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당당히 ‘지연’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패기와 열정을 높게 사 뽑았다고 했지?

아직도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나일까?

확신할 수 없지만 저렇게 눈을 빛내는 걸 보니 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분명한 것 같았다.

희의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지연이에게 향했다.

“네. 저도 다시 활동하고 싶어요.”

“조오아써!”

장훈이 파이팅하는 자세로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옆에 있다가 콜라를 쏟은 은주가 장훈을 째려봤다.

‘저렇게 좋아하지 말고 당장 옆을 봐야 할 거 같은데.’

스펙도 좋고 열정도 좋고 성격도 좋은데 가끔 한 곳만 보고 가는 게 문제였다.

그럴 때마다 주위의 시선을 잊은 듯 눈치 없이 행동하는 오빠였는데 오늘도 은주 언니한테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누나 그럼 나 이번에 드라마 들어가면 OST 불러 줄 수 있어? 내가 PD님한테 말해볼게.”

“지한이 너도 들어가고 싶은 거 있어?”

“대본 봤는데 괜찮은 거 같아서.”

“지한아, 너도 대본 정했어?”

옆에 있던 영훈이 눈을 번뜩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드디어 활동하는 건가?

우리 회사 최고의 에이스들이.

작년 한 해 아이들이 쉬면서 이상하게 회사를 견인하는 다른 배우들은 휴식기에 들어가거나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지연이의 뒤를 잇기 위해서 남자 아이돌그룹이 데뷔한 것도 지연의 후배라고 홍보한 것에 비해서 인기가 저조했다.

그래도 망한 수준은 아니어서 바로 다음 앨범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OST 부를까? OST라면 바로 활동하기도 편할 거 같은데.”

“응, 불러줘.”

“은주 언니. 걔네들 컴백 언제야?”

“알타이르? 걔네 1월로 잡고 준비 중.”

“얼마 안 남았네.”

지연의 후배인 알타이르의 컴백이 1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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