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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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올게!”

질서 정연한 분위기와 모두에게 방긋방긋 웃어주는 지연 덕분에 관계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팬사인회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아니, 마무리되는 듯했다.

“지연아 ‘백귀야행’도 너무 좋더라. 활동할 생각은 없니?”

어떤 팬이 폭탄을 떨어트리기 전까지.

남매 모두의 팬이었던 그녀는 미국에서 두 아이가 함께 앨범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좋아서 날뛰었다.

이번에 국내로 돌아오면 같이 앨범활동을 할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TV에서 백귀야행 활동을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조금 서운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물음에 지연과 주위의 관심이 집중되자 당황한 그녀는 조금 떨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질문을 한 팬과 시선을 마주친 지연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궁금하면 이번 달 말을 기다려 주세요.”

!!!!!!!!!

지연의 말에 모두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올랐다.

손을 흔들고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떠나는 지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멍하니 생각했다.

연말이라면 각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연말무대일 텐데.

“…‘백귀야행’이라면 지한이도 같이 나오는 거 아니야?”

…꺄아아아악!

지연이 떠난 자리 팬들이 모두 익룡에 빙의되어 날뛰었다.

행사를 정리하러 온 관계자는 지연이 있는 동안 얌전하던 팬들이 갑자기 봉인이라도 해제된 것처럼 날뛰는 것을 보고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직은 들어갈 때가 아닌 것 같았다.

* * *

자신이 남기고 온 말 한 마디에 비명이 터져나왔던 팬사인회장을 떠올린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지연이 너. 왜 그랬어.”

“왜에. 어차피 알려질 거였잖아.”

“그렇긴 하지만.”

“회사에서 곧 기사 낸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우리의 비장의 무기였단 말이야.”

조금 더 결정적일 때 내고 싶었다며 은주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내 팬들 오늘 정말 착하지 않았어? 언니들이랑 다른 가수들한테 들었을 때 팬미팅에서 사고치는 사람도 있다고 했는걸.”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는 법이지. 물론 지연이 네 팬들은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지만.”

“아마 도련님이랑 아가씨 두 분 다 좋아하는 팬들이 많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카페 내 자정작용도 잘 되고 있는 것 같고요.”

“자정작용요?”

“팬들 내에서 분란분자들을 알아서 걸러낸다는 뜻입니다.”

“아아.”

“지은 언니는 진짜 모르는 게 없는 거 같네.”

아무튼 팬들을 직접 보니 더 좋았다.

날 보고 우는 사람도 있던데 다음에는 웃어줬으면 좋겠다.

회사에 도착한 지연이 곧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누나!”

지한이 사인회에서 돌아온 지연을 반갑게 맞이했다.

품에 안긴 동생에게서 땀 냄새가 났다.

“늦어서 미안. 혼자 연습했어?”

“응!”

이렇게 우리 둘이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있는 연습실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둘은 ‘백귀야행’으로 연말무대에 나간다.

105. 스페셜 무대

그동안 회사에서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지만 지연이 사인회에서 연말무대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왔다는 소식에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 팀장님 방송국에서 연락 오는데요?”

“보도 자료 풀라고 하세요. 특별무대만 가질 거라고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네. 기자님. 지연이 무대요? 네. 맞아요. 지한이랑 같이 할 겁니다. 하하. 처음이죠.”

“모든 방송사에서 다 합니다. 네. 네.”

영훈의 지시에 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지연의 컴백과 함께 인원을 늘렸던 것이 무색하게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응대하느라 영훈의 팀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지연이가 사고를 칠 줄 몰랐는데.”

분주한 팀원들을 본 영훈이 힘없이 말했다.

그러다 곧 걸려오는 전화에 언제 힘이 없었냐는 듯이 쌩쌩한 목소리로 응대하기 시작했다.

* * *

“히히.”

“지한이 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안 힘들어?”

“안 힘들어. 나는 지금 엄청 좋아! 더 할 수 있어.”

한겨울임에도 탑엔터 연습실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지한과 지연이 연말무대에 맞춰 함께 연습하고 있었다.

아직도 쌩쌩한 아이들을 보고 댄서들은 다들 물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애들은 24시간 지치지 않는다더니.’

‘지연이는 스케줄도 하고 왔잖아. 왜 안 지쳐?’

‘어른으로서 벌써 지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이건 댄서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고.’

금방이라도 다시 반주를 틀어 연습할 것 같은 아이들을 보고 다들 축 처진 팔다리를 움직였다.

힘들어 보이는 댄서들을 보고 지연이 동생에게 말했다.

“지한이 노래 잘하더라.”

“정말?”

“응. 조수경 선생님이 보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걸?”

“헤헤. 저번에 매튜랑 녹음하면서 많이 는 거 같아.”

“누나도 그때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어.”

“매튜는 조금 귀찮은 사람이지만 확실히 좋은 사람인 거 같아.”

“자기 몸만 더 잘 챙기면 좋을 텐데.”

아이들이 미국에서 만났던 신기한 인연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랑 같이 무대해서 좋아.”

“그만큼 힘들진 않고? 3곳 다 준비하느라 엄청 바쁘잖아.”

“누나가 더 바쁘잖아. 나는 지금 촬영하는 게 없는걸.”

그렇게 말한 지한이 자신만 편하게 연습하는 거 같아서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나는 아직 할만한걸? 그리고 날 위해서 팬미팅도 내년으로 미뤄줬잖아. 이 정도는 열심히 해야지.”

벌써 팬클럽 인원이 5만을 넘었다고 들었다.

1만 명 정도는 데뷔 전에도 있었지만 나머지 인원은 전부 반년 안에 채워진 숫자다.

“나도 곧 지한이처럼 팬클럽 이름이 생기겠다.”

“누나도 플래닛 해.”

“그럼 너랑 겹치잖아.”

“겹치면 안 돼?”

“물론 너랑 나랑 둘 다 좋아해주는 팬들이 많지만 이름을 따로 가지길 원하는 팬들도 있을 거야.”

“그럼 나도 누나 팬 할래!”

“아직 누나 팬 아니었어? 누난 이미 행성인데?”

지연이 서운하다는 듯이 눈썹을 늘어트리자 당황한 지한이 손을 파닥이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누나 팬이야.”

“정말?”

“…놀리지 마.”

지연이 놀렸다는 것을 안 지한이 입을 삐죽였다.

당했어!

치사해!

살짝 토라진 동생을 달래면서 지연이 무대로 관심을 돌렸다.

“미안해. 안 놀릴게. 그런데 어떻게 노래를 두 곡씩 짝지을 생각을 다했어?”

“그냥 둘이 잘 어울려서? 공연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그런데 난 ‘백귀야행’에 있는 곡 전부 다 하고 싶었어.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전부 다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한 거야.”

“우리 지한이 엄청 똑똑한걸?”

지연이 동생을 칭찬하며 손가락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럼 다시 준비해 볼까? 저승사자랑 구미호.”

“응!”

누나의 말에 지한이 벌떡 일어났다.

이제 괴이가 될 시간이었다.

지한의 등 뒤로 하얀 무언가가 살랑거리는 듯했다.

* * *

[HOT]행성이들 집합

지은이 오씨남매012

여러분 드디어 오늘이 왔습니다.

방청권 추첨에서 떨어져서 TV 앞에 계신 분들 거수해주세요.

└1번

└2번

└3

└44

└나 행성은 왜 방청권에서 떨어졌냐ㅠㅠㅠㅠㅠㅠㅠ555555555

└제 친구는 됐더라고요. 친구야. 잘 있니? 거긴 따뜻하고…?6666666666

└└윗 행성 친구분 부럽. 오늘 같은 날 애들 무대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7!

└지연이 사인회 이후 이 날만을 기다렸다.

└└나도

└└나도22222

└백귀야행이라고? 지난달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곡의 무대를 직관할 수 있는 건가?

└└부럽다ㅠㅠㅠㅠ방청권 당첨됐니?

└└└아니.

└└└└?

└└└└└KBC는 떨어짐

└└└└└└뭐야ㅋㅋ그럼 나머진 됐음?

└└└└└└└끄덕

└└뭐야 너무 부럽잖아.

└└나도 보고 싶다! 우리애들 백귀야행 무대!

└└나도ㅠㅠㅠㅠㅠㅠ

└왠지 모르지만 이번 무대 못 간 걸 엄청 후회할 거 같음.

└전설의 무대가 될 예정임. 당연히 후회함. 나도 지금 후회중.

└└왜 난 떨어져서ㅠㅠㅠㅠㅠㅠ

한 해가 마무리되는 연말엔 모두가 바빴지만 방송가들도 정신없이 바쁜 때였다.

하지만 지연과 지한의 팬들은 모두 이날만을 기다렸다.

사인회가 있었던 날로부터 무려 한 달에 가까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이 날이 되었다.

‘우리 애들이 한 무대에 서는 날이!’

오죽하면 카페 대문에 수능도 아닌데 디데이가 올려 있었겠는가.

D-DAY가 된 오늘 방청권에 당첨된 이든 아닌 이든 모두 아이들의 무대를 보기 위해서 방송국,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요무대 중에 가장 먼저 시작하는 SBC는 벌써부터 올라가는 시청률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올해는 정말 최고의 해였다.

SBC 드라마에서는 오지한이, 예능에서는 오지연이 활약해 주었으니까.

“이번에 그 둘을 잡은 건 두고두고 잘한 일이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올라가는 시청률에 모두가 얼굴 가득 미소를 걸고 일하고 있었다.

“그래도 긴장은 늦추지 말자고. 오늘 사고 터지면 그동안 쌓았던 이미지를 한 번에 말아먹는 거니까. 특히 오지한 팬들이 우리 방송국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옙!”

지한의 팬을 들먹이자 방송국 사람들이 기합이 들어간 채 말했다.

아직 어린 배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지한은 넓은 연령대의 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팬들이 어디에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고 보면 내 아내가 혹은 내 딸이 오지한의 팬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직원들은 눈에 힘을 주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방청권에서 떨어졌다고 했는데 방송까지 잘못되면 내 딸을 볼 면목이 없어.’

‘해주 씨가 오지한, 오지연 팬이라고 했었지? 이번에 잘못되면 끝이다.’

각기 자신의 가족, 연인 등을 생각한 직원들이 기합이 들어간 것을 보자 조정실에 와 있던 국장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래. 이 정도만 하자고.

“광고 끝나갑니다.”

“좋아. 다들 힘내자고.”

* * *

‘드디어 우리 애들 차례야!’

지한의 팬클럽인 플래닛의 회원이자 지연의 팬이기도 한 수정이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이제 슬슬 나오겠죠?”

“그럼요. 스페셜 무대 할 시간이에요.”

“아아. 얼른 보고 싶다.”

“우리 힘내요. 오늘 밀리면 안 돼요.”

“맞아요. 그런데 올해 따라 왜 이리 쟁쟁한 가수들이 많죠?”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지연이 상 하나 받아가야 하는데.”

남매를 무대를 기다리면서 팬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작게 대화했다.

거대 기획사 소속의 신인 남자아이돌과 쟁쟁한 실력의 발라드 그룹, 가수. 거기에 트로트 가수들까지.

이들은 모르겠지만 올해 가요대전에 참가한 가수들 중 태반이 미래에서도 쟁쟁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 사이에 지연이 이름을 올린 것도 대단하지만 팬들로서는 아직 어린 지연이 참가자들 사이에서 기가 죽지 않을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드디어 이분 차례네요. 아니, 이분들인가요?]

[저 먼 땅에서도 이분들의 노래가 아주 유명하다고 하죠?]

MC들의 말에 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애들 나올 차롄가 봐!

손에 쥐고 있던 응원 문구가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수정이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무대 위를 바라봤다.

무대 위로 작은 인영이 보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오지연! 오지한!”

그림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애는 내 애였다!

어느새 자신도 함성을 지르고 있는 수정의 귀로 MC의 멘트가 들렸다.

[가수 지연과 배우 오지한의 특별무대입니다.]

머리 위를 비추는 조명을 제외한 모든 불빛이 꺼졌다.

푸른 조명이 머리 위를 비추자 함성을 지르는 팬들이 일시에 입을 닫았다.

바닥을 기고 있는 스모그가 조명을 받아 음산하게 일렁였다.

푸른 조명과 스크린에 뜬 달이 무대를 비추고 있을 때 어디선가 흘러온 대금 소리가 정적을 부쉈다.

고개를 숙인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대 잘 있나요.

날 두고 혼자 떠난 그대♬

서글픈 선율에 수정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하도 많이 들어서 첫 소절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백귀야행’에 수록된 곡 중 하나인 ‘Red Heart’다.

푸른 조명 아래 그림자 진 지한의 얼굴이 슬프고 또 뭔가 모르게 무서웠다.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나요.

깊고 푸르렀던 그곳♬

가만히 서 있던 지한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흡사 실연에 빠진 이가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 같기도 했고,

푸른 조명 때문인지 귀신의 움직임 같기도 했다.

대금 소리 위에 피아노 선율이 얹어졌다.

피아노와 함께 서서히 조명이 밝아지고 지한의 움직임 역시 조금 생기가 돌았다.

♬다정한 손길로

다친 나를 보듬어 주었죠.

우리 다시 만난 날.

괜찮아요.

나를 기억 못해도♬

지한의 얼굴이 가사와는 반대로 서글퍼 보였다.

가사를 듣기만 했을 때는 이렇게 슬픈 노래인 줄 몰랐는데 연기가 섞인 지한의 무대를 보니 가슴이 저려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흡.”

“크흡.”

자신만 그런 게 아닌지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수정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밝아진 조명 아래로 무대 뒤를 차지한 대금과 피아노가 어렴풋이 보였다.

조명 아래 드러난 지한은 선비처럼 푸른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 자태가 고와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로 보였다.

‘한복이라니! 우리 지한이는 어쩜 한복도 저렇게 잘 어울려. 다음 작품은 사극이다!’

환한 조명 아래 지한의 머리카락은 ‘바이러스’ 때처럼 하얬다.

다만 그때와는 달리 가발인지 머리카락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하얀 머리를 한 선비라니!

환상의 조합에 수정이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노래가 흘러가는 동안 지한의 모습에 푹 빠져있던 수정은 갑자기 나른하던 얼굴을 들어 날카로운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지한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지한의 붉은 입술이 입을 열었다.

…곧 100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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