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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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하지만 일단 나 혼자 해 볼래.”

동생의 말에 지연이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도움 없이 혼자 해 보겠다는 말에 동생의 승부욕을 느낀 지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나 잘할게!”

“잘 못 해도 괜찮아. 재밌게 해 봐.”

“알았어. 그런데 누나 어디까지 썼어?”

“1절 반.”

“벌써? 나 한 번 들어봐도 돼?”

매튜가 들려줬으니까 얼마든지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지연이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시작한다?”

숨을 들이켠 지연이 입을 벌렸다.

지연의 입에서 낮고 서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Name, Name, Name

너를 데리러 간다.

외로이 홀로 있을 널 위해서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너울치는 베일을 뒤집어쓰고

곱게 단장하여♬

지연이 노래를 멈췄다.

초롱초롱한 동생의 시선을 받은 지연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일단은 여기까지?”

“우와아아아아! 누나 멋져!”

지한이 엎드려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누나 멋져! 진짜 좋아! 한 번 더 해 줘.”

“아직 다 못 썼어.”

“그 부분만이라도 다시 해 줘.”

“조금 이따가.”

“치사해!”

“그럼 지한이 너도 들려줘.”

“앗. 안 돼. 나는 조금 이따가.”

“지한이 네가 더 치사해!”

“아니야!”

종이를 품에 안고 안 보여주려고 기를 쓰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나의 모습에 지한이 움찔했지만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저렇게 좋은 가사를 썼는데 나도 더 좋은 걸 써야지.

누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자신도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누나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보여줘어어.”

“안 돼에에.”

지연과 지한이 한동안 방 안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누나를 동경해서 나란히 서고 싶어 하는 동생의 마음도 모른 채, 지연이 동생이 반항기가 왔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101. 백귀야행(2)

아이들에게 과제 아닌 과제를 내려준 매튜는 며칠 동안 혹사시킨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푹 쉬기로 했다.

“이거 먹어요.”

“매번 감사합니다.”

“뭘요. 이제 잘 먹고 잘 자기로 했다면서요?”

“네. 이거 원. 아이들이랑 각서까지 썼으니 지켜야죠.”

소파에 앉아 엠마가 구워온 머핀을 먹으며 멍하니 TV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을 듣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잠도 못 자고 작업하는 건가요?”

“하하. 그런 건 아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풀릴 때까지 붙잡는 편이죠.”

“그러면 이번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보네요.”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잘 풀렸죠.”

잘 풀렸는데 오래 붙잡고 있었단 말에 엠마가 그를 돌아봤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 매튜가 단어를 고심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오히려 애들이 가진 한계를 잘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까요?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예상보다 더 잘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맞춰서 또 만들고 갈아엎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까 일이 이렇게 됐네요.”

“아! 중간중간에 아이들보고 한 번 들어보라고 했던 게 그거 때문이었군요.”

“맞아요. 작업을 하는 짧은 순간에도 아이들 실력이 몰라보게 느니까 욕심을 참을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할로윈 특집 곡들은 전부 난이도가 꽤 높아져 버렸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수월하게 곡을 소화했으니 매튜는 아이들과 곡 작업을 하는 게 즐거워서 어쩔 줄 몰랐다.

‘역시 내 뮤즈. 신이 내린 선물!’

매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 얼굴을 본 엠마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이들과 작업한 게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네요.”

“맞아요. 그 아이들이랑 같이 있으면 계속해서 곡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 같은 느낌이에요. 제 인생에 둘도 없을 뮤즈들이죠.”

“매튜 씨에게도 아이들이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요. 우리 남편도 아이들과 통화하거나 지연의 작품을 볼 때면 매튜 씨처럼 웃곤 한답니다.”

“헨리 교수님도요? 아이들이 저만의 뮤즈가 아니란 사실이 슬프네요.”

“그래도 정말 이야기 속에 나오는 뮤즈 같지 않나요? 우리같이 영감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니까요.”

“그 말을 들어보니 정말 아이들이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신 같네요.”

엠마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아이들의 칭찬에 자신이 다 기뻤다.

‘진짜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지도 모르지.’

엠마는 아직도 2001년 지연이 헨리에게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지연은 남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남편이 그림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니 더더욱 소중했다.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남매를 떠올린 엠마가 이번에는 그 둘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들어가 있는 방문을 힐끔 바라본 엠마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아이들이 고생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죠. 타르트를 구워볼까 해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매튜 씨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계세요.”

딱 봐도 부엌에 들어와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어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려고 하는가.

엠마의 칼 같은 거절에 매튜가 시무룩해져 얌전히 머핀을 입에 물었다.

* * *

쉽게 풀리지 않는 작사 작업에 아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고 있는 사이 갤러리 영업 종료 시간까지 고생한 사람들이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저희 왔어요오.”

영훈과 미나가 축 처진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지연이 매튜와 작업하는 동안 갤러리는 영훈과 미나, 두 사람이 지켰다.

‘Dear’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답을 해 주고, 헨리에 도움을 요청하면 일을 도와주러 가기도 했다.

낯선 이들 사이에서 외국어로 답해준다고 녹초가 된 두 사람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생 많았어요.”

“하하. 저희가 한 게 있나요. 교수님은 금방 오실 겁니다.”

“그이야 알아서 잘 오겠죠. 다들 식사하실래요?”

“밥 먹을 힘도 없어요.”

“그대로 자고 싶어요.”

기운 없이 늘어진 두 사람을 본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자면 중간에 깰 거예요. 간단하게 뭐라도 마셔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저도 마시는 거라면.”

부엌에서 엠마가 우유와 바나나를 갈아서 가져왔다.

잔을 받아 들고 꿀꺽꿀꺽 마신 영훈은 대충 배가 차는 거 같자 아이들을 찾았다.

“지한이랑 지연이는요?”

“작사하느라 방에 들어가 있어요.”

“작사요?”

영훈이 고개를 돌려 매튜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매튜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영훈의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우리 애들 괴롭혔지.’

‘하하하하 날이 참 좋네.’

한숨을 쉰 영훈이 으쌰! 하는 소리를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엠마가 알려준 방으로 간 영훈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얘들아 들어가도 돼?”

영훈이 물었지만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애들이 자나?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아무리 새나라의 어린이인 아이들이라도 아직 9시도 안 됐다.

영훈이 반응 없는 아이들을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얘들아?”

방문을 들어간 영훈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죽였다.

바닥에 엎드려 종이에 글을 쓰고 있는 아이들 주위로 낱장의 종이들이 펼쳐져 있었다.

원하는 가사가 안 나왔는지 글자 위에 선이 죽죽 그어져 있기도 했고 까맣게 칠해져 있는 글자도 보였다.

엠마한테 부탁한 건지 아이들 사이에는 사전도 있었는데 지한이 원하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지 사전을 이리저리 넘기고 있었다.

‘방해하면 안 되겠네.’

처음하는 일이라 쉽지 않을 텐데도 묵묵히 해내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을 본 영훈이 미소를 띠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온 영훈이 거실로 나오자 엠마가 혼자 나온 영훈을 보고 물었다.

“아이들은요?”

“너무 열심히 하고 있어서 그냥 두고 왔어요.”

“아까 매튜보고 몸 생각 안 한다고 뭐라고 하더니 애들도 참.”

“그랬어요?”

엠마의 말에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매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훈. 아이들을 정말 잘 키우셨더군요. 지연에게 구두로 하는 약속은 구속력이 없다고 한 것도 영훈이 가르친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제가 잘 가르치지 않아도 똑 부러집니다. 저보다 더 똑똑하죠.”

자랑할 일이 아니지만 영훈은 이미 아이들을 만날 때부터 혼자 알아서 다 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훈의 주접은 그가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로 넘어갔다.

“저는 그때 막내였는데 회사에서 이제 갓 데뷔한 신인을 담당하라는 겁니다. 당황해서 어떻게 할지 몰랐는데 지연이가 글쎄 지한이를 그렇게 잘 챙기지 뭡니까.”

“호오? 그랬군요. 더 자세히 들려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들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한이가 연기한 걸 보고 임원진 모두가 울었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영훈을 보고 미나가 질린 얼굴을 했다.

저 오빠 또 시작이네.

저렇게 발동 걸리면 쉽게 멈출 수 없었다.

“저는 이만 씻으러 들어가 볼게요.”

“오늘 하루도 고생많았어요. 쉬세요.”

“네에.”

미나가 몸을 질질 끌며 욕실로 향했다.

어서 씻고 자야지.

“지한이가 처음으로 찍은 드라마가….”

“흠? 호오. 역시.”

미나의 등 뒤로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떠드는 영훈의 목소리와 가끔 추임새를 넣어주는 매튜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 * *

“다 했다!”

“나도 끄읏!”

아이들이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있어서 저린 팔과 어깨를 풀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지연이 벌써 내 몸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날 리 없다면서 몸에서 나는 소리를 무시했다.

작사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일이라 실패도 많았다.

매튜는 천천히 하라면서 시간을 줬는데 할로윈 특집으로 만든 곡이니까 할로윈이 오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할로윈 전에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몇 시지?”

“누나, 벌써 11시야.”

“어쩐지 배고프더라.”

아침을 먹자마자 들어와서 가사를 썼으니 못해도 3시간 정도 지났다.

“나가자. 매튜한테 보여줘야지.”

“응!”

아이들이 공들여 쓴 가사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어? 언니랑 오빠 있었네. 오늘은 갤러리 안 가?”

“오늘은 쉬는 날.”

“우리도 좀 쉬어야지.”

언니와 오빠의 말에 지연의 양심이 콕콕 쑤셨다.

내 전시인데 애꿎은 두 사람만 고생시키고 있는 것 같네.

내일부터는 나도 다시 갤러리에 나가야겠다.

“그런데 오늘은 일찍 나왔네. 아직 밥 먹기에는 조금 이른데.”

“우리 다 했어.”

“뭐? 벌써?”

“응! 형도 볼래?”

아이들의 말에 영훈이 허리를 세웠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봤는데 어떻게 썼더라도 잘했다고 칭찬해 줄 생각이었다.

“흐아암. 뭐야. 너희들도 나왔네.”

아이들 뒤로 매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왔다.

그동안 못 잤던 것을 몰아서 자기라도 하는 듯이 작업이 끝난 매튜는 동네 백수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튜! 우리 다 썼어요.”

“전부 다 했어요.”

“오오. 그래? 어디 어떻게 썼는지 한번 볼까?”

“저도 같이 볼 겁니다.”

“언니도 봐도 돼?”

“물론이지!”

“엠마도 같이 봐요.”

“어머나. 나도 봐도 될까?”

“엠마는 괜찮아요.”

“고마워.”

심사를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오디션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사를 쓴 건데 너도나도 봐 주겠다는 어른들을 보고 지연이 조금 긴장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미안. 피곤할 텐데 괜찮아?”

“괜찮아. 나한테 너희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영훈 오빠가 저런 말을?

흡사 순정만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한테 고백할 때 하는 말 같잖아?

미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팔을 벅벅 긁었다.

미나 언니는 아직 항마력이 부족하구나.

“당신 누구야. 고영훈 아니지.”

“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고영훈 맞네.”

나를 이렇게 홀대하는 이는 고영훈밖에 없지.

따지고 보면 몇 명 더 있었지만 미나는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그럼 가사에 맞춰서 한번 불러볼래?”

“바로?”

“내가 만든 곡에 잘 맞는지 보고 싶으니까. 불러 줄 수 있어?”

지연과 지한이 서로를 바라봤다.

‘할까?’

‘난 좋아.’

동생도 괜찮은 거 같으니 그럼 한번 해 볼까?

지연이 매튜를 돌아봤다.

“할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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