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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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남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장님. 여기 아이들 반려동물을 보러 나간 송 대리의 보고입니다.”

“맡기신 조사 다 끝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남 실장님 이번 주 특이사항 건 정리해서 보고서 올렸습니다.”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비서실 직원들이 한 무더기로 몰려와 남 비서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새로 얻은 업무도 중요했지만 이전 사항도 무시할 수 없었다.

주민 덕에 얻었던 정신적 피로를 뒤로 한 채, 남 비서가 하나씩 보고사항을 살폈다.

“아이들 미국 일정이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목소리를 들려주면 얌전해진다고 했으니 녹음해 뒀던 파일을 들려주도록 하세요. 그래도 인절미랑 모짜랑 기운이 없으면 음성통화를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넵.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다른 소속사와 작곡가 간 비밀계약에 대한 건이군요. 잘 확인했습니다. 이대로 사장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특이사항 건은 이게 답니까?”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퇴근하시기 전까지 준비해 주십시오. 이상이 없으면 내일 오전에 사장님께 함께 보고드릴 겁니다.”

“네, 실장님!”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모두에게 답변해 준 남 비서가 통화를 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섰다.

지연이의 그림을 낙찰받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했다.

‘노리고 있는 사람은 대충 호영호텔 사장님이랑 에밀리, 큰 사모님인가.’

셋 다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돈과 스케줄, 대리인 등을 파악해야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한 남 비서가 주소록을 뒤져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천 변호사님. 잘 지내셨습니까. 네. 네. 다름이 아니라….”

지연의 그림을 낙찰받기 위해서 물밑작업을 하는 남 비서의 통화가 길어졌다.

* * *

매튜와 음악적 교류를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꽤 즐거웠다.

우리와 말 몇 마디 나누더니 무언가 영감이라도 받은 것처럼 후다닥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완성된 곡을 지한이랑 나와 번갈아 가면서 부르고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서 어떤 부분이 좋았고 안 좋았는지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면 그 얘기를 들은 매튜가 곡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곡을 만드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요 일주인 사이에 벌써 10곡이나 되었다.

“매튜 안 자?”

“흐흐. 이것까지만 하고.”

충혈된 눈으로 밤새 작업을 했는지 퀭한 얼굴이 된 매튜의 대답을 들은 지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랑 지한이도 한 가지에 몰두하면 밥 먹고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저 사람은 너무 과했다.

왜 에릭이라는 사람이 옆에 붙어서 잔소리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러다 수명 줄겠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끝나면 이번에는 바로 피드백을 주지 않고 끌고 가 침대에 눕혀야겠다.

헨리 선생님 집에서 시체를 치울 순 없지.

지연이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헨리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거실 한 쪽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매튜를 조용히 지켜봤다.

‘안 피곤한가?’

눈에 핏발이 서고 피부마저 푸석했다.

물도 제대로 안 마셨는지 입술이 갈라져 거칠어져 있었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은 처음보다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매튜를 말릴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뚫어져라 모니터를 보고 있는 시선.

그 시선에 담긴 타들어갈 것 같은 열정.

자신도 작업을 하면서 주위를 잊고 몰두한 적이 있어서 매튜를 말릴 수 없었다.

“다 됐다….”

마지막으로 곡을 저장한 매튜가 힘이 빠진 듯 몸을 축 늘어트렸다.

“다 했어요?”

“응. 한번 들어 볼래?”

“나중에요. 지금은 좀 자는 게 어때요?”

“한 번만 불러주면,”

“안 돼요. 안 부를 거예요. 들어가서 자세요.”

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눈앞에서 거절당한 매튜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자고 일어나면 지한이랑 같이 들을게요.”

“그래. 흐아아아암.”

지연의 대답을 들은 매튜가 이제 잠이 몰려오는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애들이 자고 있을 때도 곡 작업을 하느라 잠을 못 자긴 했지.

벌써 11번째 곡인가?

매튜가 눈을 비비며 엠마가 내 준 방으로 향했다.

‘얼른 자고 일어나서 애들한테 저 곡을 불러달라고 해야지.’

아이들이 저 곡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순간이 기다려졌다.

99. 할로윈

한숨 자고 나온 매튜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자! 어서 불러줘!”

자고 일어났더니 아까보다 안색이 좋아 보였다.

아침 일찍 자서 지금 벌써 저녁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배 안 고픈가?

“매튜 밥 안 먹어요?”

“괜찮아. 지금은 이걸 듣는 게 더 중요해.”

“그러면 안 되죠.”

엠마가 매튜의 뒤에서 나타났다.

“예? 하지만 저는 배가 안 고픈,”

“14시간이나 잤는걸요. 안 고플 리가 없죠. 자 어서요.”

“어어? 저기. 저는.”

엠마가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며 매튜를 식당으로 끌고 갔다.

자신을 이 집에 머물게 해 준 엠마를 거절할 수 없던 매튜가 질질질 끌려갔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외국인에게서 익숙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굶는 꼴을 못 보는 건 동서양을 막론한 할머니들의 특징인가?’

자식들도 다 커서 적적한 한때를 보내던 엠마에게는 우리를 돌보는 게 꽤 즐거운 일인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먹이고 우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헨리 선생님도 요즘 엠마의 얼굴을 보기 좋다고 했으니 잘된 일이겠지.

“엠마 쿠키 좋아.”

“누나가 열심히 배워 가서 집에 돌아가서도 만들어 줄게.”

“응!”

엠마한테서 레시피를 받긴 했는데 베이킹마스터인 엠마의 솜씨를 따라 하려면 아직 조금 더 연습해야 할 것 같다.

“누나는 아침에 매튜가 만든 곡 봤지?”

“아니. 매튜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재우느라 못 봤어.”

“어떤 곡일까. 이번에는 꽤 열심히 만드는 거 같던데.”

“나도 몰라. 들어보면 알겠지.”

“매튜가 만든 곡 전부 다 좋았는데.”

“그랬지. 지한이 너랑 같이 부르니까 더 좋더라.”

“히힛. 나도 누나랑 앨범 내고 싶어.”

“매튜가 만든 곡으로 앨범 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일단 영훈 오빠랑 매튜한테 물어보자.”

“곡 주면 좋겠다.”

“빌보드 작곡가니까 곡 엄청 비싸겠지?”

“비쌀까?”

“아마도.”

“그렇구나.”

지연의 데뷔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한이도 작곡가와 프로듀서 가수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작곡가에게 곡을 받으려면 제값을 치러야지.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 줄게!”

“얼씨구. 네가?”

“나도 돈 많아. 영훈이 형이 나 광고 찍어서 돈 많다고 했어.”

지한이의 통장에는 출연료와 광고비가 꼬박꼬박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아이이기에 그렇게 큰돈을 집 사는 것 외에는 전부 은행에 묻어두고 있었다.

‘흐음.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재테크를 맡겨도 되겠는데. 부동산이나 주식에도 좀 투자해 볼까?’

미래에서 온 어드밴티지는 이럴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누나?”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네.”

“아무튼 나 돈 많아. 누나 곡 사줄 수 있어.”

“그래그래. 마음은 알겠지만 넣어둘까?”

“왜?”

“아마 회사에서 비용처리 할 거야.”

“그런 거야?”

“그래. 그러니까 우리 지한이 돈은 다른 데 쓰자.”

“알았어. 그래도 필요한 데 있으면 꼭 말해! 알았지?”

“알았다. 알았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생의 돈을 내가 함부로 쓰지 않을 거다.

지한이가 번 돈은 지한이가 써야 하는 거니까.

돌아오기 전에는 알바한 돈을 전부 이미란에게 빼앗겨서 자신을 위해서 옷 한 벌 마음 편하게 못 산 동생이다.

이번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데 그 돈을 썼으면 좋겠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동생의 마음이 기특해서 지연이 지한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누나 왜 그래?”

“아니. 그냥.”

누나에게 볼을 넘겨준 지한이 의아하게 지연을 바라봤지만 곧 뭐가 됐든 누나의 손길을 받는 것이 기분 좋다고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 * *

엠마의 돌봄을 받은 매튜가 남산만한 배를 가지고 돌아왔다.

식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화하기 힘들어 보이는 매튜를 소파에 앉혔다.

“후욱.”

“매튜 괜찮아요? 소화제 필요해요?”

“아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아니, 필요해 보이는데?

지연이 불룩한 매튜의 배를 찔러봐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네에네에.”

“새로 만든 곡 들어볼래?”

“좋아요.”

“매튜, 얼른요! 빨리 듣고 싶어요.”

“그래.”

매튜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노트북을 켰다.

끄기 전에 몇 번이나 확인한 곡이 폴더에 잘 자리하고 있었다.

기타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반주가 시작되었다.

단조롭게 이어지던 곡이 서서히 고조되더니 기타 소리 위에 드럼 소리가 얹어졌다.

드럼 소리와 함께 곡의 분위기가 반전했다.

허무한 듯 힘없이 시작된 것과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곡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곡을 듣자 눈앞에 영화가 한 편 재생되는 것처럼 이미지가 떠올랐다.

멜로디가 끝나자 지연이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좋다!”

“너무 좋아!”

아이들의 반응에 매튜가 코를 쓱 만지며 기쁜 마음을 자제했다.

지금 자제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품에 안고 뽀뽀를 갈길 것 같았다.

그러면 아마 그 무시무시한 경호원들한테 쫓겨나겠지.

“너희들이 좋아한다니 다행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 곡 지연이 네 앨범에 써줄래?”

매튜의 제안에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지연이 진지한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빌보드 작곡가가 앨범작업에 참여했다고 하면 반응이 상당할 거야. 요즘 회사에서 곡작업도 미뤄지고 있었는데 능력 좋은 프로듀서가 합류하면 좋을 일이지.’

하지만 그 전에

노래가 너무 좋았다.

일주일간 작업했던 그 어떤 곡보다 지연의 마음에 콕 들어와 박혔다.

“이 곡 제목이 뭐예요?”

“아직 생각해 둔 건 없는데 나 혼자서는 ‘Dear’로 지어놨어.”

매튜의 입에서 이번 갤러리에 전시했던 자신의 그림 제목이 나오자 지연이 눈을 크게 떴다.

아이의 반응을 보고 뿌듯한 마음이 든 매튜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네 그림을 보고 떠오른 영감으로 만든 곡이거든. 그래서 ‘Dear’야. 원한다면 다른 제목으로 바꿔도 좋아.”

“아니요. 좋아요.”

“나도 찬성!”

지연이 자신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지한이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내가 동생을 보고 떠오른 영감으로 그린 그림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줘서 나에게 돌아오다니.

세상일이라는 게 정말 모를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주제 좋더라. 역시 노래를 사랑에 관해서 써야 제맛이지. 갤러리에 다녀오길 잘했어.”

“그쵸? 헨리 선생님이 엄청 생각했대요.”

“지연이 그림에서 그게 좋았어. 네 덕분에 내 세상이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었다는 거.”

“아. 그거요? 저도 그거 표현하려고 엄청 연습했어요.”

“음음. 과연 그렇게 열심히 해서 그런 대작을 그릴 수 있었구만.”

“지한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누나 그림 좋아. ‘사랑하는 내 동생’도 좋아.”

“그건 뭐야?”

“누나가 그려준 그림이에요. 다음에 한국에 놀러오면 보여줄게요.”

“한국이라.”

매튜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말리지 않으면 우리가 한국 갈 때 따라올 거 같은데.

매튜의 급발진을 막으려면 에릭이라는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너희들 언제 한국 갈 거니?”

“11월 1일이요!”

말리기 전에 지한이 먼저 말해버렸다.

“흠. 할로윈 다음 날이네.”

“엠마가 할로윈 축제 재밌대요. 놀고 가래요.”

“한국에서는 할로윈 축제 같은 거 없어?”

“놀이동산이나 이태원이라면 있을 거 같지만 글쎄요.”

2010년대부터는 할로윈이라고 그날 컨셉에 맞춰 노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 전에는 잘 모르겠는걸?

지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엠마가 간식으로 구운 쿠키를 가지고 거실로 나오며 말했다.

“미국까지 왔는데 할로윈 축제를 즐기고 가야 하지 않겠어?”

할로윈까지 이제 얼마나 남았더라?

2주 정도 남았나?

“그런데 할로윈에는 왜 유령 분장을 하는 거야?”

“글쎄? 매튜는 알아요?”

“어, 어? 나도 잘 모르는데.”

아이들이 실망한 눈으로 매튜를 바라봤다.

움칠한 매튜가 쩔쩔매고 있을 때 엠마가 그를 구해줬다.

“할로윈이라는 건 원래 켈트족의 문화였단다.”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엠마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죽음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죽은 이의 혼을 달래주었다고 해. 악령을 쫓아내기도 했는데 그러면 악령이 화를 냈겠지? 그걸 피하기 위해서 같은 유령인 척을 한 것에서 시작된 거야.”

“그렇구나.”

“엠마 대단해요. 어떻게 그걸 다 알아요?”

“후훗.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엠마가 어떻게 알았는지까지는 궁금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할로윈에 악령과 악마들이 올라온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그렇게 기괴한 분장을 하게 된 거구나.

“지연의 나라는 어때? 할로윈과 비슷한 날이 있니?”

“한국에도 동지라는 절기가 있는데요. 그날에는 팥죽을 먹어요. 팥죽을 먹는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역병이나 귀신을 막기 위해서 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어머나. 세상에. 그런데 왜 팥이니?”

“잘은 모르겠지만 역신이 팥을 싫어한대요.”

“역신?”

“악마 같은 거예요. 그치 누나?”

“응. 맞아.”

갑자기 분위기가 동서양의 호러문화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호러에는 약하지만

여러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서양에 리퍼가 죽은 자를 수확하러 다닌다고 하잖아요? 한국에도 있어요. 죽은 자를 데려가는 사람.”

“사람이야?”

“아. 사람이 아니야. 귀신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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