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죄요?”
-그냥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
“나도 팬이 있지만 가끔 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별명을 짓는 일이며 앨범을 보고 분석하는 것이며.
아무런 생각 없이 찍었던 뮤직 비디오 장면을 보고 의미를 부여해서 어라? 싶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의견을 낸 팬의 아이디어는 채용되어 다음 앨범에 반영하기로 했다.
-아무튼 오늘부터 전시 시작하는 거지?
“그럴 거예요.”
-나도 보러 갈게!
“뉴욕에서요? 너무 멀지 않아요?”
-비행기 한 번 타면 되는걸!
전시회 보겠다고 비행기를 타다니.
역시 아메리카 클래스!
어마어마하구나.
“그럼 언제 올 거예요? 마중 갈까요?”
-일이 있어서 바로 가진 못해. 아아! 정말이지! 지연의 전시를 보러 가야하는데 왜 이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거야!
“에밀리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렇죠.”
-다음부터는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게 사람들을 쪼여야겠어.
에밀리의 훈련에 희생될 이들을 생각하며 묵념.
-아무튼 지연의 전시 꼭 갈 거니까! 이번 그림도 내 거야!
“굳이 안 사도 되는데.”
-그럴 수 없지! 반드시 살 거야. 제시카한테도, 주민한테도 절대 안 져!
지지 않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에밀리의 목소리를 들은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한결같다니까.
“누나. 나도 에밀리랑 통화.”
“아. 그렇지. 미안. 바꿔줄게. 에밀리. 지한이가 통화하고 싶대요.”
-지한? 좋지! 나도 한 보고 싶어.
“여보세요? 에밀리?”
-하아아아안!
수화기를 뚫고 나오는 목소리에 지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 * *
“여기가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다.”
“우와아.”
“와아! 여기에 누나 그림이 있는 거구나.”
헨리와 함께 갤러리에 입장한 아이들이 감탄했다.
“이거 꽤 괜찮은데요?”
“갤러리 전시라는 게 원래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거 아니었어? 이건 너무 좋은데?”
뒤따라오던 영훈과 미나도 놀라며 말했다.
말은 없었지만 형석 아저씨와 지은 언니도 조금 색다른 갤러리 분위기에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갤러리는 ‘사랑’이라는 테마에 맞게 아주 부드럽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조용하기만 했던 다른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방해는 되지 않지만 분위기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멜로디에 지연이 신기하게 갤러리를 구경했다.
“신기하니?”
“네. 전시회가 이런 분위기로 진행되는 건 줄 몰랐어요.”
“원래는 이렇지 않단다. 이번 전시는 신인들이 모이기도 했고, 어린 학생들이 많이 참가했단다. 여기 갤러리 직원분과 함께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은 전시회를 열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단다.”
헨리와 직원분의 노력이 있어서일까.
갤러리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라 작품을 보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연인도 보였고, 그림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는 아이를 애정 담긴 눈빛으로 지켜보는 부모도 보였다.
“좋다. 이런 전시회라면 누구라도 편하게 구경하러 올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생각해서 준비했단다.”
“헨리 선생님 멋져요! 사람들이 누나 그림 많이 보러 올 거 같아요.”
“그래.”
“선생님 빨리 누나 그림부터 보러 가면 안 돼요?”
“그것도 좋지.”
지한이 헨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너는 이미 내가 완성한 그림을 봤잖아.
동생을 보고 지연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 뒤를 미나와 영훈, 형석과 지은이 졸졸졸 뒤따랐다.
작은 기차행렬이 사라지고
갤러리 입구를 한 사람이 통과했다.
“에릭 이 자식은 또 왜 이런 데 가라고 해서는.”
작업실에서 살던 자신을 끄집어내서 가끔은 바람도 좀 쐬고 오라는 친구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까지 온 매튜가 제 손에 들린 티켓을 쳐다봤다.
‘시카고에는 유명한 미술관이랑 갤러리도 많으니까 꼭 들러봐. 예술가에게 중요한 건 영감이잖아?’
시카고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해 주던 친구의 말에 아무 갤러리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았다.
팸플릿을 든 매튜가 걸음을 옮겼다.
97. 뜻밖의 재회(2)
“음악과 함께하는 미술인가.”
매튜는 전시장에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들으면서 작품을 감상했다.
이번 전시는 신인 작가들이 사랑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라는데 그래서인지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개성 있게 표현해 놨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엄마의 사랑을 표현한 그림과 사랑이란 가면 아래 숨겨진 잔인한 얼굴 등 꽤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무릇 사랑이란 오래된 노래 소재였지.”
그리고 이 전시회에 참가한 작가들은 전부 연령대가 어렸다.
신인이기도 했고, 학생들 작품 위주로 기획된 것 때문인 듯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전시를 보자 매튜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흐흐흥. 흥.”
“그거 아닌데.”
매튜의 귀로 미성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겪어봤던 일에 매튜가 화들짝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옆에서 소녀와 소년이 누군가를 보고 속닥거렸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게 그려서 그래.”
“그런 거야?”
“누나는 저 해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 그림을 보고 사랑은 나쁜 거라고 말하는 건 너무해.”
“그만큼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은 위험하다고 하는 거야.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는 것만큼 나쁜 사랑은 없거든.”
“사랑이라는 건 어려운 거구나.”
“지한이도 크면 더 다양한 사랑을 보지 않을까? 물론 누나는 지한이가 좋은 사랑만 받았으면 좋겠지만.”
“누나가 주는 것처럼?”
“그렇지.”
보기 드문 사이좋은 남매였다.
매튜에게는 그 남매가 다른 사람들보다 사이가 좋다는 것보다 얼굴이 더 눈에 들어왔다.
하얀 눈이 가득 쌓여있던 곳.
그곳에서 만난 어린 뮤즈들.
그때도 범상치 않은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기억 속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 나의 뮤즈!’
매튜가 얼굴을 활짝 피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저기도 가 보자.”
“나는 누나 그림 더 보고 싶은데.”
“누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도 보고 싶어.”
“알았어.”
소년이 잠시 볼을 부풀렸지만 이내 누나의 의견을 따라주었다.
기특하다는 듯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누나가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어어. 저기 얘들아.”
다른 곳과 달리 복작복작한 갤러리라 매튜가 인파에 밀려 아이들과 떨어졌다.
눈높이보다 낮은 곳에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쫓으며 매튜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매튜의 손이 아이들에게 뻗어졌다.
* * *
“잠깐!”
발자국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누군가가 지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할 때, 지은이 다가오는 이의 앞을 막아섰다.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손목을 붙잡힌 매튜가 웬 여성을 돌아봤다.
남매에게 접근하던 사람을 저지한 지은이 매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저 애들을 아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했던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만.”
지은이 이 사람을 아냐는 듯이 아이들을 돌아봤다.
당연히 매튜를 기억하지 못한 남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튜가 다급히 말했다.
“뮤즈! 가 아니라. 얘들아 나 기억하니?”
헝클어진 머리를 한 중년의 남성이 간절한 눈으로 지연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아는 외국인은 얼마 없는데 어떻게 당신을 알아?
지연이 또다시 고개를 저으려고 할 때, 남자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스키장에서 만났는데! 내 노래를 듣고 뭐라고 했잖니. 2년 전 겨울!”
스키장? 노래? 겨울?
몇 가지 키워드가 조합되자 지연의 머릿속에 남성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아!’
사장님이랑 같이 스키장 갔을 때 봤던 사람이다.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누군지 지연이 떠올린 것 같자, 매튜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드디어 만났다.
나의 뮤즈를!
“언니 놔줘요. 아는 사람이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접근은 불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죠.”
지은을 사이에 둔 매튜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수긍했다.
자신이라도 웬 낯선 사람이 아이들에게 접근하면 보호자로서 강력하게 저지할 것이었다.
특히나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외부인을 경계할 만했다.
“안녕 얘들아? 그때 그렇게 사라져버려서 나는 환상이나 신기루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꿈에서라도 그리던 뮤즈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신기하구나.”
영감을 받아오라며 전시회에 꼭 다녀오라던 오래된 친구가 떠올랐다.
그때 스키장도 에릭이 기분전환 겸 다녀오라고 했었지.
내 친구가 메신저였구나.
돌아가면 피자라도 사 줘야겠어.
“그런데 왜 우릴 뮤즈라고 불러요?”
“너희들 덕분에 막혔던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거든. 그때 불러준 멜로디 덕분에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었어. 고마워.”
“곡이요? 아저씨 작곡가예요?”
“그래.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이래 봬도 잘나가는 작곡가란다.”
매튜가 아이들 앞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암. 잘나가고말고.
빌보드 차트인 한 작곡가면 잘나가는 거 아니겠어?
내 곡을 받기 위해서 유명한 가수들이 줄 서서 기다리기도 하지.
“오. 대단하네요.”
“아저씨 작곡가예요? 그런데 그때는 왜 노래 못 불렀어요?”
“윽.”
아이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매튜는 심장에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노래를 못 부른 게 아니라 그때는 곡이 막혀서 그랬던 거야.”
“그럼 이제는 잘 불러요?”
“그래. 한번 들어볼래?”
“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대화하기 편한 곳으로 가실까요?”
“좋아요. 언니. 헨리 선생님이랑 영훈 오빠랑 미나 언니한테 말해줘요.”
“알겠습니다. 다만 선배님이 곧 돌아오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은이 지한의 부탁에 꽃다발을 사러 간 형석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연이 매튜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지연이에요. 여긴 제 동생 지한이.”
“안녕하세요.”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지연이 손을 내밀었다.
누나의 행동에 지한이 역시 손을 내밀었다.
“매튜. 매튜 스튜어트.”
매튜가 작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 * *
전시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던 헨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근처 카페로 향했다.
매튜와 아이들+보호자들이 기묘한 대치를 이루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서 매튜….”
“매튜 스튜어트.”
“네. 매튜 스튜어트 씨. 저희 애들을 오랫동안 찾으셨다고요?”
“네.”
도대체 왜?
그의 말마따나 스키장에서 만난 인연 때문에?
영훈이 눈앞에 앉아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는 매튜를 멀뚱히 바라봤다.
아이들 말을 들어보면 스키장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사람이라는데 왜 아이들을 뮤즈라고 부르면서 들러붙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요?”
“그때의 만남은 내 영혼을 흔들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 일로 신이 있음을 믿게 되었고, 뮤즈를 떠올릴 때마다 영감이 샘솟았죠. 제가 다시 한번 뮤즈를 영접할 기회를 준다면 그때 이 은혜를 다 갚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만나다니. 역시 신께서는 이런 만남을 안배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뭐야, 이 사람.
이상해.
아이들을 보고 광신적인 태도로 말을 하는 매튜를 보고 영훈이 물러서려는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래서 우리 애들에게 무슨 보답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오! 그것도 있지요. 지연과 지한이라고 했던가요?”
“네. 맞아요.”
“혹시 그 아이들을 가수로 키워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자신이 있다면 아이들을 최정상 가수로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흡사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하하하학!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은 아이들 보호자의 등을 내리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남매 역시 조금은 실망한 얼굴로 귓속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뭐지? 왜 이런 반응이지?
혹시 이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하긴 업계 사람들만 날 알지 일반인들은 빌보드 곡의 작곡가가 누군지 관심 없으니까.
매튜가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치고 온 형석이 영훈에게 귓속말했다.
“매튜 스튜어트. 본명이 맞습니다. 직업도 작곡가가 맞구요. 다만 특이사항이 있다면 그가 만든 곡이 지금 빌보드 10위 안에 안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보드 전에도 천재 작곡가로 유명했다더군요. 몇 년 전에 슬럼프가 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작년에 발표한 곡 이후로는 그런 소문도 싹 사라졌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꽤 거물이었잖아?
영훈이 형석이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 놀란 눈으로 매튜를 바라봤다.
집 앞에 있는 슈퍼 가는 차림으로 갤러리에 온 사람이 그런 유명한 인물이었단 말이야?
심지어 빌보드라니.
생각보다 꽤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거물이셨네요.”
“네? 아하. 저 사람이 알려준 모양이죠?”
매튜가 어느새 아이들 옆으로 가 있는 형석을 보고 말했다.
잠시 귓속말하는가 싶었더니 내 신상을 읊고 있었어?
짧은 시간에 조사해 오다니 저쪽도 꽤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저 아이들이 어딘가의 사장 아이들이기라도 하는 건가?
추측을 마친 매튜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