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내. 고 매니저! 일이 엄청 쌓였다고!”
“미나 너는 어쩐지 쌩쌩해 보인다.”
“에헷. 지한이 드라마가 끝났잖아? 큰일은 끝났단 말씀. 광고 촬영 준비도 이미 다 해 놨고. 의상도 오케이라구!”
“네가 그렇게 부지런할 리 없어.”
“이것만 하면 지한이 휴식긴데 당연히 열심히 일해야지. 자 오빠는 얼른 이거 먹고 힘내. 일하려면 잘 먹어야지, 안 그래? 휴식기에도 쉬지 못하는 매니저님.”
“너어어는.”
“이것도 드시겠습니까? 고 매니저님은 근육 좀 키우셔야겠습니다.”
“고 팀장님도 저희와 같이 아침에 뛰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영훈 씨를 훌륭한 특전, 아니. 훌륭한 몸짱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방금 특전사라고 하려던 것 아닙니까.”
군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떠오를 뻔했다.
누구를 다시 훈련시키려고!
영훈이 엉덩이를 씰룩거려 형석에게서 떨어졌다.
아무튼 저 경호원들은 방심할 수 없다니까.
시시때때로 체력을 늘려주겠다며 운동을 시키려고 하는데 나도 시간만 있다면 운동하고 싶어.
하지만 저들과 함께 했다가는 체력을 기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 같이 운동해보자고 했다가 한 달 동안 초주검이 되어 있었던 때가 떠올랐다.
다른 팀 지원도 갔어야 했는데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가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지.
“앗. 인절미 너 그거 먹으면 안 돼.”
“씁. 어허! 안 돼. 모짜 주둥이 벌리지 마. 고개에서 힘 빼. 돌진하지 마.”
영훈이 두 경호원들을 피하는 동안 인절미와 모짜가 참지 못하고 음식으로 돌진했다.
한쪽에서는 개와 고양이가 발버둥 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자신을 운동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하 개판이네.’
즐거운 축하 파티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영훈이 허허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 * *
시카고 오헤어국제공항.
한 무리의 동양인들이 13시간 가까운 비행을 마치고 땅을 밟았다.
여행객들에게 미국의 첫인상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입국심사직원 제이콥은 작은 동양인 아이를 보고 친절하게 물었다.
“미국에 온 걸 환영합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휴가요.”
“그렇군요. 잠시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주시겠습니까?”
아이가 얼굴을 가리는 것을 치우자 제이콥이 눈을 크게 떴다.
“죽음의 천사!”
“네?”
“아, 실례했습니다. 통과입니다.”
직원이 한 말에 지한이 의아해 고개를 기울였지만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더 물어보지 못하고 자리를 이동했다.
‘죽음의 천사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지한의 얼굴을 본 제이콥은 작년에 봤던 영화를 떠올렸다.
여자 친구와 함께 영화관에서 봤던 그 영화 속에서 작은 체구의 하얀 아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재앙을 이끌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우면서 소름이 돋았던지.
같이 간 여자 친구와 함께 그 역할을 연기한 배우에게 푹 빠져버렸다.
“저기.”
“아, 죄송합니다. 미국엔 무슨 일로 방문하셨죠?”
고개를 살짝 저어 지한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낸 제이콥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물었다.
소녀가 제이콥의 물음에 대답했다.
“전시(Exhibition)요.”
헨리의 초대를 받아 첫 전시를 치를 지연이 시카고 땅을 밟았다.
* * *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 그게 뭐야?”
“몰라. 심사하는 아저씨가 갑자기 나 보고 죽음의 천사라고 하던데?”
짐을 찾아서 나온 남매와 어른들이 지한이 입국심사 때 겪은 일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죽음의 천사?
내 동생이 왜 죽음의 천사인 건가.
죽음이라는 불길한 단어에 지연이 고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애런에게 연락해 봐야 하나.”
“에밀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애런한테 연락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한이 얼굴을 보고 한 말이니까 아마 문라이트나 바이러스 둘 중 하나를 보고 하는 말인 거 같은데 에밀리는 ‘Moonlight’밖에 모르잖아.”
“에밀리도 바이러스 봤다고 했는데. 나보고 엄청 소름 돋게 잘 연기했다고 했어.”
작년에 영화를 보고 사장님이 에밀리와 통화하던 것이 떠올랐다.
무려 30분 넘게 국제통화로 떠들었던 에밀리를 보고 주민이 질린다는 얼굴을 했었다.
“그것보다 교수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미나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동공이 무언가 충격적인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흔들렸다.
미나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모두가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삼국지의 장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건장한 체구의 헨리가 어색한 한국어로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환 대한민국의 아들, 딸. 오지연, 오지한 입국 영]
먼 타국의 땅에서 익숙한 문구를 본 일행들이 헨리와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도대체 어떤 문구를 참고한 걸까.
묘하게 시골의 정취가 느껴졌다.
96. 뜻밖의 재회 (1)
공항에서의 충격적인 재회 후 일행들은 헨리의 집으로 향했다.
“다들 어서 와요.”
“엠마!”
“잘 지냈어요, 엠마?”
아이들이 엠마에게 달려갔고 뒤따라오던 이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어서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어머. 뭘 이런 걸 다.”
영훈이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선물을 내밀자 엠마가 기뻐하며 받았다.
베이킹을 좋아해서 화장을 잘 안 하는 엠마를 위해서 화장품이 아닌 가방으로 선물을 고른 보람이 있었다.
“짐은 저쪽 방에 푸시면 돼요. 방 치워 놨어요.”
“오늘은 늦었으니 다들 짐 풀고 푹 쉬도록 해.”
“혹시 배고프면 냉장고에 간단한 샌드위치 만들어 놨어요. 편하게 드세요.”
“와아! 엠마 고마워요.”
“샌드위치 지금 먹어도 돼요?”
“물론이지. 그런데 그 전에 씻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아, 맞다. 엠마 저 씻고 올게요.”
“엠마 욕실은 어디 있어요?”
“알려줄게. 따라오렴.”
엠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고, 남은 이들은 짐을 풀러 방으로 들어갔다.
미나는 짐 가방 속에서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을 꺼내 엠마의 뒤를 따라갔고, 영훈은 헨리 교수에게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들었다.
시카고에 도착한 날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 날.
깊은 숙면으로 장시간 비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나온 이들이 식당으로 향했다.
“오빠. 엄청 잘 잤나 보네.”
“그러는 너야말로.”
미나와 영훈이 팅팅 부은 서로의 얼굴을 흉봤다.
“크흠. 잘 잤나 보군.”
“아, 넵. 덕분에 잘 잤습니다.”
식탁에 앉아있던 헨리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말하자 영훈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혹시 저희 경호원들 못 보셨습니까?”
“그들이라면 아침 일찍 조깅한다고 나갔다.”
그 사람들이 또…!
도대체 HJ그룹 경호팀은 어떤 이들이 들어가는 건가?
전원 운동매니아들로 이루어졌나?
그 전에 강철로 만든 거 아니야?
피곤했을 텐데 아침 일찍부터 조깅을 하러 갔다고?
영훈이 두 사람의 소식을 듣고 경악하는 사이 방에서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흐아아암.”
“안녕, 선생님. 안녕, 엠마. 안녕, 오빠. 안녕, 언니.”
비몽사몽에 눈도 채 못 뜬 동생의 손을 잡고 나온 지연이 어른들에게 인사했다.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린 지연이 곧 부재중인 경호원들을 보고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또 운동인가.’
식탁으로 다가와 동생을 먼저 의자에 앉힌 지연이 뒤이어 자리에 앉았다.
엠마가 간단하게 계란프라이와 토스트를 구워 내왔다.
“자, 아침 드세요. 모자라면 얼마든지 말하고. 어제 만들어 둔 샌드위치도 거의 그대로 있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모두 같은 포즈로 토스트를 들고 한 입 물었다.
우물우물
오랜만에 먹는 엠마의 음식이다.
음식을 삼킬수록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집밥이라는 걸까.
비록 쌀밥에 국, 김치는 아니지만 토스트만으로도 저절로 집밥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메뉴 구성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가 그렇게 느끼면 다지.
입을 오물거리며 토스트를 먹던 지연이 헨리를 보고 어제 궁금했던 질문을 상기했다.
“선생님 그런데 그 이상한 한국어는 어디서 보신 거예요?”
“이상하다고? 누군가 환영하거나 축하할 일 있으면 이렇게 쓰는 거라고 하던데.”
“누가요?”
“내 조교가.”
뭔가 열심히 알아왔을 헨리의 조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다음부터는 일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선생님 한글이 궁금한 거면 그냥 제가 알려드릴게요.”
“흠? 뭐가 잘못 됐니? 한국에서 그런 걸 만들 때, 환영이라는 말과 누구누구의 딸, 아들. 이런 말 써야 한다고 하던데.”
“그거 할머니 할아버지 동네에서 쓰는 문구예요.”
“선생님, 나 상 받았을 때 할아버지 동네에 ‘자랑스러운 이동수·박점례의 손자 오지한 아카데미상 수상’이라고 현수막 걸렸어요.”
“지금 그거랑 완전 똑같아요.”
지한의 예시에 헨리가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애들이 보기에는 무척 촌스러웠던 모양이다.
“알았다. 다음에는 더 괜찮은 말을 생각해보도록 할게.”
“선생님은 그냥 welcome만 들고 서 계서도 될 텐데.”
“맞아. 어제도 한눈에 알아봤어요.”
그 인상을 누가 몰라볼까.
오죽하면 헨리 주위에 아무도 없었겠는가.
그래서 더 눈에 띄는 것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헨리가 마중 나왔다는 사실이니까.
아! 공항하니까 생각났다.
“선생님, 엠마. 물어볼 게 있는데요. 공항에서 지한이보고 죽음의 천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왜 지한이를 죽음의 천사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런 일이 있었니?”
“지한이가 천사처럼 사랑스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히힛.”
엠마의 칭찬에 지한이가 좋아서 토스트를 먹다 말고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죽음의 천사? 그건 잘 모르겠구나. 미안해.”
“아니에요. 엠마가 미안할 필요까지야. 그냥 갑자기 동생 얼굴을 보고 직원이 말하길래 무슨 안 좋은 말인가 했어요.”
“오빠가 알아볼게.”
아이들이 엠마와 헨리와 대화하는 사이 아침 식사를 끝낸 영훈이 말했다.
식기를 싱크대에 넣고 밖으로 나간 영훈이 식당을 나섰다.
아마 애런한테 전화하려는 게 아닐까?
이렇게 이른 시각에 전화를 해도 될런지.
“너희들 계란프라이 더 먹을래?”
“네! 네! 저 더 먹을래요.”
“저도 더 주세요, 엠마.”
“그래.”
“저기. 저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미나가 쑥스럽게 말하자 엠마가 웃으면서 일어났다.
음. 역시 계란은 2개 정도 먹어줘야 제맛이지.
엠마가 만들어 준 아침이 정말 꿀맛이었다.
* * *
통통한 배를 두드린 아이들이 거실 소파에 늘어졌다.
흐어어.
좋구나.
여기가 천국이네.
햇빛에 늘어진 고양이들처럼 아이들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자 영훈이 다가왔다.
“오빠 통화 다 끝났어?”
“아아. 생각해보니 애런이 있는 곳은 아직 새벽이겠더라고.”
애런의 에이전시는 LA에 있으니까 시카고보다 시간이 늦었다.
거긴 이제 막 해 떴으려나?
가을에 접어들어 해가 짧아졌기에 아직 어두컴컴한 시간일지도 몰랐다.
띠리리리리-
“누구지? 애런인가?”
영훈이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고영훈입니다. 아! 에밀리씨!”
에밀리?
영훈의 말에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영훈의 통화에 집중했다.
“애들이요? 네. 옆에 있어요. 바꿔 드릴까요?”
에밀리랑 통화?
나야 좋지!
물어볼 것도 있었는데 잘 됐다.
“자. 에밀리야.”
“여보세요? 에밀리?”
-안녕! 너희들 지금 미국이라면서?
“어떻게 알았어요?”
-제시카가 너희 지금 미국에 있다고 잘 부탁한다고 했어.
한국에서 자신들을 챙겨주려고 한 아영을 떠올린 지연이 나중에 돌아가면 아영에게 감사 인사를 꼭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중에 제시카 이모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그래주면 좋아할걸?
수화기 너머로 에밀리가 깔깔 웃었다.
이 아줌마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하네.
“마침 잘됐다. 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에밀리 혹시 죽음의 천사가 뭔지 알아요?”
-죽음의 천사? 아항. 지한이 말이구나?
아는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공항에서 누가 지한이보고 죽음의 천사라고 했는데 좋은 뜻이에요?”
-후후훗. 그 사람도 바이러스를 봤나 보네.
“바이러스? 백신 말하는 거예요? 백신이 왜 죽음의 천사예요?”
바이러스에서 지한이 맡았던 배역의 이름인 백신(V)
에밀리의 말을 들어보면 백신과 관련된 별명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순수한 영혼을 지닌 미술천재였던 리온과
인간의 욕망에 희생되어 단죄의 길을 걸었던 V(백신)을 보고 V의 팬인 사람들이 지은 별명
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