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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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들어본 적 없는 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실에 진명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아주 그냥 죽일 듯이 노려보더군요. 오죽하면 아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겠습니까.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저희 배우님이 말리자 손을 들더군요. 평소에도 사모님이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손을 올리셨나요?”

“그건….”

잘 모르겠다.

집안일은 아내의 몫이었으니까.

한성이에게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이 학원이 한성이에게 도움이 될 거다.

아이가 촬영장에서 칭찬을 받았다.

전부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 모든 말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제가 한성이의 어머님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무슨! 사람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네. 저희 배우님이 촬영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게 저희 일이니까요. 그리고 한성이의 어머님은 그 불편한 사항이었구요.”

“….”

“무명 배우셨다죠?”

“…그렇습니다.”

“연예계에 미련이 남아서 자신의 아이의 연예계 진출을 노리는 부모도 꽤 있습니다.”

영훈의 말이 진명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오디션에 들어갈 때마다 내정자가 있었다느니 자신의 배역을 가로챈 낙하산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연예계가 보이는 것과 다르게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란 것을 알았다.

“아마 사모님께서는 무명으로 남았던 억울함 때문에 아이를 통해 그것을 풀려고 하시는 거겠죠.”

부인할 수 없었다.

진명이 침묵하자 영훈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충분히 후회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부모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아이와 더 자세히 대화해보죠. 그리고 아내는….”

진명이 목이 막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아내를 말리겠습니다.”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한성이가 배우를 계속하고 싶다고 하면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영훈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진명에게 내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 배우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말이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가…너무 무심했나 봅니다.”

“일이 있으시니까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일주일에 딱 하루만이라도 아이를 위해 써 보시죠. 일이 끝나면 챙겨야지라고 생각했다가는 평생 아이와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렇겠군요. 일을 하는 것도 전부 아이를 위한 거였는데 말이죠.”

진명이 씁쓸하게 말했다.

위기를 넘기고 어느 순간부터 회사를 키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가정을 등한시했다.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긴 자신이 과연 아빠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아내가 저렇게 된 것도 자신이 밖으로 나돌았던 탓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대화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던 영훈이 진명을 힐끔 보고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잘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듣고 싶던 말을 해 줘서.

진명이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찰칵

“후우.”

오늘도 밤늦게까지 아역배우를 키우는 엄마들과 매니지먼트 사람들을 만나고 온 세란의 숨결에 술기운이 묻어나왔다.

비틀거리며 구두를 벗고 걸어간 세란이 벽을 짚고 부엌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여보.”

“당신? 안 자고 뭐해?”

거실 불을 꺼 놓고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을 본 세란이 의아하게 물었다.

“당신이랑 대화하려고 기다렸어.”

“나랑? 며칠 전처럼 또 화내려거든 하지마. 나 피곤해.”

기다렸다는 진명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들어간 세란이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몇 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세란이 컵을 싱크대에 넣고 돌아섰다.

“아, 깜짝이야!”

“오늘은 피곤해도 꼭 얘기해야겠어. 한성이 일이야.”

“뭐?”

진명이 세란을 의자에 앉혔다.

뭔가 심상찮은 남편의 반응에 세란이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 이제 한성이 오디션 알아본다고 밤늦게 돌아다니는 거 하지마.”

“무슨! 한성이 일이야.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당신 말고 도와줄 사람 구했어.”

“하! 누가! 한성이는 내 아들이야.”

“그리고 내 아들이기도 하지. 당신보다 훨씬 더 전문가인 사람으로 구했어.”

“난 반대야.”

전문가라는 말에도 한성이를 품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는 세란을 보며 진명은 몇 시간 전, 영훈이라는 매니저에게서 들은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를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세란은 너무 제멋대로였다.

그들이 가고 아이와 단 둘이 남은 진명은 한성이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어색해하던 아이가 서서히 자신의 속사정을 풀어놓는데 진명은 자신이 정말 무심한 아빠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서 이제 자신이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당신. 정말 한성이를 생각하는 거긴 해?”

“당연하잖아. 나는 한성이 엄마라고!”

“엄마라는 사람이 애를 두고 이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녀!?”

진명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세란이 몸을 움찔했다.

“한성이한테 들었어. 그리고 그동안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들었어. 당신. 정말 한성이를 위해서 하는 거 맞아? 한성이를 이용해 당신의 욕망을 풀려고 하던 게 아니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뭐! 내 욕망이 뭔데!”

“배우로 성공하는 거! 잘나가는 배우가 되는 거! 그거잖아. 아니야?”

남편의 말에 세란이 울컥했지만 뭐라고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혀 있는 것이 그게 맞았음으로.

하지만 내가 한성이를 이용해 내 욕망을 이루려고 했다고?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일깨우자 세란이 주춤했다.

“당신이 무명으로 있었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아. 내가 신경 쓰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그거 때문에 우리 아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아줘.”

“괴로워한다고? 한성이가?”

“제발 세란아. 오늘 한성이가 도와달라고 오지한을 불렀어. 우리 말고 어린 동생을 불렀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남편의 말에 세란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내가 도와줄게. 나도 이제 한성이를 돌볼게. 가정에 신경 쓰겠어.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려.”

“…내가. 잘못했어? 나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알아. 당신이 한성이 많이 사랑하는 거.”

“여보. 나는.”

“미안하다. 세란아. 내가 너무 무심했어.”

세란이 충격 받은 얼굴로 입만 벙긋했다.

아내의 모습에 진명이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러지 않고서는 세란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한성이. 우리 한성이.”

세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괜찮아. 한성이가 엄마를 이해한대.”

“흑.”

남편의 말에 세란이 무너져 내려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정말 한성이가 잘 됐으면 해서.

나는.

내가 정말 한성이가 내 꿈을 이뤄주길 바랐던 건가?

한성이가 처음 학교에서 연극했을 때 너무 잘해서.

날 닮아서 연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서 전력으로 밀어주려고 했던 건데.

“괜찮아.”

“한성아아아.”

진명이 아내를 품에 안아줬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연약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같이 힘내자. 나도 이제 함께할게.”

내일도 아침 일찍 회의가 잡혀있지만 진명은 아내를 품에 안고 달랬다.

영훈의 말처럼 일만 하다가 가족을 잃을 뻔했다.

진명이 세란의 등을 토닥이며 자신을 똑바로 보고 말하던 영훈을 떠올렸다.

‘만약 한성이가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면 그런 매니저가 옆에 있으면 좋겠네.’

95. 화가 오지연

“…그래서 엄마가 요즘 상담을 받고 있어.”

한성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늘이 사라진 얼굴을 보니 확실히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다행이네.’

그래도 그 아줌마가 한성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실했던 모양이다.

한성의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서 일주일에 하루 이상 시간을 내게 되었고

한성의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돌아오기 전 자신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한성과 자신이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그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다는 것.

한때 이미란을 바꾸기 위해서 상담치료를 권하기도 했고 진지하게 대화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격렬한 거부 반응으로 끝났던 자신의 예전 상황이 떠올랐다.

조금은 부러울지도.

한성이의 부모는 그래도 반성할 줄 아는 사람들인 것 같으니.

“지한아. 그리고 선배님.”

얘기를 하던 한성이 진지한 얼굴로 둘을 불렀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이 한성이를 주목했다.

“고마워요. 이 말 꼭 하고 싶었어요.”

그 말을 하는 한성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괴로운 속박을 끊어낸 아이가 자신의 은인을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건넸다.

“아니야. 먼저 도와달라고 용기를 낸 건 한성이 너였는걸.”

“맞아, 형. 그리고 우리는 그날 가서 아무것도 안 했는걸? 영훈이 형이 형네 아빠랑 대화한 게 다야.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라 영훈이 형한테 고마워하면 돼.”

“그 사람이 우리 아빠를 설득시킨 건 다 지한이랑 선배님 때문이잖아. 두 사람이 없었으면 아마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건.”

“그냥.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계속 고마워할 거예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한성의 눈빛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선배님에게 전화하기로 한 건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아빠가 연기 계속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래요. 선배님이랑 같은 소속사에서 일하게 해 줄 거라고 했어요!”

“우리랑 같이?”

“영훈 오빠가 명함 주고 왔다고 하긴 했는데. 그럼 우리랑 같은 팀이 되는 건가?”

“형이랑 우리랑 같은 팀이야? 영훈이 형은 맨날 우리만 봐도 힘들어 죽겠다고 말했잖아.”

“팀장인데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좀 그렇지 않아?”

“형이 우리 가성비 좋다고 했잖아.”

“지한아 다른 데 가서는 가성비라는 말 하지 말자. 영훈 오빠가 들으면 또 울 거야.”

“알았어.”

“어쨌든 현재 영훈 오빠 팀 소속으로서 한성이의 합류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겠습니다. 같은 팀이 되는 데 찬성하는 사람은 손!”

지연이 손을 들었다.

지한이 잠시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같은 대원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나 누나보다는 한성이 형이 들어오는 게 더 좋아.”

영훈 오빠는 아역배우 전담 팀장이 아니다만.

하지만 부쩍 돌봄스킬이 는 것 같은 영훈 오빠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다른 매니저들에 대해서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영훈 오빠만큼 이득을 떠나서 우리를 존중해주는 매니저는 못 봤으니까.

“찬성 2표로 한성이의 팀 합류가 통과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어서 와, 형.”

“아. 저기. 음. 고마워. 그런데 지금 바로 들어갈 건 아닌데.”

한성의 말에 남매가 입을 벌리고 벙찐 표정을 했다.

지금 들어오는 거 아니야?

“연기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내가 진짜 연기를 하고 싶은지는 아직 잘 몰라서. 아빠한테도 생각해 본다고 했어.”

“…형 미워.”

“!?”

진지하게 고민하고 상의해서 투표했건만 저쪽에서는 아직 마음이 없다니.

김칫국을 들이켠 거 같아서 지한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조금 삐진 지한을 보고 한성이 당황해 허둥지둥했지만 지연을 잠자코 둘을 지켜봤다.

‘뭐.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지.’

한성이 꼭 배우가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배우가 아니어도 친구는 될 수 있으니까.

안절부절못하며 지한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한성이를 보면서 지연이 작게 웃었다.

* * *

지한이의 드라마가 성황리에 끝났다.

막판 스퍼트를 한 드라마가 결국 시청률 30.7%로 마감했다.

방송국에서 지한이의 차기작을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 작품 끝나고 바로 다음 작품을 들어가다니.

좋은 작품을 놓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면 모를까 동생에게 그렇게 빽빽한 일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시청률 30% 축하합니다!”

“축하해! 최근에는 30% 넘기기 힘든데 결국 넘겼구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아왕왕!

먕.

어제도 들었던 말이지만 아침부터 폭죽을 터트리고 케이크를 들고 온 영훈과 미나, 형석, 지은을 보니 또 기쁜 마음이 샘솟았다.

거실 테이블에 먹을 것이 가득했다.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오붓이 축하 파티를 즐기는 이 시간이 좋았다.

마지막화를 방송하던 어제는 방송국 관계자들이랑 같이 일한 스태프들, 그리고 주역인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종방 파티를 했었다.

딴 마음을 품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 때문에 즐겁게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조금은 불편했다.

주역인 아이들은 아직 어려 1차만 즐기고 나왔지만 영훈은 주연인 지한이를 대신해서 자리를 지켰다.

“다들 고마워요! 영훈이 형은 어제 술 많이 마셨을 텐데도 일찍 일어나 축하해 줘서 고마워.”

“흐흐. 내가 이 자리에 빠질 수 없지.”

“말도 마. 아침부터 북엇국 한 사발 드셨단다.”

자정이 넘어서 끝난 술자리에 참석하고 오느라 영훈의 얼굴이 조금 퀭했다.

“오빠 괜찮아?”

“괜찮다. 안 괜찮을 수 없지. 당장 오늘 너희들 광고 챙겨야 하는데.”

“정확하게는 지한이 광고겠지?”

내가 데뷔했다고 광고업계에서 지한이랑 나를 1+1으로 써 먹으려고 하는 거 같은데

거기에 맞춰줄 생각은 없다.

어디 광고비를 후려치려고!

내가 지한이 누나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이미지로 남아있을 생각은 없다.

지한이랑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빛나고 싶은 거지 누군가를 등에 업고 빛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자신의 등골을 빨아먹었던 이미란 같은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광고를 몰아서 찍을 수 있도록 일정을 짜 봤어.”

“우리 미국 가는 건 다음 주지?”

“그렇지.”

“나 전시하는 건 처음이야.”

“나도 내가 맡은 연예인이 전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미국에서.”

“에이. 영훈 오빠도 참. 왜 그렇게 말해. 그냥 축하하자고! 지연이의 멋진 화가 데뷔를!”

“싫다는 말이 아니잖아. 그냥 좀 너무 대단해서 놀란 것뿐이야.”

남들은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이 아이들은 너무 쉽게 척척 해낸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어리기만 한 아이들이 해냈다고 보기에는 커다란 성과에 영훈이 기가 죽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지쳐 보이는 영훈의 등을 미나가 팡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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