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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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석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누나 밥부터 먹자.”

지한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지연을 식탁으로 이끌었다.

뭔가 심통난 거 같은 동생이 지연을 의자에 앉히고 손에 숟가락을 쥐어 줬다.

“이거, 이거, 이거.”

“너무 많이 주면 한입에 못 먹어.”

“앗. 안 되지.”

지한이 숟가락 위에 올렸던 반찬을 다시 내렸다.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을 알기에 지연이 웃으면서 입을 쩌억 벌렸다.

“냠.”

“이거랑 이거.”

“냠!”

옆에 앉아서 누나의 식사를 챙기는 지한을 보고 영훈과 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저 애들은.”

“포기해 오빠.”

“저는 짐 갖다놓고 오겠습니다.”

“아, 수고하세요.”

형석이 짐을 들고 사라졌다.

* * *

끼니를 걸러 화가 난 동생에게 식사를 당한 지연이 작업실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누나가 옆에 없어서 기운이 없던 지한도 지연의 뒤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작업실 한가운데에 놓인 캔버스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우와.”

캔버스에 빛이 모여 있었다.

“누나 이거 뭐야? 응? 응?”

“이번에 새로 그린 그림.”

“저기 한가득 있는 거랑 다른 거야?”

“음. 저건 연습작이고 이게 전시할 거?”

“멋져! 누나 대단해!”

지한이 캔버스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위로 빛이 모여 있었다.

“멋지다. 멋져!”

“지한아 아까부터 멋지다만 하고 있는데.”

“하지만 진짜 멋져.”

지연이 미완성인 그림을 보았다.

무채색이던 길 한 가운데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건지 걸어오는 중인지 모를 자세로 서 있는 소녀와

그 소녀를 기점으로 무채색과 유채색으로 나뉘어져 있는 길

아직 지연의 머릿속에서 전부 끄집어 내지 못했지만 지금도 충분히 그림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누나 이거 이름이 뭐야?”

지한의 물음에 지연이 곰곰이 생각했다.

이 그림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의 마음을 담아서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해 준 사람이 있었다.

모든 변화의 시작.

내 하나뿐인 가족.

그 사람 덕분에 과거에서 벗어나 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

“누나 날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지한의 말에 지연이 볼을 붉혔다.

“그냥 로 할래.”

“앗! 왜에.”

“너무 길어.”

“왜에에에엥. 그거보다 더 긴 제목도 있잖아.”

“안 돼.”

“그럼 저 연습작 나 줘.”

사진처럼 기억에 떠오르는 동생의 얼굴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빛이 번진 것처럼 부드럽고 빛나는 그림이 누나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빛나는 그림은 누나의 애정이 그만큼 깊다는 증거였다.

“연습작인데?”

“침실에 걸어둘 거야.”

“그래.”

“그래서 누나 이 건 이름 없어?”

“<지한9>”

“9는 왜 붙었는데?”

“9번째로 그려서.”

“그럼 이건 <지한7>이야?”

“맞아.”

“내 이름 뒤에 숫자가 붙으니까 꼭 복제인간 같아.”

“그런 뜻으로 붙인 건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는데 동생이 저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내 동생이 복제?

물론 미남 유전자는 널리널리 알려야 하지만 하나뿐인 존재가 복제되어 늘어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상해.”

내 동생은 내게 유일한 존잰데.

“이름 바꾸자.”

“앗! 내가 지을래.”

“내 작품인데?”

“하지만 모델이 나잖아.”

“그렇지만 그린 건 나지.”

“내가 지을래. 짓게 해 줘.”

“….”

“오늘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은 벌이야!”

“…!”

치사하게.

지연이 부들부들 떨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그래.”

“예야!”

만세를 하듯이 팔을 높이 들고 자신이 그려진 그림을 본 지한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건 <사랑하는 내 동생>이야.”

끝끝내 수식어로 ‘사랑하는’을 붙인 지한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91. 정체가 뭐지?

삐삐삐-삑-삐삐삐-

이른 시간.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알람시계가 울렸다.

이불뭉치 속에서 팔이 스르륵 기어 나왔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귀신이라고 경악할 만한 장면이었다.

시트 위를 기어간 손이 알람시계를 찾았다.

삐삐,

알람이 꺼졌다.

이불뭉치가 꼼지락거렸다.

“끄으응.”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찡구 이불처럼 젖소무늬인 이불이 스르륵 걷히고 산발이 된 머리를 한 여인이 침대 위에서 눈을 끔뻑였다.

아침잠이 많은 그녀지만은 담당하는 연예인이 활동기이기에 그녀 역시 부지런해야 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가 불을 켰다.

“으.”

강렬한 형광등 불빛에 절로 눈이 시려왔다.

머리를 벅벅 긁은 그녀가 씻으러 들어갔다.

여름이라 이른 새벽임에도 해가 어스름한 밖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쏴아아-

잠시 후 여인이 들어간 욕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하게 씻는 건지 짧은 물소리가 끝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그녀가 욕실을 나왔다.

“하아암.”

완전히 잠을 몰아내지 않은 그녀가 하품을 했다.

작은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가 눈을 비비더니 이내 스킨로션을 가지고 와서 얼굴에 발랐다.

치덕치덕 바르는 손길이었지만 본업이 본업인지라 그녀의 손은 능숙하게 피부 위를 오갔다.

편한 옷을 골라 입은 그녀가 어젯밤 마무리하던 옷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왔냐? 밥 먹어라.”

“으응.”

미나가 식탁에 앉았다.

“어제도 늦게 잤냐?”

“뭐, 좀.”

“어휴. 아침잠도 많은 녀석이 어떻게 일어나려고 늦게 자.”

“내가 아침잠이 많은 이유는 밤잠이 없기 때문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마저 먹어라.”

“넹.”

영훈이 미나의 입에 토스트를 물려주었다.

밥보다는 빵을 더 좋아하는 미나이기에 그녀의 아침은 항상 빵과 우유 또는 커피였다.

빵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미나는 오늘 지한이가 입을 의상을 생각했다.

매니저도 그렇지만 코디의 하루 역시 일찍 시작한다.

담당 연예인이 한가하면 코디도 일이 없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담당 연예인은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대스타였다.

“오늘 지한이가 입고 갈 의상은?”

“미리 빼 놨어. 지한이 나오면 오빠가 입혀 줘.”

“내가 챙기긴 할 거지만 오늘은 지연이도 같이 갈 거라서.”

“지연이도? 그림 다 그렸대?”

“조금 말려야 한대. 그래서 오늘은 같이 촬영장 갈 거라더라.”

“그럼 올라가서 옷 챙겨와야겠네.”

“어어. 먹고 올라가, 먹고.”

당장이라도 올라가려고 하는 미나를 영훈이 말렸다.

촬영도 없는 지연의 옷을 굳이 챙길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평상복은 꽤 중요했다.

드라마의 특성 상 야외촬영이 많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지한이가 촬영할 때마다 촬영장에 찾아오는 팬들이 있었다.

요새는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까지 같이 있어서 멀리서도 지한을 찍는 팬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화기애애한 촬영장 분위기뿐만 아니라 지한이의 일거수일투족이 난리가 났는데 지한이가 입고 있는 옷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의상들은 전부가 협찬이었다.

팬들로서는 드라마 속 지한이도 좋아했지만 일상 속의 지한이도 좋아했다.

그래서 지한이가 촬영장에 올 때 입은 옷, 신발, 가방 모든 것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지한이가 집에서 입는 옷을 그저 편하게 입고 갈 생각이었지만 지연이의 말 한마디에 외출복 역시 미나가 관리하게 되었다.

‘언니, 지한이가 입고 다니는 건 모두 관심을 받을 텐데 그냥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입고 가는 건 조금 아깝지 않을까?’

생각의 전환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지한에게 수도 없이 쏟아지는 협찬 제의 속에서 고르고 골라야했던 미나는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일상복이라는 명목으로 노출시켜도 되잖아!

아이돌 공항패션이나 출퇴근 복장 등으로 연예인의 광고효과를 알고 있는 지연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2004년에 살고 있는 미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이들의 생각은 유연하구나.

아니, 지연이라서 그런 건가?

아이의 자유로운 발상이었지만 지연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이 아이들은 뭔가 달라.’

특히 지연이!

지한이의 말도 안 되는 연기실력과 외모도 대단했지만 지연 역시 대단했다.

동생이랑 같이 있을 때는 제 나이 또래의 귀엽고 예쁜 아이였지만 가끔 지연은 고민하고 있는 미나에게 놀라운 해답을 주곤 했다.

지나가듯이 한 말인데 그 답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때는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지연이가 약을 잘못 먹고 어린아이의 몸이 된 건 아닐까?’

회귀, 빙의, 환생 소설들이 유명하지 않은 시기에 미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이었다.

아이들이 쉴 때 보던 탐정 애니 속 설정을 지연이에게 대입하던 미나가 홀로 진지하게 그럴 사 하다고 생각했다.

“언니 좋은 아침.”

“어?”

2층 옷 방에서 지연의 옷을 골라 내려오던 미나는 계단 앞에서 생각하고 있던 대상을 만나 잠시 사고가 마비됐다.

내가 내려올 줄 어떻게 알고 기다린 거지!?

간파당한건가.

역시 저 아이는 몸이 어려진 어른아닐까?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들을 경계해야 해!

미나의 흔들리는 동공을 본 지연이 애 답지 않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언니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 옷 내 옷이지? 갈아입게 얼른 줘.”

“어. 어!”

지연이 미나의 손에서 옷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주고 온 미나가 거실로 오니 테이블 위에 아침을 두고 TV를 보고 있는 지한이가 보였다.

“너희 그런데 왜 이리 일찍 일어났어.”

“응? 우리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잖아.”

지한이 밥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미나가 지연이 들어간 방을 힐끔 보다가 지한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한아. 혹시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니?”

“누나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나는 그런 조직과는 연관이 없으니까.”

미나의 말에 지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누나는 가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영훈이 형이랑 티격태격 할 때는 사촌인 세은이 누나처럼 철없어 보이기도 했고, 촬영장에서 의상을 건네주거나 메이크업을 도와줄 때는 전문가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히에엑!!!!!!!”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미나가 기겁하며 일어섰다.

미나의 반응에 지켜보던 지한이와 지연이가 더 놀래 몸을 움츠렸다.

“지, 지연이 너도 참. 언제 왔어? 기척 좀 내지 그랬어.”

이 정도로 기척을 줄일 수 있다니.

역시 나쁜 조직과 싸우는 애답군.

“언니 일단 말해두겠는데. 나는 몸을 어리게 만드는 약 따윈 먹지 않았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미나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새끼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언니 나 주민번호에도 92년생으로 되어있는데.”

“서류 조작?”

“그만 쿠난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제 오랜만에 같이 봤다고 너무 빠져있는 거 아니야?”

애니메이션에 과몰입한 미나를 보고 지연이 흐린 눈을 했다.

‘어떻게 표정을 읽었지?’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언니랑 함께한 지도 벌써 5년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저 언니는 다 좋은데 가끔 가다가 저렇게 드라마나 애니에 몰입한다니까.

“미나야. 짐은 이게 다야?”

“아, 넵!”

“미리 차에 실어 놓는다.”

“그건 내가 할게.”

정신을 차린 미나가 영훈이 가리킨 짐을 들었다.

아무리 내가 다른 코디보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내 본분은 스타를 코디하는 것.

의상은 내가 책임져야 했다.

짐을 들고 차에 실으러 가는 미나를 본 영훈이 한숨을 뱉었다.

“어휴. 이렇게 해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놔둬. 미나 언니 취미 생활이잖아.”

“나는 가끔 쟤가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취미라고 생각하고 존중해줘.”

“취미도 취미 나름이지.”

영훈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이들을 돌아봤다.

“밥은 다 먹었어?”

“응!”

“이렇게 부지런해서야. 원. 매니저로서 챙기는 맛이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거 칭찬?”

“그래 칭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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