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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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지한이 너는 슬슬 촬영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앗! 그럼 나 갔다올게!”

“지한아 스톱! 화장 고쳐야지!”

미나가 달려가려는 지한을 붙잡고 지워진 메이크업을 고쳤다.

거 참 우리 애는 화장할 것도 별로 없는데.

지연이가 미나의 도움을 받고 다시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지한이 오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아이들이 활짝 웃으면서 동생을 맞이했다.

누리는 여전히 지한이를 좋아하는 거 같고

정훈이는 오늘 일찍 왔네.

훈이는 오늘도 기합이 잔뜩 들어갔고

지수는 왜 날 보는 거지?

한성이는 아, 눈 마주쳤다.

놀라기는.

지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촬영을 시작하는지 메인 PD인 충환이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정말 많이 바뀌었네.’

예전에는 PC방을 쏜다든지 간식을 쏜다든지 해야 친구를 만났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지한의 곁에는 저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충환이 물러가고 자리에 위치하자 모든 스태프들이 스탠바이 자세가 되었다.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지한이 지연의 시선을 느끼고 이쪽으로 미소를 띠워 보였다.

동생이 입을 벙긋거렸다.

‘누.나.잘.봐.’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라는 동생의 마음이 느껴졌다.

‘응. 힘.내.’

그 마음에 응답해서 지연이 대답했다.

촬영이 시작됐다.

한별의 무리와 건우의 무리가 대립하는 것이 보인다.

뜨거운 햇살과 조명 아래에서 고생하는 아이들이 대단했다.

‘저렇게 좋을까.’

더워도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연기하는 동생이 보였다.

그렇게 좋을까.

연기하는 지한이의 주위로 반짝이는 아우라가 보였다.

지금 이렇게 연기하는 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지한이는 연기가 저렇게 좋을까?”

“좋으니까 하는 거겠지?”

“그렇겠지.”

저렇게 좋아하는데 예전에는 그것도 모르고 컴퓨터 앞에만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채팅을 하던 동생이 지금의 동생 위로 겹쳐졌다.

지금은 행복하겠지?

“지한이가 연기를 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저 얼굴을 그대로 썩혔으면 대한민국 연예계의 국보급 인재를 놓칠 뻔했잖아.”

그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했다면서 영훈이 식은땀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영훈오빠는 과하다니까.

“컷-! 좋았어! 다들 클로즈 찍을 거니까 한 번 더 가자고. 바로 갈 수 있겠어?”

“넵!”

“저도 괜찮습니다!”

“저도요!”

“바로 가도 괜찮아요.”

“네!”

“저, 저도 좋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갑시다!”

현장이 바쁘게 돌아갔다.

촬영이 들어가기 직전 지한이 또 지연을 돌아봤다.

지연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방싯 웃은 지한이 다시 집중했다.

“어휴. 저 녀석은 정말 네가 없으면 어떻게 촬영했는지 모르겠다.”

“왜에?”

“너는 모르지? 지한이 저거 엄청 여우야. 네가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연기가 다르다니까?”

“지한이는 내가 없다고 해서 대충 찍지 않을 텐데.”

“그래. 열심히 하는데 네가 있을 때는 더 완벽하니까 문제지. 뭐랄까 흡입력이 남달라.”

“흡입력?”

“그래. 지금도 봐라. 아주 그냥 시선 떼지 말라고 온힘을 다하잖아.”

자신을 지켜보라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지한이 보였다.

그에 맞춰 다른 아이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더욱 치열하게 연기하는 게 보였다.

‘누.나.잘.봐.’

내가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여 주고 싶어.

누나 나 잘했어?

지한이가 하지 않았던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저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이는 자신이 변화시킨 동생이었다.

과거와 달리 자신감 있고, 최선을 다하며,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스타.

지연은 이 순간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깨달았다.

90.

지연이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촬영장에서 무엇을 보고 영감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지연이가 작업실에 들어갔단 소식에 공 사장은 호들갑을 떨었다.

“지연이가 이번에 헨리 교수의 제안으로 미국에서 전시를 한다고 하더군.”

“예. 알아봤습니다. 헨리 교수님과 뜻이 맞는 미술 관계자들이 모여서 신인작가 전시전을 연다고 하더군요.”

“헨리 교수는 이전부터 그런 활동을 해 왔었지. 그런데 이번에 지연이에게 제안했다는 건 미술계에 지연이를 데뷔시키려고 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지난번에 지연이가 그린 보고 나서 뭔가 반응이 다르긴 했습니다.”

“그래. 그건 내가 봐도 눈부셨지.”

캔버스 위에 그려진 한 쌍의 별이 아름답게 빛났다.

그려진 별이 빛나는 것처럼 찬란하게 캔버스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헨리가 지연의 미술계 데뷔를 결정했다?”

“네. 아마 이번에 신인전을 기획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애 데뷔전을 허투루 치를 수 없지. 일단 헨리 교수를 통해서 후원 문의를 넣고 지연이 작업실에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준비할 수 있게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띠리리리

“실례하지.”

주민이 휴대전화에 뜬 번호를 보고 잠시 보고를 멈췄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도련님 잘 지내셨죠?

“그럼요. 형수님도 건강하시죠?

주민의 큰 형수이자 HJ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진희가 주민의 말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 업무 중인 도련님은 정말 딱딱하다니까.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도련님께 전화를 하나요?

“일하고 있을 때 형수님이 사적인 일로 절 방해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역시 도련님이네요.

자신이 주민을 아는 만큼 주민도 자신을 잘 알았다.

업무실에서 주민의 말을 듣은 진희가 모니터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용건을 말했다.

“지연이가 이번에 새 그림 그린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절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지연이가 촬영장에 다시 노트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런 아이가 며칠 전부터 동생의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뻔하지 않겠어요?”

-지연이에게 사람을 붙이신 겁니까?

“지연이는 우리 미술계에도 중요한 사람인걸요. 그리고 엄연히 사람을 붙인 건 아니에요. 형석 씨에게 물어본 거니까.”

-하아아아.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형석을 HJ그룹 경호원에서 데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다른 사람들이 정보원으로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쩐지 아버지며 큰형이며 작은형이며 애들 동향을 잘 알고 있다 싶었더니!

“아무튼 지연이는 제가 신경 쓸 테니 형수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미술계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전데 도련님이요?

“지연이가 필요한 건 저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헨리 교수님이 지연이의 데뷔를 직접 관리하실 거예요.”

-네에. 미국에서는요. 하지만 국내는 제가 더 잘 알아요.

“형수님께서는 지연이가 미국에서 전시를 끝나고 올 때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맞아요!

드디어 형수가 전화를 한 목적을 알아낸 주민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형수가 지연을 도와준다면 수월하겠지.

생각해보니 국내에서는 아직 지연이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기획은 저한테 맡겨주시겠어요?

“그러죠.”

-대신 지연이한테 최대한 마아아안이 마아아아아아안이! 작품을 그려 달라고 해주세요.

“지연이는 지금 휴가 중이고 곧 다음 앨범을 준비할 겁니다.”

-에이. 그래도 도련님이 좀 도와주세요.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저도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정말이지 도련님도 참. 알았어요. 그러면 지금 지연이가 그린 그림만으로 만족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해요.

“하아아아.”

“수고하셨습니다.”

기가 빨린 듯 의자에 늘어진 주민을 보고 남 비서가 잔에 물을 따랐다.

남 비서가 건넨 잔을 들고 목을 축인 주민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더 보고할 사항은 없나?”

“네. 저녁에 김은희 작가님과 미팅이 있습니다.”

“후우. 알았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마저 보고사항을 들은 주민이 남 비서를 내보냈다.

오늘따라 피곤하군.

주민이 고개를 젖히다가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에서 모짜와 인절미를 각각 품에 안고 주민의 허벅지 위에 앉은 아이들이 보였다.

“…일해야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빠르게 펜을 움직이는 주민의 손놀림이 가벼웠다.

* * *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정해진 다음 자신이 할 일은 간단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을 캔버스 위에 재현하는 것.

지연은 캔버스 위에 붓을 놀리면서 동생이 말했던 ‘몽실몽실’이란 설명을 이해했다.

슥, 스윽-

제 동생은 이 감정을 몽실몽실하다고 표현하고 혹자는 종소리, 혹자는 분홍색, 붉은색 등으로 표현하곤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거였나.

재밌다.

붓을 움직이는 지연의 손이 춤추는 듯했다.

“지연아!”

“…아.”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손에 지연의 집중이 깨졌다.

모처럼 즐거웠는데 누구야.

지연이 조금 신경질적인 태도로 자신의 어깨를 짚은 사람을 쳐다봤다.

“언니!”

“지연아 방해해서 미안한데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니?”

“점심 정도는 안 먹어도 괜찮아.”

“점심이 아니야.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어?”

미나의 말에 지연이 정신을 차린 듯이 창밖을 봤다.

벌써 밖이 어두컴컴했다.

“언니 지금 몇 시야?”

“몇 시겠어? 8시다. 이미 저녁도 늦은 거라고.”

나 몇 시간 동안 그린 거지?

진짜 조금 밖에 안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웬만해서는 널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 그러다가 쓰러질까 봐 걱정돼서 와 봤어.”

“…미안.”

“뭐가.”

“방금 소리친 거.”

고개를 숙이는 지연을 보고 미나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뭐 그런 걸로 다 미안해하냐. 우리 사이에. 너도 내 방에 와서 밥 먹으라고 한 적 많잖아.”

“그거야 언니가 밥도 안 먹고 밤새도록 의상만 만들고 있으니까.”

“그래그래. 걱정돼서 그런 거지? 그거 나도 마찬가지야. 언니가 노크한 것도 못 들었지?”

“노크했어?”

“모를 줄 알았다. 하여튼 이놈의 예술하는 사람들 집중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꼬르르르르

“풉. 이제 배고픈가 보네.”

“그, 그러게.”

눈치 없이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지연이 볼을 붉혔다.

미나가 지연이 손에 쥔 붓을 내려놓게 한 다음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팔짱을 끼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간 지연은 식탁 한가득 차려진 요리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거 누가 다 먹어?”

“너랑 나?”

“지한이는? 아직 촬영 안 끝났어?”

“오늘 조금 늦는댔어. 지한이는 밖에서 저녁 먹는대.”

오늘 늦는구나.

촬영장 같이 못 간 대신에 저녁은 함께 먹을 생각이었는데 엇갈렸네.

식탁에 앉은 지연이 가만히 음식을 쳐다봤다.

“언니 지금 지한이 전화하면 안 받겠지?”

“촬영 중이면 안 받지 않을까?”

“그렇겠지….”

지연이 아쉬워하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왕! 왕!

인절미가 꼬리를 흔들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언니 지한이 왔나봐.”

지연이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향했다.

의자가 드르륵 밀리고 지연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덜컥-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왕왕!

들어오자마자 몸통박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격하게 안기는 동생을 지연이 몸에 힘을 줘 버텼다.

조금 늦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왔네.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예이예이. 너희 현관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자. 인절미 너도.”

“지연아. 너는 밥부터 먹어야지!”

“누나, 밥 안 먹었어?”

“그게…응.”

“왜?”

“왜겠냐. 그림 그린다고 그랬겠지. 미나야. 넌 애 안 챙기고 뭐 했어? 내가 왜 널 두고 갔다고 생각해.”

“네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오빠도 지연이가 그린 거 보면 못 말렸을걸?”

미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은이 오늘 자리를 비운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남아서 지연을 보게 됐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다 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쪽도 할 말이 있다고.

그런 걸 그리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다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앗! 형석 씨도 어서 오세요. 고생하셨어요.”

“그것보다 지연이가 밥을 안 먹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끼니를 거르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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