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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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어지간히도 내 동생이 좋은가 본데?’

흐음.

이거 유치원의 왕자님 재림인가?

모든 아이들을 홀린 마성의 유치원생!

풉.

지연이 볼을 붉히며 동생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기뻐하는 누리를 본 지연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청춘이네.’

허허허.

아이들의 순수한 애정이라니 정말 보기 좋구먼.

지금은 저렇게 순수한 만남이지만 지한이가 크면 저런 애 말고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달라붙겠지.

‘내 동생에게 기생하려는 놈들은 전부 가만두지 않겠다!’

저번에 1위 축하로 받은 <회장님 이용권 1회>로 쓱싹해주지!

온화한 마음으로 보다가 갑자기 딴 길로 새어버린 지연에게 지한이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가왔다.

“누나! 이거 먹을래?”

“그거 누리가 지한이한테 준 건데 괜찮아?”

“응! 같이 먹으면 되지.”

“그래도 준 사람이 있는데. 누리야 먹어도 돼?”

“네? 네에.”

누리가 조금 슬픈 눈으로 허락했다.

선물한 사람이 허락했으니 맛있게 먹어야지.

으음. 꿀맛이군.

메론 맛 최고.

오늘따라 더 달달한 것 같네.

* * *

“지연아, 지연아.”

한별의 납치장면 촬영을 보던 지연은 옆에서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영훈을 돌아봤다.

“왜?”

“잠시.”

무슨 할 말이 있나?

그거면 그냥 여기서 하거나 촬영이 끝나고 해도 될 텐데.

영훈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지연이 벤 안으로 들어가자 영훈이 문을 닫았다.

“자.”

“전화?”

“받아봐.”

전화를 받아들자 건너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Hello?

“Henry!”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줬던 헨리의 목소리에 지연이 반갑게 통화했다.

“지금 거기 밤 아니에요?”

-아직 자기 전이니 괜찮단다.

“잘 지냈어요? 엠마는? 엠마도 잘 지내요?”

-엠마도 나도 건강해. 그런데 지연이 너는 가수로 데뷔했다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제자로서 화가의 길을 걷길 바랐던 헨리기에 목소리에 조금 아쉬움이 담겼다.

헨리의 바람을 알고 있던 지연이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요. 미안해요, 헨리.”

-미안할게 뭐가 있나. 그게 네 길인데. 네가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내 제자가 아닌 건 아니니까. 그림 계속 그리고 있지?

“네!”

-그래. 그거면 됐다. 이전보다 훨씬 목소리가 좋아서 다행이다.

“헤헷.”

선생님의 말에 지연이 수줍게 웃었다.

예전에는 아무래도 내가 좀 여유가 없었지.

그저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벗어나 동생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 고민하기 바빴고, 어린 나이에 성공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날 살필 여유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우릴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욘. 지금 영훈에게 듣기로는 쉬고 있다는데.

“맞아요. 휴식기에요. 정확하게는 준비기간?”

-그래. 그럼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니?

“선생님 부탁? 뭔데요?”

-전시. 해보지 않을래?

전시?

헨리의 제안에 지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89. LOVE

“전시요? 제가요?”

-그래. 저번에 본 를 보니 아주 잘했더구나. 실제로 보면 더 좋겠지.

“이미지 파일이었는데도 괜찮았어요?”

-그 정도로도 충분히 알아볼 만큼 멋졌단다.

선생님의 칭찬에 지연이 말을 잃고 쑥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남들이 해 주는 칭찬이 어색하기만 했다.

무대에서 1위 발표를 할 때와는 다른 느낌.

그때는 1위를 위해서 모두가 열심히 했다.

공 사장님이랑 A&R팀장님, 은주 언니랑 지한이와 내 팬들.

여러 사람들이랑 함께 1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는 조금 달랐다.

선생님이 미술에 대해 가르쳐 주긴 했지만 온전히 내 마음을 담아서 그린 그림이었다.

앞으로 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다짐한 그림이기도 하고.

어쩐지 남에게 어린애 같은 마음을 보여줬단 것에 속이 까발려진 듯 부끄럽기도 했다.

그걸 보고 멋지다고 해 주다니.

뭘까. 몸을 가만 두지 못하겠네.

“히히.”

-아무튼 네 그림은 언제나 잘 받아보고 있다. 그걸 보고 결정한 거야. 이제 전시를 해 볼 때가 되었다고.

“그렇지만 전시라니.”

-물론 네 개인 전시는 아니야.

“당연하죠.”

-그저 신인들을 위한 전시란다. 거기에 전시회 주제도 있어. 욘. 주제에 맞게 그림을 그려본 적 있니?

“지한이랑 그렇게 놀았던 적은 있는데요.”

-놀이라도 그런 경험이 있다니 역시 욘이야.

그렇게 칭찬할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지연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네 생각은 어떠니?

헨리의 말에 지연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칭찬해 준 건 좋지만 지금 다음 앨범 타이틀도 준비해야하고 보컬 트레이닝에 춤 연습까지 해야 하는데.

지한이 촬영장에 가는 대신 그 시간만큼 더 열심히 연습해야했다.

과연 자신이 그림을 그릴 시간이 있을까?

“저어. 선생님 조금 더 생각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천천히 생각하렴. 다음 주까지 기다려줄게.

전시일정에 주제까지 나왔다면 바쁠 텐데 다음 주까지 거의 10일을 기다려 주신다니.

자신을 배려한 게 틀림없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연락드릴게요.”

-알았다. 하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어. 욘. 나는 네 가 정말 좋았단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물론 가수로서의 너도 응원한단다.

“감사합니다.”

헨리는 끝까지 지연을 응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도 자신을 배려해 준 선생님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해 줄 수 없어서 지연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헨리 선생님이?”

집으로 가는 길에 지한이 헨리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오늘 하루도 밖에서 촬영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디서 이런 체력이 나오는 건지.

“선생님이 뭐래? 응? 엠마는 잘 있대?”

“응. 두 분 다 건강하대.”

“엠마 보고 싶어!”

“나도. 지한이 촬영만 끝나면 같이 가 볼 까나.”

“좋아! 형, 가도 돼?”

“좋지.”

이번 드라마도 순조로우니 영화 끝나고 바로 다음 작품을 생각 안 해도 괜찮을 거다.

그래도 이왕이면 광고는 몇 편 찍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한이 앞으로 들어온 광고 목록들을 떠올린 영훈이 몇 개 추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전화했대?”

“아차. 그러니까 나보고 전시 해 볼 생각 없냐고 그러셨어.”

“전시? 전시라면 미술관에서 하는 그런 거?”

“응. 신인들을 모아서 하는 거 같은데 거기에 날 추천하실 건가봐.”

“우와아! 누나 전시 보고 싶어!”

지한이 두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누나의 멋짐을 모두에게 알려야 된다고 웅변했다.

“나는 누나 그림 많은 사람들이 봐 줬으면 좋겠어. 누나가 그린 거 엄청 멋지니까. 막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용기가 치솟는 느낌이야. 꼭 해내겠다는 마음이 들어.”

“누나 그림을 그렇게 좋게 봐 줘서 고마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치 형?”

“그러엄.”

“미나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이지. 누나도 그 그림보고 지연이 무대 의상을 떠올리곤 하는 걸. 이번에는 아쉽게도 컨셉이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었지만.”

“언니 그랬어?”

“물론이지. 지금이라도 만들 수 있는데 어때? 볼래? 스케치는 해 놨거든.”

“집에 가면 볼래.”

“앗! 나도나도.”

“저어. 지연이 그림이 그렇게 멋집니까?”

“수호 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겠네요.”

“형. 이따가 집에 오면 같이 보러가요.”

“그래도 됩니까?”

“네에!”

이 사람들.

그렇게 올려쳐봤자 나오는 건 없다고.

“전시. 나도 해 보고 싶긴 한데. 새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게 좀 걸려.”

“왜? 새로 그리면 되잖아.”

“주제가 있대.”

“무슨 주젠데?”

“사랑LOVE.”

아마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모르는 감정이 아닐까?

“사랑이라. 좋네.”

“이번에 새로 그리면 얼마 만에 그리는 거지?”

“나는 누나 새 그림 찬성! 보고 싶어!”

“언니도 찬성. 지연이 너도 이번 기회에 그림 좀 그리고 쉬어. 회사에서도 휴가를 줬는데 굳이 연습하러 가는 건 너 밖에 없을 거다.”

“나도 찬성. 지연이 너 요즘 지한이 촬영장도 갔다가 밤새도록 연습도 하고, 보컬 트레이닝도 하고 있지? 쉴 때는 쉬어야지.”

“그거야 다들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 하지만 넌 남들 쉴 때도 네가 말한 다들 하는 일에 지한이 챙기는 것까지 하고 있지. 왜 쉬는 건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쉬지 않는 거냐.”

“그것도 다들….”

“아니야.”

영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열심히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서는 중요한 순간에 제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어. 몸을 혹사하는 거랑 실력을 다지는 거랑은 달라.”

“영훈오빠 말이 맞아. 연예인들이 왜 휴식기를 갖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거에 쉬어야 다음 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

“그걸 아는 애가 왜 쉬질 않아. 지연이 너 그림 안 그리는 것도 채워 넣지 않고 비워내기만 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가?

데뷔준비 때는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데뷔하고 나서는 전혀 쉰 적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음악방송이 아니어도 라디오라든가 트레이닝, ‘애니멀팜’ 출연도 계속 했었고.

지한이 촬영장에도 따라갔었지.

‘나 스케치 노트를 언제부터 안 들고 다녔더라.’

음악방송 촬영 때도 들고 다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기실에서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래서는 헨리 선생님을 볼 면목이 없어.

선생님은 가수가 된 날 응원해주기까지 했는데.

“잠시 앨범을 내려놓고 취미 활동 좀 해 봐.”

“미국에서 하는 전시를 취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요.”

“뭐 어때. 그림도 그리면서 머릿속을 비울 수 있으면 그게 휴식이지.”

“오빠. 말이 많이 늘었네요.”

“너도 애들 스케줄 물어보는 사람들 상대해 봐라. 느는 건 핑계와 화술밖에 없다.”

지연이 칭찬하다가 다시 평소처럼 티격대는 영훈과 미나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 오빠. 나 전시 해 볼게.”

“와아! 좋아!”

“사랑이라. 지연이 네 그림 기대하고 있을게.”

“잘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는 그저 네가 요즘 널 너무 혹사하는 것 같아서 한 말이니까.”

“응. 알아. 오빠가 날 생각해서 해 준 말이라는 거. 그래서 고맙다고 한 거야.”

수줍게 건넨 인사에 영훈이 잠시 놀라더니 이내 감동받은 얼굴로 울먹였다.

“아니, 야. 이 정도로오.”

“어라라. 영훈오빠, 울어? 영훈 엄마 또 우네!”

“내가 울겠냐흑.”

“우는 거 맞구만.”

영훈오빠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울보일 건지.

지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영훈의 팔을 토닥였다.

이 오빠는 결혼하고 애를 가져도 계속 이런 울보로 남아있을 것 같았다.

‘뭐, 그게 영훈오빠답나?’

훌쩍이는 영훈을 보고 미나가 질린다는 듯이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킁.”

“네에네에. 여기 휴지.”

“흐, 흐으윽.”

“어휴. 진짜 그만 울어요.”

“으응. 킁.”

“아, 더러워!”

미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집으로 가는 차 안을 가득 채웠다.

* * *

다음 주까지 시간을 주기로 한 헨리의 배려가 무색하게 하루만에 하겠다고 답을 준 지연은 그날부터 손에 떼어 놓고 있던 스케치북을 다시 들었다.

‘사랑’이라.

뭘 어떻게 하면 사랑을 그릴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걸 그냥 다 때려 넣어서 만들어?

‘그건 너무 단순해.’

누구라도 그릴 수 있는 건 별로 그리고 싶지 않은데.

“끄응.”

“누나, 뭐해?”

“지한아. 지연이 옷에 화장 묻겠다.”

“괜찮아, 오빠. 지워지면 내가 다시 해 주면 되니까.”

“어이구. 그래.”

미나의 지원에 지한이 메이크업까지 다 한 얼굴로 지연의 어깨에 턱을 걸었다.

앞에 와서 봐도 될 텐데 왜 굳이 등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보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연은 동생이 보기 편하게 스케치 노트를 기울였다.

“주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응. 그동안은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렸는데 주제가 있으니 이번에는 거기에 맞춰야지.”

“전시회의 주제가 그거라니 어쩔 수 없지.”

“원래 전시회에 주제 같은 게 있나?”

“전시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유명한 작가의 작품만 모아둔다든지 어느 특정 시기의 작품만 전시한다든지 그런 전시도 있으니까. 이번에 지연이가 제안받은 전시는 신인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사랑이라는 대중적인 테마를 준 것 같더라고.”

“오? 오빠 좀 알아봤나봐?”

“지연이 일이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영훈을 미나가 대단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저 오빠가 팀장을 달더니 이제 뭔가 팀장다워 보이네.

저런 것도 다 알아보고.

“그래서 사랑을 주제로 어떤 작품이든 준비해야 한다는 거지. 헨리 교수님한테 듣기로는 조각도 있는 모양이더라고.”

“형식은 제한이 없다는 거군.”

“나는 사랑! 하면 몽실몽실한 게 떠올라.”

“지한이는 촉각을 먼저 떠올렸네.”

“누나는?”

“누나는 아무래도 붉은색? 눈으로 보이는 게 먼저 생각나더라고.”

“헤에. 뭘 생각했는데?”

“빨간 심장?”

“엑?!”

물론 LOVE하면 ♥(HEART)가 떠오를 법도 하지만 갑자기 심장?

누나의 무시무시한 심상에 지한이가 기겁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사랑을 다른 감각으로 설명한다는 게.”

“누나가 사랑을 떠올리는 방법은 흔한 거 같으면서도 독특한 거 같아.”

“좋은 힌트가 된 거 같아. 지한이가 생각한 사랑 그려서 보여줄래?”

“응! 누나도 심장…말고 누나가 생각한 거 그려줘.”

“좋아. 오랜만에 같이 그림 그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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