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빨리 반응한 지수와 한성을 본 지연의 말에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긴장이 풀렸으려나?
지연의 등장에 조금 어색하게 굳어 있는 아이들이 금세 쫑알쫑알 떠들었다.
“앗! 시작한다.”
“저거 봐! 나야!”
“나도 나오네.”
“신기해. 오프닝부터 나온 적은 처음이야.”
드라마 오프닝에 아역배우를 보는 경우는 드문데 이 드라마는 아이들이 주역이라 그런지 오프닝부터 등장했다.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져 화면을 보았다.
오프닝이 빠르게 지나가자 평범한 교실의 일상이 비춰졌다.
“건우아! 이거 내가 만든 거야.”
“그걸 왜 나한테 주는데?”
“내가 주고 싶어서.”
혜림이 두 손으로 아기자기한 선물상자를 건네며 말했다.
아이의 얼굴에는 자신이 직접 만든 선물을 거절할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나타나 있었다.
“음. 고맙게 잘 받을게.”
“응!”
혜림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받을 줄 알았어.
건우라는 내 남자친구가 될 자격이 있지.
돈도 많고 예쁜 자신에게 똑똑하고 잘생기고 인기가 많은 건우가 딱이라고 생각했다.
“저거 평소의 누리 모습인 거 같다.”
“내, 내 어딜 봐서!”
“앗 얼굴 빨개졌대요.”
“쉿. 드라마 봐야지.”
“…너 촬영할 때 두고 보자.”
“얼마든지.”
“정훈이가 고생이 많네.”
“제가요?”
“응. 다둥이네 맏이 같은 느낌이야.”
영훈의 적절한 비유에 옆에 있던 미나가 웃으며 영훈의 팔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아파!”
“오빠. 쉿.”
“…미나 너도 나중에 두고 보자.”
“어라? 방금 어디서 들었던 말 같은뎅?”
미나가 손가락으로 누리를 가리켰다.
졸지에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을 한 영훈이 이를 악물며 무시무시하게 미나를 노려봤다.
영훈의 뜨거운 눈빛에 미나가 안고 있던 모짜로 방어했다.
왜옹
모짜가 버둥거리더니 미나의 손에서 벗어나 지연의 무릎에 자리했다.
도망쳐온 모짜를 보고 지연이 등을 쓸어주었다.
짧은 소란이 있던 와중에도 드라마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그게 왜 개 목에.”
“응? 개 목걸이 아니었어?”
건우의 말에 혜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뭐? 개 목걸이 같다고?
혜림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하하! 저거 웃겼는데!”
“누리가 잘 나왔다. 그치?”
“응응! 나 잘했어?”
“응. 잘 했어.”
지한의 말에 누리가 몸을 배배 꼬며 품에 안고 있던 베개를 터트릴 듯이 끌어안았다.
다들 재밌게 노네.
역시 드라마는 시끌벅적하게 봐야 재밌지.
지연이 모짜의 턱을 긁어주며 태연하게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사건이 터졌다.
“자. 오늘 한별이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어요. 다들 책상에 올라가 눈 감자.”
아이들이 눈치를 보면서 책상 위로 올라갔다.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선생님이 다 용서할게요. 한별이 물건을 가져간 사람은 손 들자.”
교실이 고요했다.
한 사람도 손드는 이가 없자 선생님이 북채를 들고 아이들 책상 사이를 걸어다녔다.
그리고 현우의 책상 서랍에서 한별이의 게임기가 발견됐다.
“현우야. 왜 그랬어?”
“저 진짜 아니에요.”
“네 책상 서랍에서 나온 거잖아.”
“그게 왜 제 서랍에 있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후우. 현우 너 교무실로 따라와.”
“선생니임.”
억울한 듯이 현우가 울먹이며 말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교실에 명랑한 목소리가 퍼졌다.
“그거 현우가 한 거 아니에요.”
현우를 추궁하던 선생님도
현우를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던 한별이도
현우를 보고 수군거리던 아이들도
억울해서 눈물을 매달고 있던 현우도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아까 청소시간에 한별이가 가지고 놀다가 잘못 넣은 거예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건우의 말에 한별이가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책상 다 밀고 청소했잖아. 이전 시간에 조모임 하느라 책상이 모둠별로 모여 있다가 청소하고 나서 다시 분단으로 나눴고. 그때 한별이는 자기 책상에 넣은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현우 책상에 넣은 거였어. 한별이 너랑 현우는 같은 모둠이었잖아.”
“쟤가 내 서랍에 있던 걸 가져가서 자기 책상에 넣은 걸 수도 있잖아.”
“현우가 왜?”
“쟤는 거지니까!”
“한별아!”
선생님이 과격한 한별이의 말에 호통을 쳤다.
한별이는 잠시 움찔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씩씩거리며 건우를 노려봤다.
“네가 잘못 넣었다는 증거가 있어.”
“증거?”
“청소시간에 네가 청소 안 하고 책상 위에 앉아서 게임하고 있던 건 우리반 애들이 다 알걸?”
건우가 주위를 둘러보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때 네가 급하게 책상 서랍에 게임기 넣는 것도 본 사람 많아.”
“나도 봤어!”
“너 청소 안 했잖아!”
“지수가 다 같이 하는 거라고 했을 때도 뭐라고 하더니!”
“자. 조용조용. 한별이 너는 이따가 선생님이랑 얘기하자.”
“선생님!”
“그래서 건우야. 그때 게임기를 잘못 넣었다는 거지?”
“네. 애초에 한별이가 앉아있던 책상은 현우 책상이었거든요. 그 증거로! 장난감 넣을 때 그 책상에는 별이 없었을 걸요?”
한별이의 책상에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서 책상에 별이 낙서되어 있었다.
반면 현우의 책상에는 별이 없었다.
“한별아, 그랬니?”
“모, 몰라요. 기억 안 나요.”
“현우 책상 맞아. 내가 책상 맨 뒤로 밀었을 때, 현우 책상이 앞에 있었어.”
“한별이 네 책상은 뒤에 있었어. 내가 책상 줄 맞출 때 봤거든.”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증언이 튀어나왔다.
이제 선생님의 시선은 당황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한별이에게로 향했다.
“학교에 게임기 가져온 거랑 청소시간에 농땡이 친 거, 엉뚱한 친구를 의심한 거에 대해서 선생님이랑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그, 그!”
“우선 현우한테 사과해.”
선생님의 말에 한별이 현우를 보았다.
내가 왜 저런 거지한테 사과를 해야 해!
“어서.”
“…미안.”
제 분에 못 이긴 한별이의 눈가가 빨개졌다.
억울한 누명이 풀린 현우는 자신을 괴롭혔던 한별이의 사과에 조금은 통쾌한 심정이 되어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괜찮아.”
“그럼 이제 한별이 너는 선생님 따라와라.”
“네에.”
한별이 선생님을 따라서 교실을 나서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건우의 주의로 모여들었다.
“우와아!”
“건우야 너 멋지다!”
“어떻게 알았어? 한별이가 게임기 잘못 넣은 거.”
“건우 너 진짜 똑똑하네!”
다들 건우의 등을 툭툭 치면서 축하했다.
부자라고 아이들을 무시하고 다니던 악당을 처치해줘서 모두가 통쾌한 심정이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환호성을 받는 건우를 보면서 현우가 입을 오므렸다 벌렸다.
하지만 끝내 입밖으로 감사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지한이는 대단해.”
“너무 멋져!”
“에이 뭘.”
“촬영할 때도 대단했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더 대단해.”
“멋지나. 나는 저렇게 못 할 거야.”
“나도.”
선생님의 앞에 서서 당당하게 친구를 변호하는 지한이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우리 지한이 엄청 멋지네. 히어로 같아.”
“읏. 정말?”
“정말이지.”
지연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의 손길을 받으면서 입을 헤 벌린 지한의 볼이 달아올랐다.
“…좋겠다.”
“뭐야, 형 지금 부러워하는 거야?”
“!아니야.”
“지연 누나가 좋은 거지?”
“아니라니까!”
옆구리를 찌르면서 놀리듯이 말하는 훈이의 말에 한성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도 쓰다듬어 주셨으면.”
“?”
“?”
지수의 말에 한성이와 한성이를 놀리던 훈이까지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의 몽롱한 눈빛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 * *
[쾌조의 첫출발. ‘햇살마을 수비대’ 시청률 13.7%]
[SBC를 구원하러 온 ‘햇살마을 수비대’]
[‘햇살마을 수비대’가 보여주는 유쾌, 상쾌, 통쾌한 이야기!]
지한의 오래간만의 복귀였다.
오스카에서 상을 받고 난 이후 두문불출하던 스타의 귀환에 방송가들이 출렁거렸다.
같은 시간대 경쟁작인 KBC 드라마가 곧 시청률 30%에 도전하는 이때 새롭게 등장한 <햇살마을 수비대>가 좋은 출발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방송사에게 밀려 시청률을 죽 쑤고 있는 MBS 역시 주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문으로는 왜 오지한을 잡지 못했냐고 사장이 드라마 국장을 불러 한소리 했다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하하. 역시 오지한이야!”
“거봐. 내가 뭐랬어. 잘 될 거라고 했지?”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오스카 수상 배우의 화려한 귀환으로 홍보를 하긴 했어도 시청률은 까 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저 MBS 좀 봐. 톱배우를 가져다 써 놓고 시청률이 10%대에서 빌빌거리고 있는 모습을!”
“그저 그런 톱스타랑 할리우드에서 상 받고 온 스타랑 어디 같나.”
“맞는 말이야.”
“어흠. 이거 다 내 덕분인 거 알지?”
“그게 왜 자네 덕인가?”
숟가락 얹으려는 예능국 장 국장을 보고 드라마국 전수용 국장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게 다 내가 오지연을 잘 대해줘서 그런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우리 대본이 좋아서 그런 거지.”
“어허. 내가 다 잘 봐 줘서 우리 대본 먼저 본 거지. 막말로 다른 곳에서도 좋은 대본이 있는데 왜 우리 걸 골랐겠어.”
“우리 대본이 더 좋으니까 그렇지. 다른 방송국에서 이렇게 어린 배우들을 주연으로 쓸 거 같아!?”
“내가 좋은 인상을 남겨서 우리 방송국 걸 먼저 본 거라니까!”
“그런 억지가 어딨어!?”
입사 시기도 비슷하고 비슷한 시기에 국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라인에 서서 생사를 함께 한 전우처럼 마음이 잘 맞던 친구였다.
그런데 누가 더 잘했나로 지금 싸우게 생겼다.
“내 덕분이야!”
“아니, 예능국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네 덕이래!”
“아무튼 내 덕이라고!”
“억지야!”
두 사람의 유치한 싸움이 한동안 계속됐다.
* * *
<햇살마을 수비대>는 2화도 화제가 되었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인기가 많은 건우
예쁘고 착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지수
건우를 좋아하고 여왕처럼 군림하는 혜림
먹보지만 힘이 쎄고 순한 정민
부자지만 건우를 질투하고 지수를 짝사랑하는 한별
소심하고 가난 때문에 한별의 괴롭힘을 당하는 현우
이 여섯 아이가 진행하는 이야기가 꽤 엉뚱하지만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하는 맛에 사람들이 모처럼 웃으면서 TV 앞에 모여들었다.
“정민아 출동!”
“출도옹!”
건우의 외침에 정민이 트레이너의 명령을 받은 주머니몬처럼 뛰어나갔다.
“어, 어? 뭐야? 으헉!”
달려들어 명치를 향해 몸통박치기를 한 정민 덕분에 범인이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이야야아아아!”
“나쁜놈!”
“으아아아아!”
쓰러진 범인 위로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갑자기 벌어진 소동에 주위에 있던 어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어이구. 너희들 왜 그러는 거야?”
“사람 위에서 뭐 하는 거야?”
“이 사람 죽겠어!”
어른들이 허겁지겁 아이들을 떨어트려 놓으려고 할 때, 건우가 외쳤다.
“이 사람 저 집 창문에서 나왔어요!”
“창문?”
“뭔 소리야. 사람이 왜 창문으로 나와.”
건우의 말에 사람들이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게 정말이니?”
“창문으로 나왔다고?”
“이거 놔! 이 씨, 애새끼들이!”
“맞아요. 저 아저씨가 나올 때 저거 들고 나왔어요!”
아이들 말에 어른들이 범인의 품에서 삐죽 나온 검은 장갑을 보았다.
장갑, 창문, 아이의 증언.
수상했다.
“당신, 좀 봅시다.”
“누가 경찰 좀 불러봐.”
“이 사람 도망 못 가게 묶어놔야겠는데?”
“누가 끈 가진 사람 없어?”
“저기, 줄넘기 있는데 이거라도 쓰실래요?”
“어어. 그래.”
“고맙다.”
건우의 말에 어른들이 황당함 반, 기특함 반 섞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줄넘기를 받고 범인이 도망치지 못하게 꽁꽁 묶은 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나타났다.
범인의 품에서 현금 몇 십 만원과 귀금속이 발견되었다.
“이거 진짜 도둑놈이었잖아?”
“빈집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