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오늘 하루 잘 부탁해!”
“우선, 선물은 이따가 확인하고 밥부터 먹자. 다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응!”
“히힛. 식당에 가자. 오늘 아주머니가 엄청 신경 써서 만드셨대.”
집안일을 봐주시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늘 아이들이 온다며 일찍부터 힘썼다.
장 보는 거며, 요리하는 거며.
오죽하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며 코디인 미나와 경호원인 지은의 손까지 빌렸겠는가.
물론 미나는 주방에서 쫓겨났다.
옷 바느질하는 재주와 요리 재주는 별개인 듯싶었다.
“우, 우와아아.”
“와아.”
“이거 전부 지한이네 아주머니가 만드신 거야?”
아이들이 상 가득 차려진 요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찜닭에 잡채에, 파전에 떡볶이에 쫄면 등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 BEST에 들어가는 것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응! 혹시 찜닭 안 좋아하는 사람은 닭봉있어.”
“나 저거 엄청 좋아하는데!”
“우와 용가리도 있네?”
“나는 떡볶이가 좋아.”
“탕수육 맛있겠다.”
“잡채? 잡채도 있어?”
잔칫상이네 뷔페에서 볼 것 같은 메뉴들에 아이들이 슬그머니 식탁에 앉았다.
“잡채는 누나가 좋아하는 건데. 아주머니가 누나 때문에 만들었나 보다.”
“지, 지연 선배님이 잡채를 좋아해?”
“응! 그래서 나도 좋아해.”
“그렇구나.”
지한의 말에 한성이 잡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선배님이 좋아하는 음식.
“다들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자. 사이다 마실 사람?”
“저요! 저!”
“콜라 있어요?”
“지한아 너는 뭐 마실 거야?”
“나는 물.”
“그럼 저도 물 마실게요.”
“저도 물이요.”
“그래. 그래.”
영훈이 아이들의 주문을 받으며 식당 여기저기를 움직였다.
혼자서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영훈이 지연이 의상 때문에 위층으로 도망친 미나를 떠올리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장미나!!!! 두고 보자!’
지은은 도시락 전달을 위해서 소속사로 갔고, 형석은 아이들이 많아진 만큼 경호에 집중하느라 도와달라고 할 수 없었다.
빈손이라고는 미나뿐이었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버렸다.
의상 만드는데 인절미랑 모짜는 왜 데리고 가는가!?
분명 도망친 거다!
“형! 형도 먹어요.”
“그래. 이것만 하고.”
지한의 말에 영훈이 울적하게 대답했다.
과연 내가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애도 없는데 육아하는 아버지 신세가 된 영훈이 집에 있는 엄마를 떠올렸다.
‘어머니. 잘하겠습니다.’
아이들이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친구들을 초대할 때는 맛있는 음식과 게임이 최고라던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 누나는 대단해.
오늘도 자신의 누나의 대단함에 감탄한 지한이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이는 친구들을 바라봤다.
“이거 맛있다.”
“우리 아주머니가 요리 엄청 잘해!”
“우와아. 지한이는 좋겠다. 그럼 맨날 이렇게 맛있는 거 먹는 거야?”
“매일 이렇게 먹는 건 아니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우리 엄마도 매일 이런 요리만 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는 몸 관리해야 한다면서 이런 거 못 먹게 해.”
“지수 누나 몸 관리해?”
지수의 말에 아이들이 놀라며 말했다.
“여배우는 어릴 때부터 관리해야 한대.”
“우, 우리 엄마는 아직 그런 말 없던데.”
“우리 집도 엄마가 배우가 되려면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그런 말 안 하셔.”
“지수 누나네는 엄한가 봐. 우리 아빠는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던데.”
“지수는 배우가 되고 싶은 거지?”
“네. 저도 지한이처럼 멋진 배우가 되려고요. 그래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엄마가 특기도 하나 가져야 한다면서 발레 어떠냐고 해서 촬영 끝나고 발레 배우기로 했어요.”
“여, 영어어.”
“발레!?”
목표를 위해서 벌써부터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는 말에 아이들이 지수를 대단하다는 것처럼 쳐다봤다.
평소 조용하지만 똑 부러지는 지수가 저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지수 언니는 안 힘들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니까. 힘들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수 누나는 어른이구나.”
“힘내.”
아이들이 힘내라며 지수 앞으로 각자가 생각한 맛있는 요리를 밀어줬다.
자신의 앞으로 모인 각가지 음식들을 보고 지수가 이렇게 많이는 못 먹는다면서 다시 애들 앞으로 밀어줬다.
우물우물
“나는 연기도 좋지만 태권도도 좋은 거 같아.”
“그건 훈이 네 아빠가 관장님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음. 그런가?”
“훈이는 단순하다니까.”
“그러는 누리 넌 뭐 하고 싶은데?”
“나? 나도 지수 언니처럼 연기 계속할 거 같은데. 아직은 연기하는 게 좋아.”
“정훈이 형은?”
“나는 잘 모르겠어. 당분간은 학교 가는 것만 생각하려고.”
아이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정훈의 말에 아이들이 의아하게 물었다.
“형은 배우 안 할 거야?”
“아역배우를 한다고 해서 꼭 배우만 하란 법은 없잖아?”
“그렇긴 한데.”
“그리고 나는 아직 다른 거에도 관심이 많아서.”
“뭐 하고 싶은데?”
“나는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
“요리!?”
“형이!?”
의외의 직업에 아이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역배우를 잘하고 있다가 갑자기 요리라니?
“나는 지수나 누리처럼 먹는 거 잘 못 참거든.”
“응. 그래 보여.”
“훈아, 쉿.”
통통한 체구를 가진 정훈을 본 훈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정훈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나도 아는걸. 나는 먹는 게 좋아. 엄마 따라서 요리하는 것도 꽤 좋고. 그리고 나 생각보다 요리에 소질 있는 거 같아.”
“형은 연기도 잘하잖아.”
“그렇지만 요리하는 게 더 좋아.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요리를 하고 싶어.”
훈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응원할게요.”
“힘내요!”
“훈이 형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자아자 홧팅!”
“그럼 훈이 형이랑 같이 촬영하는 건 이번 드라마가 끝이겠네.”
“그러게.”
지한의 말에 아이들이 아쉬워했다.
이번 드라마가 첫 작품인 한성을 제외한 아이들은 이 촬영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촬영장에서는 아역배우라고 해도 엄한 잣대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요구했고, 너무 어리다고 은연중에 무시하는 배우들도 많았다.
촬영장에서 오랜 시간 대기해야 하는 것도 일쑤였다.
그런데 할리우드 스타가 합류한 것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스태프들은 배우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을 배려할 줄 알았고, 아이들이 주인공이기에 모두가 배우들을 존중했다.
작은 의견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우리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줬다.
그건 아마도 오지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촬영장을 장악한 지한의 아우라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가 들어가는 씬마다 금방 촬영이 끝나니 과히 모두가 좋아하는 배우라고 할 법했다.
“자아. 얘들아 밥 먹어야지. 이러다 음식 다 식겠다.”
처진 분위기를 영훈이 끌어올렸다.
아이들의 빈 잔을 채워주고, 밥도 떠다주면서 화제를 딴 곳으로 옮겼다.
영훈의 노력에 아이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 *
“지은 언니, 지한이 친구들 왔다면서요?”
“맞습니다. 지금쯤이면 모두 거실에 모여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
아무리 집이 넓다고 해도 5명의 아이들이 잘 수 있는 공간이 떡 하고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이미 각 방의 주인이 있었기에 지연은 아이들이 거실에서 잘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했다.
“지한이는 지금 재밌겠지?”
“아마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간 느낌일걸? 아, 지연이 너는 잘 모르려나?”
“지한이가 학교를 안 다녀서 그런 단체 활동은 처음일 텐데.”
“어휴. 지연이 너는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 지한이가 왜 단체 활동을 한 적이 없어? 따지고 보면 촬영도 다 단체 활동이지.”
“언니. 그건 일이잖아. 지한이는 또래랑 논 적이 많이 없는걸.”
“어쩔 수 없지. 스타의 숙명이라고 생각해.”
은주의 말에 지연이 고심했다.
같이 촬영하는 배우 중에 이토록 지한이가 다른 배우에 대해서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 어려서 지한이가 다른 배우와 모임을 갖기도 조금 그렇고 학교도 안 가니 지한의 친구는 인절미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토록 집에 초대까지 할 정도로 좋아하는 걸까.
“언니. 지한이가 학교를 갈 수 있을까?”
“학교? 설마 지금 지한이 친구 만들어 주겠다고 학교에 보내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지한이한테 내가 공부를 가르칠 순 있지만 친구가 되어 줄 순 없는걸. 학교는 그런 역할도 하는 거잖아. 또래와의 만남과 사회화. 그로 인한 정신적인 성숙과 정서발달도 학교에서 배우는 거라고 들었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니. 진짜 가끔 보면 지연이 너는 애가 아니라 어른 같다니까.”
“아무튼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학교는 그걸 채워줄 수 있는 기관이고.”
“흐음.”
지연의 말에 은주가 운전대를 톡톡 쳤다.
잠자코 듣고 있던 지은이 입을 열었다.
“저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요?”
“지한 군의 경우는 전 국민이 얼굴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 평범한 일반인 사이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 과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연예인이 되면 과도한 관심을 받는 건데 나쁠 건 없지 않겠어요?”
“은주 언니 말처럼 어차피 받는 관심이지 않나요?”
“그만큼 질시의 대상도 된다는 겁니다. 또래와 사귀기 위해서 갔다가 왕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일반인들과 함께 있는 만큼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기 힘들어집니다. 외부에서 학교에 침입하려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고, 더 심한 경우에 범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지한은 공 사장과 탑엔터 덕분에 외부와 일정 부분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지한이가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애써 막아놨던 기자들의 관심, 극성 팬들의 접근, 그리고 어린 지한이를 노리는 나쁜 손길 등에 노출될 것이다.
‘실제로 이미란도 방송국에 침입했단 말이지.’
이미란의 납치소동 이후로 방송국 출입이 엄격해졌다고 하지만 학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쩔 수 없지.
지한이 친구 만들기는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요즘에는 예술중이나 예술고가 있다고 합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연습생 언니 중에 그런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
실제에 미래에 많은 아이돌, 배우들이 예술 관련 학교를 나왔다고 했지.
어릴 때부터 활동하는 아이돌의 경우는 예술중, 예술고를 나오는 경우가 활동하기 편하니까 그쪽 출신들이 많이 보였다.
“지연아 그 문제는 지한이 중학교 갈 때 다시 얘기해 볼까?”
“네.”
“그런데 지연이 너는 학교 안 가고 싶어?”
은주의 말에 지연의 머릿속에 학창시절이 퍼뜩 떠올랐다.
‘와하하하하하하하.’
‘지연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겠니?’
‘너, 누가 선생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래?’
단편적으로 지나가는 기억에 지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뇨. 안 가고 싶어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 데뷔했고 활동이 많으니 학교까지 가시면 많이 힘드실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아가씨.”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언니 얼마나 남았어?”
“이제 이 골목만 들어가면 되니까 다 왔어.”
“응.”
지연이 창문 밖을 바라봤다.
어두운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다녀왔습니다.”
현관에서 들린 말에 지한이 뛰어나갔다.
사실 집 밖에서 누가 내리는 소리만으로도 지한의 관심은 온통 현관에 쏠려 있었기에 아이들 역시 지한의 뒤를 따라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누나!”
“냄새 난다니까.”
“누나 냄새는 다 좋아.”
동생의 억지스러운 말에 지연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 불쾌했던 기분이 동생 덕에 전부 날아가 버렸다.
품에 가득 안긴 동생의 온기를 느낀 지연이 동생의 머리에 볼을 비비다가 현관에 서 있는 인기척을 느꼈다.
“아. 수비대 대원들이죠?”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문정훈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지, 지연 선배님!”
자기보다 더 먼저 데뷔한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인사하는 광경에 지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지연이에요. 왜 여기 서 있어요? 다들 들어가요.”
“넵!”
“네.”
“지한아. 누나는 바로 씻고 올 테니까. 대원들이랑 거실에 가 있어.”
“알았어!”
지한이에게 부탁을 한 지연이 눈인사를 하고 방으로 사라졌다.
가까이서 지연을 본 아이들이 지한이를 둘러쌌다.
“지한아 네 누나 엄청 멋지다.”
“뭐랄까? 카리스마가 느껴져.”
“우리 아빠 같았어.”
“지, 지연 선배님은 연습하고 오신 거지? 대단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멋져.”
어딘가 몽롱한 얼굴로 말하는 지수를 보고 아이들이 조금 떨어졌다.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한 동물 같았다.
뭔가 방금 위험했던 거 같은데.
“자자. 배우 여러분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마시고 얼른 가시죠. 이제 곧 드라마가 시작한다구요.”
“앗! 내 드라마!”
“…멋지다.”
“누리야. 지수 좀 챙겨.”
“옙! 자, 언니. 얼른 가자.”
“한성이 형? 형도 가야지.”
“어, 으응.”
누나가 들어간 곳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한성을 지한이 끌고 갔다.
끌고 가는 지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87. <햇살마을 수비대>
씻고 나온 지연이 머리를 대충 말리고 거실로 나왔다.
“누나!”
“너는 친구들이랑 있는데도.”
“뭐 어때. 누나는 내 누난데.”
지한의 뒤에서 두 사람이 부러운 얼굴로 남매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지연이 동생의 친구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이 온 건 <애니멀팜> 촬영 이후로 처음이야.”
“여, 영광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