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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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쉬었다 할까?”

“바, 바로 할 수 있어요.”

쉬었다가는 당장 엄마를 봐야 한다.

그 생각에 한성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충환이 한성이와 아이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힐끔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거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구만.’

어쩐지 첫 씬이 좋더라니.

아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빨간 입술의 아줌마에서 시선을 떼고 충환이 신호했다.

* * *

“…컷!”

PD의 말과 함께 촬영장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벌써 20번째 테이크.

처음에는 아이니까 봐주자는 스태프들의 시선도 점점 싸늘해졌다.

세트장을 옮기고 나서 단 한 컷도 진행되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읽은 충환이 풀어줄 때라는 걸 알고 입가에 미소를 걸고 말했다.

“잠시 쉽시다!”

충환의 말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듯이 촬영장이 부산스럽게 바뀌었다.

한성이와 맞상대였던 훈이 지쳤는지 축 늘어졌다.

훈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아이를 안고 의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랜 시간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도 찌뿌둥한지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여서인지 스태프들은 되도록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장비를 점검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에 예민한 아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모두가 아닌 척하고 있지만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한성!”

“힉!”

한성의 앞에 무시무시한 마녀가 나타났다.

“당장 따라와.”

“…네에.”

가뜩이나 20번 연속 NG를 내서 기가 죽은 아이가 창백한 얼굴이 되어 엄마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연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누나아.”

지한이 지연을 부르면서 품에 포옥 안겼다.

그러고 보니 촬영할 때마다 빨리 끝났고, 그와 함께 촬영하는 이들 중에 NG를 내는 사람이 적었던 지한이로서는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많이 놀랐겠지.

지연이 동생의 등을 쓸어주었다.

“놀랐어?”

“으으응.”

“그럼?”

“걱정돼.”

“한성이가?”

“응.”

촬영장에 있는 누구라도 알겠지.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아이를 데려가는 보호자가 제대로 아이를 달래줄 리가 없다는 것을.

더 다그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그 아줌마를 봐서는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부터 이상했다.

첫 테이크 때, 어딘가로 시선을 준 한성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시선을 향했던 방향을 보면 한성이의 보호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곳이다.

“오빠. 한성이란 애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음. 글쎄. 나도 듣기로는 이번이 첫 드라마라고 하던데.”

“첫 드라만데 지한이랑 같이 출연한다고? 그것도 조연으로?”

내 동생이 워낙 대단해서 이 드라마에 같이 출연하는 아역배우들은 모두 치열한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그중에서도 주요 배역을 차지하는 아이들은 모두 2년 이상의 경력을 지니고 있고.

“나도 그게 신기해서 알아보니까 배역이랑 너무 찰떡이어서 뽑을 수밖에 없었다더라.”

“하긴 저거 보니까 완전 딱이긴 하네.”

그럼 카메라 울렁증?

하지만 첫 세트장에서 찍을 때는 별다른 NG를 내지 않았다.

물론 역할 때문에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장면이 대부분이었지만.

“오빠가 해결할까?”

“오빠가?”

“형이?”

“이런 거 하려고 너희들 매니저 하는 거 아니겠냐. 너희는 연기에만 집중하고 있어 나머진 형이 알아서 할게.”

오오. 팀장이 되었다고 영훈 오빠 일 처리 능력이 조금 늘어난 거 같은데?

영훈의 대답에 지연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오빠 혼자 할 수 있어?”

“걱정 마라. 지금 연예계에서 탑엔터 이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게다가 난 그 대단한 할리우드 스타의 매니저란 말씀. 수호야. 애들 잘 지켜보고. 형석 씨 부탁합니다.”

“넵! 팀장님.”

“다녀오십시오.”

영훈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잠시 촬영장을 나섰다.

“누나, 형이 잘 할 수 있을까?”

“오빠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리고 저 아줌마 계속 촬영 못하게 째려보고 있었잖아. 마음에 안 들어.”

“나도. 저 아줌마 마음에 안 들어.”

아이들의 시선이 촬영장 구석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줌마에게 향했다.

그녀의 앞에 옷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한성이 보였다.

“누나. 나 한성이 형 좋아.”

“왜?”

“한성이 형도 같은 수비대원이니까?”

지한이의 장난기 섞인 대답에 지연이의 광대가 치솟았다.

“좋아. 한성이 같은 타입은 억누르고 있는 것만 제거해주면 훨훨 날 타입이니까. 저 아줌마만 해결하면 제 실력을 발휘할 거야.”

“정말?”

“응. 연기 연습이 필요 없을걸? 생활연기로 압살 가능.”

“생활연기?”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해도 현우 역할에 찰떡처럼 맞을 거란 뜻이야.”

그나저나 저 아줌마는 지가 뭐라고 촬영장에서 배우한테 잔소리를 저렇게 늘어놓는 거야?

거슬리니까 영훈 오빠가 빨리 저 아줌마 촬영장에서 쫓아냈으면 좋겠다.

* * *

메인 연출을 맡은 김 PD는 쉬는 시간 아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보호자를 보았다.

오디션을 보고 뽑아서 잘 될 줄 알았는데 저렇게 아이를 잡는 보호잔 줄 몰랐다.

‘다음부터는 보호자도 같이 면접을 보든가 해야지.’

아무튼 지금 한성의 상태를 봐서는 이대로는 택도 없다.

잠시 진정될 때까지 다른 컷을 찍고 있어야겠군.

“제군들 미안하지만 우리 컷 5부터 찍을까?”

PD의 말에 아이의 상태를 파악한 스태프들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 일을 한 지 최소 몇 년은 된 이들이다.

배우가 아직 촬영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뻔히 알 수 있었다.

PD의 신호에 모두가 다음 컷 촬영을 위해서 움직였다.

컷 5는 지한이가 나오는 장면.

“지한아, 잘하고 와.”

“응! 누나 나 열심히 하고 올게.”

“그래.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지한이가 카메라 앞에 섰다.

“힘들지?”

“아닙니다!”

“괜찮아. 한 방에 끝낼 거니까.”

“오오!”

“…멋있어.”

지한이의 말에 상대역을 맡은 훈이와 한별이가 짝사랑 하는 대상이자 수비대의 한 송이 꽃인 지아 역을 맡은 지수가 감탄했다.

조금 전 NG 퍼레이드로 다들 힘이 빠졌으니 기세를 올려야했다.

그리고 그건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자신의 몫이었다.

아직 어리지만 주연의 역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한이 자신 있게 말했다.

“자 그럼 컷 5 테이크 1, 레디 액션!”

84. 너 출입금지

지한이 촬영을 재개한 시점부터 촬영장에 활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연기를 끌어내면서 빠르게 모든 장면을 촬영하는 지한을 보고 스태프들이 다들 ‘역시 할리우드 스타’라면서 감탄했다.

촬영장의 분위기가 좋아지자 모두가 의욕적으로 변했다.

“이 장면 한 번 더 찍자.”

“김 PD. 조명 조금만 바꿔도 될까?”

“앗 PD님 잠시만요. 이 소품만 더 놓을게요.”

이렇게 모두가 의욕적으로 나서니 찍는 장면마다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충환이 분위기를 바꾼 아이를 보고 눈을 빛냈다.

과연 먼 땅에서도 성공을 하고 올 만한 실력이다 싶었다.

주연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주고 있었다.

‘실력도 있으면서 현장을 조종할 수 있단 말이지?’

충환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지한을 보고 눈을 빛냈다.

지한이 분위기를 띄우자 촬영속도가 빨라졌다.

아까 NG로 까먹은 시간을 만회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분위기가 좋아졌네요.”

“지한이니까.”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지연을 보고 수호가 ‘오오’ 하면서 감탄했다.

더, 더 칭찬하라구!

“뭐 하냐.”

“오빠 왔어? 빨리 왔네.”

“그럼. 내가 누군데.”

“이제 팀장 단 허당 오빠.”

“허당?”

“잘나가다가 가끔 삐끗한다는 뜻이야.”

“좋은 거지?”

“응.”

지연의 말에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알 수 없는 단어나 신조어를 말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에도 지연이만의 언어겠지.

“우선 저 아줌마는 전업주부이고, 자식은 아들이 하나 있어. 저기 있는 한성 군이지. 꽤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예전에 배우로 활동했었나봐. 그래봤자 지금은 전업주부. 의외로 남편이 꽤 건실한 중소기업 사장이야. 살림은 도우미 아줌마 쓰는 거 같고 저 아줌마는 쇼핑중독. 백화점을 그렇게 드나든다더라.”

쇼핑중독이라.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군.

돌아오기 전 오미란이 휴대폰 소액결제로 홈쇼핑을 그렇게 썼었지.

불쾌한 기억에 지연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지만 영훈의 보고는 계속됐다.

“명품 좋아하는데 성격은 더럽고, 조그만 거에도 까칠하게 굴며 자주 하는 말은 ‘내 남편이 누군 줄 알아?’, 왕년에 배우였다고 해도 무명이었어. 특별한 대표작은 없고, 작은 단역만 전전했던 것 같아. 그 당시 연기력은 별로였고, 마스크도 주목할 만한 얼굴이 아니었지.”

“배우였다고?”

“응. 연기도 못하면서 저렇게 애를 잡아먹을 듯이 잔소리했단 말이야?”

“도대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네요.”

있는 듯 없는 듯 옆에 서있는 수호 오빠가 무심결에 말했다.

이쪽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되는 자신이 봐도 한성은 꽤 그럭저럭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아줌마에게 한 소리 들을 때마다 딱딱하게 굳어 오는데 좋은 조언을 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애 연기가 괜찮으니까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에게 투영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연예계에는 저런 케이스가 적지 않으니까.”

“그럼, 팀장님. 한성이는 그럼 엄마가 억지로 연기를 시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영훈의 말에 수호가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오빠 생각보다 빨리 알아왔네? 전직 배우였다고 해도 저 아줌마 남편이랑 이런저런 건 어떻게 알았어?”

“훗. 한성이가 이번 작품이 첫 작품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렇다면 연예계에서 저 사람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지 않겠어? 그래서 일반인 조사를 잘 아시는 분께 부탁드렸지.”

“누구?”

“남 비서님.”

사장님 비서아저씨!?

아니 이 오빠 간도 크네.

사장님 개인비서를 부려먹을 생각을 다 하고.

물론 최고의 인선이었지만.

형석 아저씨도 놀랐는지 입을 열었다.

“남 비서님 말씀이십니까?”

“네. 제가 일반인 뒤를 어떻게 캡니까? 유명인도 아니고. 그래서 일반인 뒤도 캘 수 있는 분께 부탁드린 것뿐입니다.”

“영훈 씨는 대단하시네요.”

그 남 비서님을 부려먹을 생각도 다 하고.

형석의 시선에 영훈이 왜 그러냐는 듯이 물었다.

“왜요? 남 비서님이 언제든지 아이들 일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는데.”

“그렇긴 하죠.”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이 눈을 깜빡이는 영훈을 보고 형석이 침을 삼켰다.

이게 바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는 걸까.

무려 HJ의 직계를 보좌하는 비서가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알게 된다면 며칠 밤, 잠을 설칠 수도 있으니 모르는 게 나았다.

“아무튼 조사는 잘해 왔는데 어떻게 저 아줌마를 상대할 거야?”

“후후후후후. 걱정하지 마. 그 계획에 대해서도 세워왔으니까.”

“뭔데뭔데?”

옆에 있던 수호까지 귀를 쫑긋하고 귀를 가까이 댔다.

“저 아줌마가 애 잡을 때 PD님한테 말해서 촬영에 방해된다고 밖으로 쫓아낼 거야.”

“PD님한테요?”

“결국 이르겠다는 게 해결책이구나.”

“어쩔 수 없잖아. 현장을 관리하는 건 PD님이니까.”

자신이 억지로 끌고 나갈 수 없다며 영훈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하긴 다른 배우 매니저라면 담배라도 한 대 하자며 나갔곘지만 아역배우 매니저는 약간 특수하니까.

특히나 저 아줌마처럼 사사건건 아이의 연기에 간섭하는 아줌마를 상대하긴 쉽지 않겠지.

영훈 오빠, 노력했네.

“그런데 오빠.”

“응.”

“만약 PD님이 안 쫓아내면 어떡해?”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에효.

* * *

지한이 있고 없음을 확연하게 느낀 김 PD는 빠른 촬영을 위해서 촬영 순서를 조정했다.

김 PD는 지한이 등장하는 컷, 아이들이 함께 있는 컷, 한성과 상대만 나오는 컷, 단독 컷으로 나누어 촬영하기로 했다.

그리고 역시나 아이들과 함께 찍는 컷까지 한성은 문제없이 촬영을 완료했다.

‘다 같이 있는 장면은 문제가 없는데 유독 한성이 부각되는 장면에서 NG가 나온다라.’

충환이 힐끔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보호자를 보았다.

저 극성스러운 아줌마가 애한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략 짐작이 갔다.

나름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연기를 가르쳤겠지만 글쎄다.

촬영장의 암묵적인 룰도 모르는 아줌마가 가르쳐봤자 얼마나 잘 가르쳤겠는가.

“저기, PD님?”

“네, 고 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충환이 자신에게 말을 건 영훈을 보고 웃는 낯으로 맞이했다.

촬영하고 있을 때 다른 매니저가 말을 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상대가 상대이기도 하고, 잠시 찰영 준비 시간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잘나갈 배우의 매니저한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PD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영훈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던 곳에 시선을 주는 그를 보고 PD이 미소를 지었다.

“그거 참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대되네요.”

“하하. 촬영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요?”

충환과 영훈이 목소리를 낮춰 대화했다.

목적이 일치하다는 것을 안 충환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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