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86/296)

아이들의 마음을 느낀 건지 인절미랑 모짜도 옆에 달려와 붙었다.

옆에 온 아이들을 안고 각자 공이랑 깃털 낚싯대를 들고 놀아주고 있을 때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영훈 오빠 왔나보다.”

“형 괜찮을까? 어제 술 많이 마셨을 텐데.”

자리에 없는 우릴 대신해서 많이 마셨을 거다.

술이라는 말에 지한이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아이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영훈은 피부가 거칠긴 했어도 꽤 멀쩡한 얼굴이었다.

“후후후후후후.”

아니, 안 괜찮은가?

“지연아. 지한아. 드디어 때가 되었다.”

비장하게 선언하는 영훈을 보고 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깃털 낚싯대를 흔들었다.

왜애애애애옹!

“어허! 모짜 이 녀석. 오빠가 지금 말하는데.”

“오빠. 모짜랑 싸우지 말고. 뭐가 때가 됐다는 건데?”

“광고 말이야!”

지연이가 음악방송 1위를 하고 나서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났던가.

천재 남매의 다음 행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지한이 너랑 둘이 같이 나오면 광고 단가가 무려 5억이 넘는다고!”

“5억? 지한이 첫 광곤데 비싼 건가? 싼 건가? 그런데 나랑 둘이서 5억이면 인당 2억 5천인데. 싼 거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디 감히 우리 오스카 수상 배우님을 그렇게 낮은 가격에 모시려고. 오빠가 그런 건 다 거절했어.”

“5억이라며.”

“지금 최소로 부르는 게 그 정도란 말이지. 아무튼 지금 너희 앞으로 들어온 광고가 수십 건이야.”

영훈의 말에 지연이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에 그렇게 많은 광고가 있단 말이야?

놀라서 커진 지연의 눈을 보고 영훈이 악당처럼 웃었다.

“훗, 하지만 우리가 할 광고는 정해져 있지! 딱 10개만 할 거야!”

“10개도 많은 거 아닌가?”

“너랑 지한이 합쳐서 괜찮은 것만 골랐어. 아무리 그래도 애들 앞으로 자동차 광고는 너무 한 거 아니야?”

자동차가 뭐 어때서.

우리 앞으로 온 거면 가족 컨셉으로 촬영하는 걸 텐데.

아, 가족이라서 오빠가 그렇게 말한 건가?

“우리가 알아서 괜찮은 것만 고를 거야. 일단 너희들은 다음 주에 HJ전자, HJ푸드에서 들어온 광고 찍을 것만 생각하자. 나머진 회사에서 알아서 할게.”

“응.”

“나도 광고 찍는다! 히히힛”

그런데 거기 사장님네 가족들이 경영하는 곳 아닌가?

가족들에게서 온 제안을 보고 사장님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궁금하네.

어제 있었던 가족 모임을 떠올린 지연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걸렸다.

79. 이거 할래.

오늘은 지한이와 함께 광고를 찍으러 왔다.

어제는 자동차 광고였는데 오늘은 라면이라니.

그렇게 해서 올린 수입이 억 소리가 났다.

오늘 라면 광고만 해도 대사 몇 마디를 제외하고 계속 먹기만 하는데 이것만 해도 괜찮은 걸까?

몇 초 안 나가는데 이렇게 돈을 쉽게 벌어도 되는가 싶었다.

“형 그런데 우리 이거 끝나고 어디 소풍 가?”

차에서 한 짐을 들고 나오는 영훈을 보고 지한이가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담요에 음료에 책, 갈아입을 옷 등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미나가 너희 꼭 이 옷 입어야 한다고 해서.”

“책은 왜 가지고 오는데?”

“심심할 거 아니야.”

“금방 찍는데?”

“지연아. 화면에 몇 초 안 나오는데 하루 종일 찍는 경우도 있어.”

“우리 어제 일찍 끝났는데?”

“…원래 촬영장에서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영훈이 끝끝내 짐을 전부 챙겨서 내렸다.

짐을 들고 아이들을 데리고 세트장으로 올라갔다.

영훈은 이제 익숙한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의상을 갈아입으러 가는 아이들을 보고 감개무량했다.

첫 광고라면서 몇 장 안 되는 콘티가 닳도록 연습하던 아이들이 엊그제 같은데.

처음이라서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것과 무색하게 아이들은 순식간에 촬영을 끝냈었다.

‘세상에 광고 촬영하고 가는데 해가 안 지다니.’

보통 한나절은 걸리는데 광고 촬영이 해 떠 있을 때 가서 해 떠 있을 때 끝났다니, 자신도 듣던 것과 달라 무척 어색했다.

다시 생각하지만 정말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어제는 짧은 콘티만으로도 자기들끼리 여러 버전을 생각하더니 눈앞에서 수십 가지 버전의 광고 영상을 찍어버렸다.

그중 하나만 써도 오늘 촬영에 충분하지 않을까?

“짐을 너무 많이 들고 왔나.”

자신이 바리바리 싸 온 짐을 보고 영훈이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도 일찍 퇴근할 것 같다.

* * *

“어휴. 저놈의 자식. 못돼 처먹어서는!”

TV를 보고 있던 주부는 아내를 두고 바람난 남편을 보고 욕을 하면서도 끝까지 드라마를 시청했다.

[뭐어?!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다고?!]

화면에서 망나니 재벌 2세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라마 OST가 흘러나왔다.

“아이고 여기서 끝나면 어떡해!”

주부가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안타까워했다.

하여간 이 드라마는 사람 궁금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드라마도 끝났겠다 다른 채널을 틀기 위해서 리모컨을 찾던 때, TV에서 들리는 소리가 주부의 청각을 사로잡았다.

[후루루루룹!]

“어라?”

면빨을 들이키는 소리에 리모컨을 찾던 주부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됐다.

[허어]

[캬아]

국물을 마시고 시원한 소리를 내는 아이들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광대가 올라갔다.

자신의 아이들도 라면 먹을 때 저렇게 먹긴 했는데.

화면 속 아이들은 입 주위를 빨간 국물로 물들이고, 뻘건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며 매워했다.

그러면서도 라면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끝까지 손에서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탁, 탁

동시에 국물을 다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은 아이들이 서로를 보고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나, 한 그릇 더?]

[콜!]

아이들이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한 입만 더. 찐라면.]

아이들이 빨간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어머 이건 사야 해.”

멍하니 광고를 보던 주부가 자신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키며 지갑을 들었다.

“오늘 장 볼 땐 저것도 살까.”

이 주부와 같은 반응은 한 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 * *

“얘들아아아아!”

영훈오빠가 두 팔을 벌려 뛰어왔다.

저 오빠 왜 저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영훈의 모습에 미나가 아이들을 자신의 뒤로 보냈다.

까치발을 들고 미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영훈을 보고 입을 열었다.

“형 술 덜 깼어?”

“최근에 술자리는 없었을 텐데.”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면 내가 한 대 쳐 줄까?”

미나가 주먹을 위협적으로 들어 보였다.

정신 좀 차리라는 신호였다.

미나의 주먹을 본 영훈이 헛기침을 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흠.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찍은 광고 말이야. 효과가 좋다고 해서.”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사장님이 사장님 형수님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어.”

아니 사장님이 밖에서 함부로 통화할 사람이 아닐 텐데.

어떻게 그걸 들었대.

영훈 오빠 의외로 능력이 좋잖아?

“그것보다 오빠 우리가 부탁한 거는?”

“맞아. 그거 알아보러 간 거 아니었어?”

“아 참. 그랬지.”

갔다가 엉뚱한 데에 정신이 팔고 왔구만.

말은 제대로 했으려나.

이제 연차도 쌓이고 팀장 직함도 달았는데 영훈 오빠는 어째 변함이 없어 보여서 조금 걱정이네.

“얘들아. 너희 진짜 그거 할 거야?”

“응. 안 돼?”

“오빠, 안 돼?”

“안 되긴. 너희가 누군데. 이 형만 믿어. 방송국에 연락은 해 놨으니까 걱정 마.”

“오오! 멋져요 팀장님!”

“고 팀장님 멋져!”

“훗, 이 정도로 뭘.”

아이들의 추켜세움에 코가 높게 솟은 영훈이 음화화!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오빠를 믿어도 되는 걸까.

날이 지나도 허술해 보이는 매니저를 보고 아이들과 미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애니멀팜> 제작진은 전국에서 걸려오는 제보 전화에 숨 쉴 틈도 없이 바빴다.

“예? 고라니요? 고라니가 소 사료를 훔쳐먹는다고요?”

“네. 병원 협찬이요? 우선 메일 보내주시면 검토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불법 밀수에 관해서는 저희가 취재하고 있지 않아요. <그것이 궁금하다> 팀에 문의해 주시겠어요?”

온갖 문의, 제안, 제보 전화에 제작진들이 죽어나갔다.

동물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취재하는 팀이었기에 보통 제보를 받고 움직이지만 그중 태반은 촬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편집실에서 편집을 끝내고 온 메인 PD가 돌아왔다.

“PD님 살려주세여…!”

“으어어어어.”

“제보 들어온 게 별로야?”

퀭한 얼굴을 한 PD가 똑같이 퀭한 얼굴이 된 제작진들을 보고 힘없이 말했다.

“네에. 자기 개가 천재라느니, 말을 할 줄 안다느니 이런 게 막 들어와요.”

“지난주에 ‘엄마’라고 말하는 개 때문에 그런가 봐요.”

“PD님 조영욱도 제대했다는데 ‘개판시대’ 한 번 더 기획하면 안 돼요?”

“그건 안 돼. 지금 사회부 기자가 조영욱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사회부요?”

연예부도 아니고 웬 사회부?

예사롭지 않은 타이틀에 책상 위에 뻗어있던 작가들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그래서 안 돼. 불발탄일지라도 폭탄은 피하는 게 상책이잖아.”

“그럼 다음 주 촬영 때까지 괜찮은 거 있나 살펴볼게요.”

그때 예능국장이 볼록한 뱃살을 출렁이며 다가왔다.

어째 저 뱃살은 볼 때마다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요즘 잘나간다는 예능국장이 들어오자마자 <애니멀팜> 팀을 찾았다.

“허허. 다들 고생들이 많지?”

“아닙니다!”

“아니기는 나도 다 알아.”

국장이 격려하는 말에 핼쑥한 제작진의 얼굴에도 한 줄기 웃음이 걸렸다.

어찌 됐든 제작진들의 노고를 알아준다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네들이 고생할까봐 내가 촬영거리 하나 가져왔는데 말이야.”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저희도 제보받은 게 있어서.”

저번처럼 또 누굴 꽂는 건 사양,

“배우 오지한과 가수 오지연이 같이 사는 동물들이랑 출연하고 싶다더군.”

“감사합니다.”

…이지 않다!

국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메인PD인 김광진이 잽싸게 국장의 손을 잡았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제작진들은 자신의 귀에 들린 이름에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국장님이 뭐라고 하신 거지?’

‘오지한? 하하 내가 아는 오지한은 한 사람뿐인데. 또 누가 더 있나?’

‘동생이 배우고 누나가 가수라니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인데.’

‘그런데 우리 PD님이 왜 저렇게 좋아하시지?’

잠시 굳은 상태로 현실도피를 하던 이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경악했다.

유명한 명화 <절규>와도 같은 얼굴이었다.

“하하하. 그럼 다들 잘들해 보라고. 고 팀장 연락처는 알고 있나?”

“옙!”

방송가에서 할리우드 스타인 지한의 매니저의 연락처를 모를 리가.

아무리 자신들의 프로그램이 톱스타와 거의 연관이 없다고 해도 연락처를 받아놓는 거는 PD로서의 기본이었다.

“그럼 힘내보게. 하하하하.”

장 국장이 허허 웃으며 사라졌다.

“저 사람 요즘 애들이랑 친해졌다고 엄청 자랑하고 다니더라니.”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나도. 아니 지연이 인기무대 출연하는데 대기실 한 번 안내해줬다고 엄청 뻐기고 다니더니.”

“그런데 진짜였나 봐.”

국장이 사라진 자리에 <애니멀팜> 팀이 멍하니 서있었다.

* * *

물 들어온 김에 노 젓는다고 마땅한 제보도 없던 이들은 스타남매와 반려동물을 주제로 코너를 짜기 시작했다.

미팅을 위해서 탑엔터로 온 제작진은 로비에 걸린 소속 연예인들의 사진을 보고 촌놈처럼 구경했다.

“와. 진짜 오지한이다.”

“오지연도 있어.”

사진 중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남매의 얼굴이었다.

벌써부터 저렇게 눈에 확 띄는 얼굴이라니.

조금만 더 크면 따라다니는 소녀, 삼촌 팬들이 한 부대는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지금도 그렇지 않나?’

헤비하진 않았지만 자신도 아이들의 팬이었다.

항상 두 아이들이 잘 되기만 바라고 있는 라이트팬으로서 <애니멀팜> 제작진인 막내 PD가 폰을 꺼내 아이들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