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84/296)

“그러게. 우리만으로도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어떻게 관리해?”

두 사람의 업무가 작은 팀 하나 정도의 업무라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이 상체만 들어 전화를 받는 영훈을 보았다.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보양식 좀 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수호 형이 와서 다행이야.”

“맞아. 우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영훈 오빠를 위해서도 새 로드로 수호 오빠가 온 건 환영이지.”

지연이 자신들에게 새 로드가 배정되던 날을 회상했다.

지한의 차기작이 결정되고 방송국이랑 조율을 하느라 바빠진 영훈이 죽어갈 것 같아서 걱정하던 찰나 회사에서 추가 인원을 배치해줬다.

“안녕하십니까!”

군대를 막 제대했는지 일반인보다 짧은 머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향했다.

“인사해. 우리 팀에 배정된 로드. 앞으로 여기 있는 수호 씨가 너희들을 태우고 다닐 거야.”

“잘 부탁드립니다악!”

“예에.”

“네, 넵!”

군기가 빠지지 않은 것 같은 새 로드 매니저를 보고 아이들이 슬쩍 물러났다.

지한이는 누나의 뒤에 몸을 숨겼다.

저 아저씨 아직 군대물이 덜 빠진 거 같은데.

남매 옆에 서 있던 형석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자네 어느 부대 나왔나.”

“국제평화지원단에 있었습니다.”

“혹시 23특전대대?”

“단결!”

“단결! 여기서 후임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구만.”

같은 특전사 출신의 로드를 보자 형석이 눈을 빛냈다.

형석 아저씨 기분 좋아 보이네.

모처럼 잘 맞는 사람이 들어와서 그런가 봐.

전우애를 나누는 두 사람을 영훈이 말렸다.

“자자. 이제 인사는 된 걸로 생각하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엣!”

“너무 그렇게 기합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악!”

“됐다. 차차 나아지겠지.”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아니 로드를 왜 형석 씨가 잘 관리합니까.”

“하하. 같은 부대를 나온 전우 아니겠습니까.”

“나이 차가 얼만데.”

“하하하하하하하하.”

영훈의 말에 형석이 눈을 부릅떴다.

그 기세에 영훈이 한 걸음 물러나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의사항 전달 부탁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영훈 오빠 졌네.”

“졌어.”

딱 봐도 기세 싸움에서 진 모습에 아이들이 애잔한 얼굴로 영훈을 쳐다봤다.

그래도 힘내.

이제 운전은 안 해도 되잖아.

위로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힘내라, 고영훈!

아이들이 영훈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튼 그날 새 로드가 합류하고 나서 영훈 오빠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다음 주에 지연이 CF 촬영이랑 지한이 대본리딩이 있고. 이번 주에는 지연이가 음악방송에서 1위 후보. 지금까지 들어온 광고 건이 라면, 음료, TV….”

차 안에서 수첩을 들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영훈을 보고 아이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좋아진 거 맞겠지?

도리도리

아 몰라.

그래도 우리가 야간 촬영이 없는 게 어디야.

엔터업계에서 저녁 되면 깔끔하게 퇴근하는 것만으로도 복 받은 줄 알라 그래!

매드사이언티스트처럼 수첩을 보고 중얼거리는 영훈을 보면서 지연은 동생을 데리고 슬쩍 그에게서 멀어졌다.

* * *

덜덜덜덜덜

“오빠.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

“내가? 아니? 난 괜찮은데?”

눈 밑에 다크서클을 그렇게 달고 불안한 사람처럼 다리를 떨고 있는 주제에 어딜 봐서 괜찮다는 거야.

지연이 영훈을 비웃었다.

“다리 떨면 복 나간다고 할머니가 그랬는데.”

“형은 다리를 떨지 않았단다.”

방금까지 다리를 떨고 있던 주제에 아닌 척하기는.

그래도 오늘 저러는 게 전부 자신 때문이니까 지연은 못 본 척 넘어가주기로 했다.

안 그러던 사람이 신문을 뒤져가며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던 건 꽤 웃기면서도 감동적이었으니까.

물론 올해 고작 13살밖에 안 된 92년생 원숭이띠의 운세가 신문에 나와 있을 리는 없었다.

“지연아 언니가 엿 사왔는데 먹을래?”

“언니, 엿은 수험생들이나 먹는 거 아니야? 나는 1위 후보지 수험생이 아니야.”

“어, 어?”

“저는 떡을 사 왔습니다!”

“떡도 마찬가지예요.”

은주와 수호가 떨어져 나갔다.

지연은 이제 문 옆에 서서 평소보다 한층 더 무거운 분위기를 뿜고 있는 두 경호원들을 보았다.

“형석 아저씨랑 지은 언니는 뭐 없어요?”

“저희는 그저 제자리에서 맡은 임무를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끄덕

경호를 하는 게 아니라 누구 하나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긴 거 같은데요.

들어오던 스태프들이 하나같이 장판파를 지키던 장비를 뚫으려던 병사에 빙의돼서 문 앞에서 용건을 말하던데.

하여간 다들 유난이라니까.

똑똑

“지연 씨 대기해 주세요.”

문밖에서 스태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가 봐야지.

“누나.”

“응.”

“기다리고 있을게.”

허공에서 마주친 한 쌍의 눈동자가 믿음으로 빛났다.

자신의 선전을 믿어 의심치 않은 모습에 지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용기를 느꼈다.

그래. 내가 다름이 아니라 네 앞에서 쪼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누나만 믿어.”

“응!”

지한의 응원을 받은 지연이 대기실 밖으로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반만 묶은 머리. 귀여움을 위해 몇 가닥 뺀 옆머리. 웨이브를 넣은 머리끝.

가볍게 화장했음에도 선명하게 드러난 이목구비.

눈 밑에 붙인 별 모양 스티커.

최근 10대들 사이에 유행이라는 세일러복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고 하얀 니삭스를 신은 지연이 팔목에 남색 손수건을 감고 무대로 걸어갔다.

스카프 아래에 있는 붉은 자국이 박동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지한이도 보고 있겠지.

지켜봐.

네 누나가 무대에서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줄게.

잊지 못할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 무대는 정말 대단한 신인의 무대죠?”

“이제 신인이라는 말이 무색한데요? 가수 지연의 무대입니다.”

무대 아래에서 지연을 보고 있던 이들은 아직 반주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숨을 참고 있었다.

오늘따라 지연이가 한결 더 커다랗게 보였다.

착각인가?

평소보다 더 박력 있는 분위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무대에 스모그가 깔렸다.

♬♪♬

잔잔히 깔리는 반주에 약한 조명이 지연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눈을 내리깐 지연이 작게 속삭이듯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곁에 없던

내 곁엔

항상 네가 날 비추고 있었지♬

살랑이는 손길에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가 터질 것 같은 예감.

무대 아래에서 지연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근대는 가슴 위로 손을 가져댔다.

‘뭐야? 왜 이러지?’

그것은 기대감이었다.

기분 좋은 긴장감.

오늘따라 지연의 머리와 의상이 찰떡같이 잘 어우러지는 것 같고,

조명과 스모그마저 지연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지연을 응원하러 온 팬들은 똑같이 한쪽 팔목에 남색 손수건을 매고 주먹을 꼭 쥐었다.

점점 고조되는 멜로디.

빨라지는 리듬.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조명이 환하게 지연의 머리 위를 비췄다.

♬Be a STAR

저 하늘

Polaris

가장 빛나는♬

하얀 팔을 뻗으며 안무를 하던 지연이 무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봐

지금 저

하늘 끝

높이 뜬

관중들이 한마음이 되어 떼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돌의 팬들이었던 이들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지연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마이크 너머로 들려오는 팬들의 한목소리에 촬영장에 있던 스태프들도, TV로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모두 깜짝 놀라서 무대를 쳐다봤다.

지연의 눈 밑에 붙여져 있던 별 스티커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을 보고 웃으며 지연이 손가락을 뻗어 정면에 별을 그리고 머리 위를 가리켰다.

♬Polaris!

네 앞에 서 있을게-!!♬

꺄아아아아아아악!

지연! 지연! 지연! 지연!

<인기무대> 촬영장이 순식간의 지연의 콘서트장이 되었다.

하얀 팔을 뻗으며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 지연은 그녀의 곡처럼 가장 빛났다.

흥겨운 분위기에 관중석에 있는 모두가 팔을 휘두르며 지연의 노래를 따라불렀다.

지난 한 달 동안 어딜 가나 들렸던 지연의 곡이었다.

모든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후렴구는 모두 알았다.

♬Be a STAR

지금 이 순간

Polaris

가장 빛나는♬

지연의 노래와 관객들의 목소리가 한데 모여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다른 가수들과 매니저들이 고개를 저었다.

“저걸 어떻게 이겨.”

♬Twinkle STAR

나를 바라 봐줘-!!♬

와아아아아아아아!

지연! 지연! 지연! 지연! 지연!

지연이 관객석을 보고 윙크를 날렸다.

* * *

무대를 마친 지연의 귓가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이 들었다.

“하아. 학.”

온 힘을 쏟아낸 무대였다.

오늘은 진짜 잘한 거 같았다.

반주가 끝났음에도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지연의 옆으로 1위 후보 가수들이 모였다.

“SBC 인기무대 이번 주 1위는 지연의 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와아아아아악!!

폭죽과 함성이 터졌다.

오늘따라 기분 좋은 예감이 들긴 했는데 눈앞에서 진짜 1위를 할 줄이야.

지연의 1위 소식을 들은 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날뛰었다.

“지연아 축하해!”

“축하해!!”

“1위 축하해! 계속 함께 가자!”

기뻐서 소리 지르는 사람.

감격에 벅차 엉엉 우는 사람.

울면서 손수건을 묶은 팔을 흔드는 사람.

모두 난리였다.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자신이 진짜 1위를 했다는 현실감이 들어서 지연의 눈에서 삐질 눈물이 새어나왔다.

지연의 앞으로 MC가 마이크를 가져갔다.

“어어.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진짜 고생이 많았던 탑엔터 언니 오빠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팬 여러분 감사하고요, 사랑하는 제 하나밖에 없는 가족, 지한아. 응원해줘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어. 그리고 오늘 생일인 사장님! 축하드려요! 제 선물 어때요? 저 1위 했어요.”

눈물이 맺힌 지연의 눈가가 반짝였다.

“네. 지연 씨 축하드리고요. 이제 1위를 받은 곡의 앵콜무대를 함께 보실까요?”

시간관계상 짧은 수상소감을 들은 MC들이 다음 멘트를 쳤다.

꽃다발을 전달하고 나온 지연이 무대 중앙에 섰다.

흩날리는 꽃가루 속에서 지연은 마이크를 쥔 손을 들었다.

* * *

[…사랑하는 제 하나밖에 없는 가족, 지한아. 응원해줘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어. 그리고 오늘 생일인 사장님! 축하드려요! 제 선물 어때요? 저 1위 했어요.]

“최고야.”

TV에서 들리는 지연의 수상소감에 주민이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자꾸 눈물이 나오네.

눈가에 손을 가져간 주민이 코를 훌쩍였다.

“닦으십시오.”

옆에 있던 남 비서가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받아 눈가를 찍은 공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가자! 오늘 우리 지연이가 1위 했는데 내가 이러고 있을 순 없지! 고기라도 쏴야겠어!”

“그건 고 팀장이 알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법인카드를 들고 갔으니 알아서 할 겁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오늘 가실 데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이런.”

오늘 자신의 생일이라고 한남동에 가기로 했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애들을 두고 가야 하다니!

피눈물이 흐르는 심정으로 주민이 부들부들 떨었다.

“회장님이 애들도 같이 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네. 회장님도 오늘 방송 보신 것 같습니다.”

남 비서의 말에 주민이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과연 아버지인 공 태산 회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와, 아버지 문자도 쓸 줄 아시네.

[오늘 지연이 1위

한 거 잘 봤다.

애들도 데리고 와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