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데?”
집으로 온 아이들은 씻고 거실에 나왔다.
오늘 하루 누나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싫었는지 지한은 계속 지연의 옆에 착 달라 붙어있었다.
지연은 동생이 내민 대본을 보았다.
“<햇살마을 수비대>? 드라만가?”
“나는 이거 재밌었어. 누나는 어떤지 한 번 봐줘.”
“지한이 네가 재밌었으면 재밌는 거겠지.”
“그래도 누나가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좋아.”
“알았다.”
지연이 대본을 살폈다.
종이가 빠르게 넘어갈 때마다 지연의 눈이 흥미로움으로 빛났다.
“시트콤 같은 느낌인데. 캐릭터 확실하고, 줄거리 좋고, 흥미진진한데?”
“그치? 이거 보고 재밌을 거 같았어.”
“만화 찡구가 생각나긴 하는데 확실히 재밌어. 그리고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니. 지한이한테 딱이네!”
“나 이거 하고 싶어.”
“좋아. 지한이 네 또래랑 같이 촬영하는 거는 처음이지?”
“응. 그래서 무척 떨려.”
“아마 그 친구들도 너랑 같이 촬영한다고 하면 엄청 떨릴걸?”
“왜?”
“지한이 네가 너무 잘해서. 애들이 기죽으면 어떡하지?”
“에이. 뭐야. 히히히힛.”
지연이 대본을 덮고 동생을 간지럽혔다.
오늘 하루 혼자 있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왕!
냐아
아이들이 꺄르르 웃자 각자 집에 들어가 있던 인절미랑 모짜가 다가왔다.
금세 사람과 동물이 한데 엉켜 거실 바닥을 뒹굴었다.
푹신한 러그 위에서 색색 숨을 쉬는 사람과 동물이 발라당 널브러졌다.
“누나 앞으로 누나 촬영할 때도 나 꼭 데려가. 알았지?”
“알았어. 그런데 음악방송은 어어엄청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아?”
“얼마나 오래 기다리는데?”
“아침 일찍 가서 저녁 늦게까지?”
“뭐하는데?”
“리허설 하고 인사하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에이. 나 촬영할 때랑 다를 게 없네.”
“그런가?”
“응! 나 이제 대기하는 것도 잘 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꼭 같이야. 약속했어!”
“알았다.”
나도 이렇게 떨어져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오늘 혼자 대기하니까 어찌나 심심하던지.
누워있는 아이들에게 영훈이 다가왔다.
“얘들아. 자자.”
“오늘은 누나랑 같이 거실에서 잘래.”
“어이쿠. 알았다. 이불 가져 올게.”
영훈이 방으로 들어가 여분의 이불을 가져왔다.
“형도 같이 자.”
“형석 아저씨도?”
“미나 누나도.”
“뭔데. 왜 다 모이게 하는 거야.”
“아니이. 그냥. 얼른.”
영훈이 수상하게 아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형석과 미나를 데려왔다.
“그래. 뭐 하는데 우릴 불러?”
“아아니. 그냥 거실에서 같이 자자구. 형석 아저씨도 오늘 고생하셨구요. 미나 언니두 고생했구.”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아구구구. 언니 죽겠다아.”
미나가 이불 위로 드러누웠다.
그동안 내 무대 때문에 의상 구하고 옷 만든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오늘 내 무대 보고 기뻐 날뛰었단다.
“형석 아저씨. 이제 지한이 촬영하고 제 촬영 계속 따라다닐 텐데 잘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영훈 오빠. 들었지?”
“그래. 내 고생길이 훤히 열린다는 소리 들었다. 그래서 지한이가 네 촬영 따라다닐 거라고? 그리고 지한이도 촬영? 뭐야, 어떤 대본인데?”
척하면 척이라고 영훈은 아이들이 작품을 골랐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히힛. 이거!”
“알았다. 내일 회사 가서 바로 제작진 미팅 잡으라고 할게. 같이 출연했으면 하는 배우 있어? 아니면 PD라도.”
“나는 어떤 사람이든 다 괜찮아.”
“알았다. 형이 알아서 할게.”
“지한이도 작품 들어가니?”
“응! 이거!”
“좋아. 이 누나한테 맡겨.”
일 끝나자마자 또 일이라는데도 미나의 눈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진짜 너 다시 활동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코디북을 얼마나 만들었는지 알아? 지한이 네가 입으면 딱일 텐데 다른 애들이 잡아채는 거 보고 얼마나 눈물 흘렸는데! 키즈랜드에서 넘어온 제의가 다른 애한테 갔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아쉬웠다고!”
“언니 진정해.”
“누나 내가 잘못했어.”
“아니야.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고, 다만 지한이 네가 입으면 얼마나 더 멋있었을까 안타까워서 그런 거야.”
“응응. 나 이제 이것저것 다 할게.”
“고맙다. 지한아.”
“왜 형이 고마워해?”
미나에게 한 말에 영훈이 반응했다.
지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영훈을 보았다.
“네가 그동안 CF며 잡지 촬영이며 아무것도 안 해서 제안 거절할 때마다 너무 힘들었거든. 이제 안 그래도 되잖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알지. 그래도 연예인이라면 모름지기 CF를 찍어야 하지 않겠어? 이제 지연이도 있으니까 너희 둘한테 들어오는 모든 CF를 검토할 수 있단 말씀.”
거절하느라 엄청 고생했나 보다.
영훈 오빠가 저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보네.
지연은 가수실 소속이지만 영훈은 지연의 일에 한정해서 가수실 일을 겸업하고 있었다.
나중에 지한이가 노래를 하게 될 지도 모르니 미리 배워야 한다나?
왠지 현실성 있는 이유라 다들 납득했다고 한다.
“오빠. 나 내일 라디오.”
“그래. 눕자. 다들 어서 잡시다.”
선풍기에서 나온 바람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만큼은 인절미랑 모짜까지 아이들 머리맡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 * *
지연은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했다.
할리우드 스타의 누나라는 타이틀로 알려진 지연은 음악방송과 라디오 출연 등을 통해서 서서히 홀로 서고 있었다.
이제는 여기저기서 지연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타이틀 곡 외에도 앨범에 있는 다른 곡들까지 덩달아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늘은 라디오에 출연하기 위해서 KBC에 와 있다.
“오늘 저희 라디오에 엄청 핫한 분이 와 주셨는데요. 안녕하세요, 지연씨?”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지연입니다.”
“네에.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은 괴물 같은 분이시죠. 요즘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네. 제 팬카페에 많은 분들이 가입하셨더라구요.”
“세상에. 벌써 팬카페가 있어요?”
“팬카페가 생긴 지는 꽤 됐어요.”
“데뷔 전부터 팬카페가 있었어요?”
“동생 덕분에 방송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생겼어요.”
“아, 저 알아요. <사람극장>이죠?”
“맞아요.”
DJ가 지연의 첫 방송을 언급했다.
그때 동생을 챙기던 아이가 이렇게 커서 데뷔를 했다니.
라디오 부스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듣고 있던 시청자들도 감개무량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많이 컸네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거 같아요.”
“그런가요?”
“이번에 로 데뷔하셨는데 다른 곡들도 너무 좋더라구요. 잘 듣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신경 써서 준비했어요. 회사 분들과 함께 1년 동안 준비했거든요.”
“어쩐지. 이렇게 한 곡 한 곡이 명곡이다 싶었더니.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아, 그건 지한이 때문이에요.”
“네? 지한이라면 오지한 배우 말인가요?”
“네 흐흣.”
지연의 웃음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 DJ가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우리 시청자분들도 궁금해서 돌아가시겠어요.”
“지한이가 제 앨범 준비하는데 한 곡이라도 놓칠 수 없다면서 어엄청 신경 써서 곡을 골랐거든요. 지한이한테 반려당한 곡이 꽤 많을 거예요.”
“이런! 직원 분들이 엄청 속상했겠네요.”
“그래도 뭐라 할 수 없었던 게 지한이 덕분에 모든 곡들이 타이틀곡처럼 잘 나왔거든요. 도 지한이가 고른 곡이에요.”
“요? 저 그 곡 좋아해요! 그걸 우리 애가 골랐다니.”
우리 애? 저 DJ언니도 플래닛인가?
어쩐지 심장이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뛰었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떠는 DJ를 지연은 조용히 지켜봤다.
“아! 이런 제가 게스트분을 두고 추태를 부렸네요.”
“아니에요. 저도 여기서 플래닛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흠. 저 플래닛 아니에요.”
“저 마칠 때 지한이가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플래닛 맞습니다. 정말 데리러 오나요?”
“글쎄요?”
“이런 제가 당했군요. 이 빚은 지연 씨의 노래로 갚으셔야겠어요. 노래 부르실 준비가 됐나요?”
“네. 어떤 곡을 부를까요?”
“ 부탁드립니다.”
이왕 플래닛이라고 들킨 것 뽕을 뽑아 보자라는 심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지연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노래를 준비했다.
부스 밖에 있는 PD의 신호에 반주가 틀어졌다.
♬♪♬
♬I don’t know
where to go
어디로 가야할지
내가 무얼 하고픈지
I can’t find my way
보이지 않아
어둠 속에서 헤매이고 있어♬
옆에서 DJ가 이를 악물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시청자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와는 다른 강렬한 비트였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거친 파도.
그 파도를 해치고 길을 떠나는 모험가.
격렬한 드럼 반주가 치고 나왔다.
♬Pathfinder
날 이끌어줄 단
한 줄기의 빛
pathfinder
누구도 가지 않은
나만의 길
걸어가
부딪쳐
해낼 거야
My Way♬
부스 밖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헤드폰을 끼고 있던 이는 눈을 감았다.
첫 앨범부터 이렇게 멋지고 다채로운 곡들을 담았다니.
벌써부터 다음 활동이 기대되었다.
지연의 곡을 듣는 모든 이들이 직감했다.
앞으로 지연이 가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길 거라고!
76. 팬입니다.
“미쳤어.”
차 안에서 지연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던 영훈이 눈을 감았다.
“형, 어때? 누나 잘 부르지.”
“그래. 진짜 잘 부르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곡이 끝났다.
모두 여운에 빠져 있을 때, DJ가 힘겹게 멘트를 쳤다.
[정말…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네요. 지연 씨 정말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는 어떤 곡인가요?]
[이 곡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 대한 곡이에요. 저는 제 또래도 그렇지만 어른들도 가끔 뭘 하고 싶은지 모를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저도 가끔 일 열심히 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이제 뭐 하지? 하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가 있어요.]
[다들 바쁘고 힘들게 살잖아요? 뭘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찾아내길 바라는 노래에 담아봤어요.]
[어쩐지. 제가 집에 있을 때 이 노래를 틀어놓을 때가 많아요. 한참 기분 좋게 노래를 듣고 있으면 문뜩 제가 할 일이 떠오르더라구요.]
[감사합니다.]
영훈과 지한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노래도 잘하는데 지연씨가 잘하는 게 더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흐흣, 뭘까요?]
[바로 그림! 그림도 잘 그리신다면서요?]
차 안에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영감을 주었던 누나의 는 진짜 대박이었어.
사장님이 그거 사서 사장실에 걸 거라고 했는데 누나가 거절했었지.
누나가 그 그림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봐 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도 그 그림은 사장실이 아니라 더 큰 데서 많은 사람들이 봐 줬으면 좋겠어.
“지연이 그림을 다른 사람들도 봐야 하는데.”
“누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던걸?”
“그게? 헨리 교수님이 그 말을 들으면 당장 비행기 타고 날아올 거다.”
“형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전시회도 좋고 뭐, 그림을 보여줄 방법이야 알아보면 많지 않을까?”
“헨리 선생님한테 도와달라고 해.”
“그럴까? 교수님께 조만간 또 연락 드려야겠네.”
전시회는 어떻게 여는 거지.
갤러리 쪽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아봐야겠네.
아니면 내가 직접 물어볼까?
예전에 미술관 관계자들 연락처를 내가 받아 뒀었나?
영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차 문이 열렸다.
드르륵
“으헉! 깜짝이야.”
“다녀오셨어요?”
“네. 그리고 영훈 씨. 제가 나가면 차 문을 잠그라고 했을 텐데. 왜 문이 그냥 열립니까?”
“죄송합니다.”
형석이 지한이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누가 보면 프로포즈라도 하는 줄 알았겠지만 이건 지한이가 누나의 라디오 출연을 축하하는 선물이었다.
“고맙습니다, 형석 아저씨.”
“별 거 아니었습니다.”
지한의 심부름을 다녀온 형석이 차에 올라타고 문을 잠갔다.
품에 꽃다발을 안은 지한이 영훈에게 물었다.
“형! 누나 언제 끝나?”
“조금 더 있다가 끝나면 바로 갈 거야.”
“DJ누나한테 사인해줘도 돼?”
“네 팬인 거 같던데 괜찮겠지.”
“히힛. 좋아!”
“지한이가 출현하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겠습니까.”
“후다닥 가서 픽업해 올 겁니다.”
방송국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것은 좋았지만 너무 달라붙었다.
이미 차기작이 정해졌다고 하는데도 끊임없이 들러붙는 이들은 좀비 같았다.
<바이러스> 촬영 때 본 좀비들이 한국까지 넘어온 줄!
영훈이 진저리를 쳤다.
어쩐지 팀장님이 내가 팀장이 된다고 했을 때 묘하게 후련한 얼굴이더라니.
이런 고생을 예견하고 계셨던 게 틀림없다.
[…이런 벌써 시간이 다 됐네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가수 지연 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차! 끝났나 보다.”
“형! 빨리 누나 데리러 가요!”
“그래그래.”
형석이 지한이에게 모자를 씌웠다.
* * *
지연은 정말 착실하게 스케줄을 따랐다.
이 시절 음악방송은 야외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기도 했는데 그러면 꼼짝없이 지방으로 가서 대기해야 했다.
“지연아 이번 주는 다행히 실내란다.”
“살았다.”
야외는 변수가 많았다.
음향이며 관객이며 날씨며.
특히 이 더운 날에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
한여름에 땡볕에서 야외촬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