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조심해서 내려가고. 너무 빨리 가면 안 된다 알았지?”
“네에!”
“네에!”
“혹시 넘어졌을 때 어디가 아프면 바로 말해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아저씨.”
“다들 안전수칙은 다 숙지했겠지.”
“넵! 사장님.”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 그럼 즐겁게 놀아라.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아이들이 편하게 놀 수 있도록 뒤를 따라가며 지켜볼 생각인 주민이 아이들의 어깨를 쳐주었다.
지켜줄 사람이 보고 있다는 말에 남매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활짝 웃었다.
* * *
“애들 잘 타네요.”
“그러게.”
전화가 와서 잠시 옆으로 빠진 주민과 영훈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보고 평가했다.
“저번에 스키 강사님이 애들 너무 잘 타서 처음인데도 중급자에 가보지 않겠냐고 그랬습니다.”
“안 되지.”
“옙. 그래서 다음에 오면 중급자로 타겠다고 했습니다.”
“잘했어.”
영훈의 보고를 들으면서 주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쉬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군. 이러다가 몸살 나겠어.”
“저번에도 근육통 때문에 힘들어 했었죠.”
“뭐? 당장 불러와.”
“아, 옙!”
영훈이 아이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막 다 내려온 아이들이 영훈을 보고 천천히 다가왔다.
“형, 왜 불러?”
“무슨 일 있어?”
“너희들 잠시 좀 쉬고 타라고.”
“우리 더 탈 수 있는데!”
“맞아.”
“뭐라도 먹고 하라고. 벌써 12시다.”
“어. 그러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벌써 해가 머리위에 떠 있는 시간이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시간을 자각하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꼬르르르
“배고프지?”
“…응.”
“형 우리 라면! 라면 먹자.”
“그래. 알았다. 역시 미리 챙겨오길 잘했네. 짐 찾아올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네!”
영훈이 가방을 맡긴 곳으로 걸어갔다.
지연이 맛있는 냄새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보는 쪽을 쳐다본 주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배고파?”
“네.”
“배고픈데도 더 타고 싶다고 한 거야?”
“그때는 안 고팠는데.”
꼬르르르
이놈의 소리를 왜 계속 나는 거지.
지연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럼 라면 먹기 전에 매점에서 뭐라도 살까?”
“그래도 돼요?”
“뭐가 먹고 싶니?”
“저거 먹어보고 싶어요.”
지연이 힘겹게 손을 들어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자. 미나랑 형석이 곧 내려올 테니까 다 오면 가자.”
“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주민을 지연이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고글을 써서 잘 보이지 않지만 지연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주민이 아이의 분홍색 모자에 손을 얹었다.
지한이 옆에서 우물쭈물했다.
“저도 저거 먹고 싶은데에.”
“당연히 지한이 몫도 사 줘야지.”
“히힛. 사장님 좋아요!”
내 동생.
먹을 거에 저렇게 쉽게 넘어가도 되는 걸까.
동생을 걱정했지만 결국 자신도 먹을 거에 넘어간 거랑 다를 게 없다며 지연이 고개를 숙였다.
“얘들아아!”
미나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다가왔다.
저 언니 저렇게 체력이 약해서 어떡하지.
몇 시간 동안 리프트-보드-리프트-보드를 반복하기에 미나의 체력은 형편없었다.
“더 일찍 쉴 걸 그랬나?”
“굳이 미나 코디가 따라나선 걸 누굴 탓하겠나.”
“미나 누나. 완전 약해.”
이제는 형석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고 있는 미나를 보며 주민과 아이들이 하하 웃었다.
65. 지연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젠장. 에릭 녀석은 왜 여기 데리고 온 거야?”
스키복을 입고 있었지만 고글을 위로 올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음침한 사내가 다리를 떨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무언가를 움켜쥐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남성은 누가 봐도 스키를 타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럴 게 아닌데. 빨리 가서 뒷부분을 작곡해야 한다고.”
남성이 손톱을 물어뜯을 것처럼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도톰한 장갑 덕분에 손톱을 물어뜯지 못한 남성이 참지 못하고 허밍을 했다.
“흐흐흠- 흐흥.”
허밍이 이어질수록 남자의 표정은 더더욱 험악해졌다.
벌써 1년 가까이 풀리지 않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뭉개고 넘어갈 때 그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려왔다.
“그거 아닌데.”
“그러니까. 이상해.”
“왜 저렇게 부르지?”
지나가는 아이들의 말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매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도 모르는 것들이 뭐라고! 내가 누군 줄 알아?”
“몰라요.”
“누군데요?”
“이…!”
돌아보니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다.
동양계로 보이는 아이들을 본 매튜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보기에 흔치 않은 미모에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지닌 남매에게 소리 지르는 대신 매튜는 손을 들어 아이들을 쫓아냈다.
“됐다. 너희들 부모에게나 가라.”
“아저씨. 방금 그거 왜 그렇게 불렀어요?”
“생각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곡이 흐리멍텅하지.”
“누나 말이 맞아요. 귀에 안 들어와요.”
“이렇게 부르면 더 재밌는데. ‘나나나-나-나나-나나’ 어때?”
“음 나는 ‘나나나-나나-나-나나’ 이게 더 좋은 거 같은데.”
“지한이 네 것도 좋다.”
“히힛. 정말? 그래도 역시 누나가 부른 게 좋아.”
“아니야. 네게 더 좋은 거 같아.”
“누나 거가 더 좋아.”
매튜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가 부른 멜로디가 더 좋았다고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남매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동안 막혔던 영감이 샘솟듯이 다가왔다.
“녹음, 녹음기가. 아니야. 악보? 젠장 펜! 펜 어딨어?”
매튜는 자신이 들은 멜로디를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 장치를 찾다가 현재 자신이 빈손이란 것을 깨닫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가락을 세워 바닥에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누나 저 아저씨 이상해.”
“잘은 모르겠지만 음악 하는 사람인가 봐.”
“무서워.”
“원래 예술가 중에선 영감이 찾아오면 앞뒤 안 가리는 사람이 있어.”
“리온처럼?”
“응. 리온처럼 자기만의 세상이 있는 사람들이야. 아무튼 저 아저씨는 내버려두고 우린 오빠한테 가자. 기다리겠다.”
“응.”
아이들이 멀어졌다.
바닥에 앉아 눈밭에 악보를 그리고 있는 매튜는 아이들이 떠난 줄도 몰랐다.
“됐어! 됐다고! 얘들아, 고마,”
풀리지 않던 실마리를 풀어낸 매튜가 환희에 차 소리 질렀다.
자신에게 영감을 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던 매튜는 그 자리에 아이들이 없는 걸 보고 두리번거렸다.
“헤이. 매튜. 이게 뭐야. 자네 괜찮아?”
“에릭.”
“그래. 이 악보. 지금 자네가 그린 거야? 역시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니까.”
“아니야.”
“뭐?”
“뮤즈가.”
“뮤즈?”
“내게 뮤즈가 찾아왔어.”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이상한 소리를 하는 자신의 친구를 보고 에릭이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나타나 막힌 부분을 뚫어주고 간 아이들을 본 매튜는 자신이 음악의 신 뮤즈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어이. 매튜? 어-이.”
“오오. 신이시여.”
“이 친구 더 이상해졌구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매튜를 보고 에릭이 고개를 저었다.
악보를 보니 슬럼프를 잘 넘긴 모양인데 이전보다 더 이상해진 것 같았다.
* * *
리조트에서 1박 2일 머물면서 즐겁게 논 아이들은 완전 퍼졌다.
아이들이 퍼졌으니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노는 것도 적당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 하루 동안 푹 쉰 일행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디지니월드에 방문했다.
누가 디지니를 좋아하는 아이들 아니랄까봐 아이들은 노래까지 부르면서 하루 종일 놀이공원에서 놀았다.
정말이지 지치지 않는 체력이었다.
“그래도 진이 빠지도록 놀아서 그런지 지금 푹 자네요.”
“우리도 진이 빠져서 문제지….”
영훈과 미나가 퀭한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짝-!
주민이 박수를 쳐 두 사람의 주의를 모았다.
“다들 조금만 힘내. 우리가 이 일정을 짠 이유를 잊은 건 아니겠지?”
“후, 후후. 물론입니다 사장님.”
“걱정 마세요. 이 일 때문에 몰래 나가서 물건을 공수해 왔다구요.”
“좋아. 그럼.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자.”
크리스마스이브에 놀이공원이라니.
어마어마한 인파를 해치고 나왔던 어른들이 일제히 형석을 돌아봤다.
“잘 부탁합니다. 신형석 경호원.”
“알겠습니다.”
“형석 형님. 내일 꼭 깨워주세요. 알 일어나면 발로 차도 좋습니다.”
“진짜 찹니까?”
형석의 두꺼운 허벅지를 본 영훈이 고개를 들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저는 오빠처럼 때리지 말고 차라리 물을 부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일어나는 겁니다. 아시겠죠?”
“사장님 벌써 오늘이 됐습니다.”
“…오늘 새벽에 여기로 모이는 겁니다.”
“네.”
“네에.”
그렇게 어른들끼리 작당모의가 끝나고 다들 방으로 들어갔다.
* * *
“흐아암.”
어제 디지니월드에서 격하게 논 것 때문일까.
지연은 잠은 깼으나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강철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의 몸으로도 잠을 떨치지 못하는 걸 보면 진짜 열심히 논 모양이다.
“히으응.”
동생도 깬 것 같다.
아마 밥 달라는 생체 신호 때문이겠지.
“배고파?”
“흐으응.”
“일어나자.”
지연의 말에 지한이 눈도 못 뜨고 꼼지락거렸다.
수면욕과 식욕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것 같았다.
힘든 싸움을 하는 동생을 위해서 지연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침대위에 앉았다.
꿈뻑, 꿈뻑
몇 번 눈을 깜빡여 뻑뻑한 눈을 움직인 지연이 몸을 틀어 동생의 상체를 일으켰다.
누나의 손을 따라 몸을 세운 지한이 눈도 못 뜨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자, 내려가자.”
“히잉.”
잠투정이 심한 걸 보니 밥 먹고 다시 재워야 할 상 싶었다.
지연이 동생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펑!
퍼퍼펑!
“메리 크리스마스.”
“얘들아,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입니다.”
잠에서 막 깨 침실을 나선 아이들 앞에 어른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반갑게 인사했다.
깨자마자 이게 무슨 상황이래?
잠이 덜 깨 비몽사몽이었을 지한마저 어른들의 환영에 잠이 다 깬 얼굴이었다.
“자, 선물 안 받을 거니?”
“어어.”
주민이 지연에게 떠넘기듯이 선물상자를 안겨 주었다.
“자, 내 거도 받아.”
“여기. 포장 예쁘지? 언니가 직접 했어.”
“더 좋은걸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한이도 받아.”
“이거 주려고 우리가 오늘 엄청 일찍 일어났다고.”
“제가 깨웠습니다만.”
“어머. 형석 씨. 그건 비밀이에요.”
“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에 선물상자가 한가득이었다.
이거 왜 나한테 주는 거지?
아직 사태파악을 하지 못한 지연의 얼굴을 본 주민이 헝클어진 지연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착한 아이는 선물을 받는 날이잖아? 마음에 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