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69/296)

“그럼 집에 가서 백신이랑 더 놀까?”

그 대답을 기다린 지한이 활짝 웃었다.

“응!”

“좋아. 그럼 집에가서 또 놀자.”

<바이러스>에서 백신이 끝났다면 영화에서 다 보여주지 않은 백신을 불러오면 된다.

지한이 백신을 조형하면서 만든 과거가 있으니 그걸로 대사 몇 줄 쓰면 되겠지.

그렇게 백신으로 조금 더 놀다 보면 동생이 그를 놓아줄 날이 올 것이다.

지연이 다리를 까닥이는 동생을 보고 스케치북을 들었다.

“지연아 차 안에서 그림 그리면 눈 나빠진다.”

“잠시마안.”

“어두워서 안 돼.”

칫.

몇 글자만 끄적이려고 했더니.

가로등 조명으로도 금방 쓸 수 있는데.

지연이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순순히 스케치북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동생이 옆에서 실망하는 게 느껴졌다.

“너희들은 촬영이 끝났는데도 또 연기하고 싶어?”

“재밌으니까.”

“지한이도 아직 더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도 오늘은 좀 쉬자.”

“그래. 아까 감독님 말 못 들었어? 크리스마스 잘 즐기랬잖아. 우리도 이제 놀자.”

“하지만 오늘은 25일이 아닌 걸?”

“후훗.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걸?”

미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언니는 또 왜 이래?

“그래.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는 좀 즐기자. 작년에는 연말시상식에 참가한다고 제대로 못 놀았잖아.”

영훈의 말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했으니 쉬긴 해야지.

한국에 돌아가면 온천에 갈까?

저번에 갔을 때 좋았는데.

“그럼 우리 온천 가면 안 돼?”

“지연이는 온천이 좋니?”

“응. 추운 건 싫어.”

“그럼 스키장 가는 건 취소해야겠다.”

“우리 스키장 가?”

“지연이 네가 추운 게 싫다니 어쩔 수 없지.”

아니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가.

추운 거 싫은 거랑 스키타고 노는 거랑은 다르지.

저번에 갔을 때 보드를 배웠던 지연은 혹시나 영훈이 스키장을 취소할까봐 운전석에 바짝 다가갔다.

“안 돼! 취소하지 마.”

“지연이 넌 추운 게 싫다며.”

“보드 타면 더워지니까 괜찮아.”

스노보드는 재밌었다.

처음 하는 겨울 스포츠에 지친 줄 모르고 놀았다가 다음 날 근육통을 앓긴 했지만 그것도 좋았다.

지연에게 겨울이란 꼼짝도 못하고 이불 속에만 있어야 했던 계절이니까.

“그럼 스키장 갈 거지?”

“응응!”

“누나 나도 보드 탈래.”

“이번에는 지한이도 타 볼래?”

“응. 나 잘 탈 수 있어.”

저번에는 스키만 탔던 지한이 이번에는 누나와 같이 보드를 타고 싶다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 백신을 보내고 싶지 않다며 또 연기놀이를 하려던 아이들이 금세 태도를 바꿔 놀러가겠다고 하는 모습에 차에 타고 있던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가자. 가. 숙소 가면 너희들 깜짝 놀랄 거다.”

영훈이 차를 몰았다.

초조한 마음에 오늘따라 늦게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훈이 주차를 하자마자 아이들이 벨트를 풀고 뛰어나왔다.

“뛰면 안 돼!”

“네에!”

“네!”

대답은 잘 했지만 전혀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아이들이 신발을 벗었다.

불을 켜자

“어서 와.”

주민이 편한 차림으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4. 변화

“사장님!”

“사장니임!”

아이들이 주민을 보고 반갑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공 사장을 보고 아이들이 주민의 품에 안겼다.

안 본 사이에 조금 묵직해진 아이들을 받아든 주민이 아이들을 꼭 끌어안았다.

“사장님 여기 어떻게 왔어요?”

“사장님 우리랑 같이 놀러가러 온 거예요?”

지연이 예리하게 질문했다.

촬영 끝나고 갑자기 언니랑 오빠가 스키장 가는 얘기를 하더라니.

어쩐지 미묘하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런 일을 숨기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 곧 크리스마스잖아. 너희들이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왔지.”

“정말요?”

“크리스마스는 연인이랑 보내는 거 아니에요?”

“지연아, 그 말 누구한테서 들었니.”

“로한 감독님이 그랬어요. 크리스마스에는 가족이랑 연인이랑 같이 보내는 거라고.”

“그래. 그래서 너희들이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왔어.”

“사장님 가족이랑 안 보내구요?”

“우리랑요? 제시카 이모는요?”

아이들이 가족과 연인과 함께 보내는 날임을 알면서도 자신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새러 왔다는 주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랑 같이 있으면 사장님 가족들은 어떡해.

“괜찮아. 괜찮아. 대신 가족들이랑은 연말에 같이 보내기로 했어.”

“그냥 집에 가는 게 좋지 않아요? 가족들이랑 보내는 게 더 좋을 텐데. 물론 우리는 사장님이 스키장 같이 가는 게 좋지만.”

“너희를 만나고 처음으로 제대로 쉬는 크리스마슨데 같이 안 놀아줄 거야? 저번에 너희들끼리 계곡 가서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데.”

“그치만 사장님은 바쁘잖아요.”

“맞아.”

투정 섞인 아이들의 말에 주민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너희들이 더 바빠질 텐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네? 왜요?”

“저도요? 지한이는 이해하지만 저는 왜요? 전 안 바쁜데.”

“다들 너희들 언제 돌아오는지만 기다리고 있더라.”

“누가요?”

“너희들 팬들이.”

주민의 말에 아이들이 입을 벌렸다.

“팬이요?”

“지한이 너는 돌아가면 바로 팬미팅 열어야겠던걸? 팬카페 가입인원이 벌써 8만명이래.”

“우와아!”

다른 연예인들 팬클럽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8만 명이란 숫자가 얼마나 큰 숫잔지는 안다.

큰 숫자에 지한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지연이 너도 팬카페 생겼어.”

“저요? 한이 말고 제가요?”

“그래. 너도 1만 명이나 되더라.”

생뚱맞게 나온 팬카페의 존재에 지연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직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모르는 지연을 보고 주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는 나중으로 하고. 너희들 밥부터 먹을까?”

“네에!”

“좋아요!”

“케이터링 서비스 불렀어.”

“케이터링?”

“음. 쉽게 말해서 집에 뷔페를 차렸단다.”

“우와아!”

“뷔페에!?”

“자, 얼른 씻고 와.”

“네!”

“넵. 누나 얼른 가자.”

아이들이 손을 잡고 욕실로 사라졌다.

남매가 사라지고 나서야 주민은 미나와 영훈, 형석과 애런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다들 제대로 비밀을 지킨 모양이군.”

“넵!”

“갑자기 사장님이 오신다고 해서 많이 놀랐습니다.”

“모처럼 크리스마스 아닌가. 지한이도 마침 촬영이 일찍 끝났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지.”

“그렇군요. 안 그래도 차에서 스키장 얘기를 꺼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잘됐군. 애런은 함께 못 가겠지?”

“네. 저는 일이 있어서요.”

“아쉽게 됐어. 그럼 밥이라도 먹고 가지.”

“초대해 주신다면 감사히 참석하겠습니다.”

“우리 애들을 챙겨줬는데 당연히 초대해야지.”

“훈과 미나도 있습니다만.”

두 사람의 대화에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이름에 영훈과 미나가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도 당연히 같이 먹는 거지. 고 매니저 영상 고마웠어.”

“옙! 아닙니다. 미나 코디가 카메라를 들고 온 덕분에 찍을 수 있었습니다.”

“미나 코디도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찾아 침실로 갔던 영훈과, 카메라를 들고 온 미나 덕분에 좋은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뷔페를 즐길 자격은 충분했다.

“씻고 왔어요!”

“고기! 고기!”

대충 물기를 닦고 와 촉촉한 손을 든 아이들이 고기를 외치며 다가왔다.

“자, 다들 밥 먹자고.”

* * *

소고기로 파티를 한 다음날.

모두 짐을 싸고 숙소를 나섰다.

이 숙소는 애런이 알아서 정리해 줄 것이고, 이제 우리는 스키장으로 갈 거다.

“지한이는 이번에 보드 탈 거라면서?”

“네! 맞아요.”

“혼자 잘 탈 수 있겠어?”

“저번에 스키도 혼자 탔어요. 보드도 잘 탈 수 있어요.”

“그래. 힘들면 말하고.”

“네에.”

지한이 발을 동동 흔들었다.

“지연이 너는?”

“전 저번에도 보드 탔어요.”

“스키보다 보드 타는 게 더 재밌어?”

“둘 다 좋은데 스키는 손에도 뭘 들고 있어서 불편해요.”

“그런 이유였니?”

“손이 자유로워야 지한이 도와 줄 수 있잖아요.”

지연의 말에 주민이 아이를 돌아봤다.

부모가 그딴 것들이라 그럴까.

지연은 자기가 엄마가 된 것처럼 동생을 돌보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있으면 지연이는 또 연예계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겠지.’

주민은 어떻게 하면 지연이가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주변에 의지가 되는 어른이 생기면 좀 나아질까?

미나와 영훈의 보고를 들어보면 숙소에서나 촬영장에서나 지연의 손이 안 가는 곳이 없었다.

촬영장에서는 도시락

숙소에 와서는 식사와 피부 관리, 마사지, 연기 연습 등등

매니저인 영훈, 코디인 미나, 경호원인 형석이 붙어있었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도 의지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도움 받는 걸 계산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돌려주고 있었다.

‘이번 여행 동안 지연이의 마음을 움직여 보자.’

주민이 결심했다.

차가 서서히 스키장으로 향했다.

* * *

일행들은 스키장이 있는 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누가 재벌 2세 아니랄까봐 주민이 잡은 숙소는 최상층이었다.

넓은 방에 짐을 푼 아이들이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형, 누나, 아저씨, 사장님. 빨리빨리.”

“얼른 나와요. 얼른.”

“얘들아 잠시. 열쇠랑 지갑이랑 휴대전화랑.”

“왜 그렇게 많이 들고 가?”

“그거 다 주머니에 넣고 가게?”

일하러 왔지만 맘 놓고 놀 수만은 없는 영훈이 아이들을 달랬다.

“아무리 놀러 왔다지만 급한 연락이 있으면 받아야지. 너희 놀고 뭐 안 먹을 거야? 지갑 두고 가?”

“먹을 거야.”

“잊은 거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내려가자.”

“응.”

“알았어.”

영훈뿐만 아니라 미나와 사장님도 챙길 게 한가득이었다.

지연이 옆에 온 형석을 보고 물었다.

“아저씨는 뭐 안 챙겨요?”

“저는 이미 다 챙겼습니다.”

도대체 뭘 챙긴 거지?

평평한 주머니를 보고 지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와아!”

“신난다!”

미나와 영훈이 아이들 손을 한 짝씩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렌탈샵에서 장비를 챙긴 이들이 새하얀 설원 위로 섰다.

“리프트 타고 싶어요.”

“그래. 어른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네.”

“잠시만요. 그 전에.”

형석이 뛰어가려는 아이들을 저지했다.

또 한 번 계곡에서 있었던 장면이 재연됐다.

이번에는 주민도 함께였다.

“가볍게 타는 거야. 알았지?”

“히히. 알고 있어요.”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해.”

“네에.”

지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커다란 고글과 모자를 써 아이의 하얀 머리카락이 완전히 감춰졌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새하얀 공간 속에서 지한이를 찾기 쉽지 않았겠지.

누나와 함께 진한 분홍색 모자를 쓴 지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 가자.”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길, 주민의 양옆에 앉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발을 움직였다.

미나와 영훈의 시선도 무시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 게 뿌듯했다.

계곡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스키장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리프트 조금 빠른 거 같지 않아?”

“응. 한국보다 조금 더 빠른 거 같아.”

“그러니?”

“사장님은 어때요? 빠른 거 같지 않아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장님인데 몰라요?”

“내가 여기 사장은 아니잖니. 내가 모르는 것도 있단다.”

“그렇구나.”

발아래 펼쳐진 높은 침엽수를 보고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곧 리프트에서 내린 아이들이 뒤이어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