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크리스와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을 하고 온 지한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오늘은 감정 소모가 심한 씬.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무려 이 영화의 거대한 악과 주인공이 맞붙는 씬이었으니까.
“지한아 괜찮아?”
“으으응.”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늘어졌다.
피곤해하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오늘은 일찍 자. 내일 촬영도 오후잖아.”
“으으으.”
점점 더 어눌해지는 대답에 지연이 동생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누나아.”
“왜.”
“노래 불러줘.”
“잠 안 와?”
“히이잉.”
피곤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는데 잠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크리스와 했던 연기가 인상 깊었던 건지.
모처럼 촬영하면서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까 쉬이 잠이 안 들 만했다.
지연이 동생의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고요한 어둠 아래
달님이 떴어요.
잘 자라 우리 아가.
조용한 이불 속에
요정이 찾아왔어.
자장자장 우리 아가.♬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어두운 침실을 수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심되는 목소리로 부른 자장가에 지한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서서히 꿈나라로 가는 동생을 보면서 지연이 토닥이는 손을 점점 느리게 움직였다.
♬꿈속에서 만나면
즐겁게 놀아요.
어서 와 함께 놀자.
달님이 활짝 웃죠.
이제 헤어질 시간
안녕 내일 또 만나♬
자장가가 멈췄다.
색-색-
동생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지연이 순식간에 잠든 동생을 보고 조용히 웃다가 옆에 누웠다.
그 모습을 문틈 사이로 반짝이는 렌즈가 찍고 있었다.
63. 놀러가자.
한밤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각.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온 술 냄새를 풍기며 주민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극장>을 방영했던 KBC의 사장과 술자리를 가지고 온 주민이 힘들게 중얼거렸다.
“영감 거 많이도 마시네.”
KBC사장이 주민을 놓지 않고 붙잡은 이유가 있었다.
최근 들어 사극을 제외한 드라마 시청률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사람극장>이 할리우드 스타를 등에 업고 드라마 시청률을 압살해 버렸으니 지한의 섭외를 위해서 주민을 붙들고 늘어진 것이었다.
“후우.”
소파에 몸을 늘어트린 주민이 깊은숨을 뱉었다.
그가 토해 낸 숨에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넥타이를 풀 힘도 없었다.
똑똑
“누구야.”
“접니다, 사장님. 남 비서입니다.”
“들어와.”
늦은 시각에 그가 집까지 왜 왔단 말인가.
주민이 고개를 바로 들고 허리를 세웠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 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주민에게 다가왔다.
“드십시오, 사장님.”
남 비서가 숙취해소 음료를 내밀었다.
이런 걸 가져오다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음료를 단숨에 들이켜고 남 비서가 건넨 물 잔까지 받아 마신 주민이 고개를 털었다.
“무슨 일이야. 일 끝났으면 퇴근할 것이지 뭐하러 집까지 찾아와.”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국에서?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즉각 보고하라고 했으니 원, 미국은 시차가 문제야.”
남 비서는 잠시 주민이 정신을 차릴 동안 기다린 다음 그가 허리를 바로 세우자 동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에서 아이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침대에 누워있는 지한과 앉아서 동생을 토닥이는 지연의 모습에 주민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고요한 어둠 아래
달님이 떴어요.
잘자라 우리 아가.]
어둠 속에서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에 주민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긴장이 풀리고 꿈속으로 초대하는 목소리에 주민은 끝까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달님이 활짝 웃죠.
이제 헤어질 시간
안녕 내일 또 만나]
노래가 끝나고 지연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벌써 끝난 노래에 주민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사장의 명령에 남 비서가 다시 동영상을 재생했다.
달칵
동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떤 기교도 들어가지 않고 순수한 목소리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순식간에 재생이 끝났다.
주민이 남 비서를 부르지 않고 직접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달칵
달칵
달칵
그렇게 10번을 들었을까.
주민이 드디어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이거 지연이가 부른 거지.”
“네.”
“가수실에서 난리가 나겠네.”
이만한 노래를 부른 아이를 안 데려갈 리가.
지연의 의사를 존중하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가수실로 데려오려고 난리일 거다.
“사장님 특이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이거 아무래도 지연이가 직접 만든 노래인 것 같습니다.”
“뭐?”
미국 자장가가 아니란 말이야?
주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나 모르니 한 번 더 확인하고. 내일 A&R팀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불러.”
“네.”
“얼른 퇴근해.”
“알겠습니다.”
남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 노트북을 든 채 방을 나갔다.
“내일 회의하려면 얼른 정신 차려야겠네.”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씻기는커녕 넥타이를 풀 힘도 없던 주민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내일 일찍 회의를 잡았지만 욕실로 들어가는 주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아침 일찍 소집되었음에도 A&R팀은 불만 하나 없었다.
아니, 올 때까지만 해도 퀭한 얼굴로 웬 회의냐며 걸어 들어왔지만 남 비서가 틀어준 동영상 하나로 모든 불만이 날아갔다.
“어때?”
“어떠냐고요? 이게 정말 지연이가 직접 만든 거란 말입니까?”
“그래. 남 비서가 열심히 알아봤어. 이 멜로디는 지연이 독창적으로 만든 거야.”
“이건, 이건!”
“사장님. 지연이는 천재입니다!”
“알아.”
당연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듯이 주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연이는 작곡을 한 번도 안 배웠을 텐데 어떻게 이런 노래를!”
“그 정도로 대단한가?”
“멜로디는 단순합니다. 자장가니까요.”
“그럼 대단하지 않다는 건가?”
“아니요. 잘 들어보세요.”
A&R팀장인 황남수가 동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지연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다시 들어도 좋은 목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포근하게 풀렸다.
“들으셨습니까?”
“들었지. 지연이 목소리는 정말 좋군.”
“그게 아닙니다.”
“아니, 지금 우리 지연이 목소리가 안 좋다고 말한 건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이 노래 처음과 끝이 매끄럽게 연결됩니다.”
“그래서?”
“한 곡을 반복해서 들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말이죠. 즉 이 1분짜리 짧은 곡이 수백 분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복재생!
전주도 후주, 간주도 없었기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황 팀장의 지적에 여기 있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 지연이 작곡 공부시켜보죠.”
가수실과 배우실뿐만 아니라 A&R팀에서도 지연을 탐내기 시작했다.
일찍이 지연의 곡 선별 능력을 눈여겨보던 팀장이 보석 같은 인재를 보고 다시 탐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팀에도 말했지만 뭐든 지연이 의사가 제일 중요해.”
“앗. 그럼 제가 말이라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런 것도 안 돼. 아이의 선택에는 어떤 개입도 있을 수 없다.”
주민의 단호한 눈빛에 황 팀장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안절부절못했다.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아이가 이 정도 멜로디를 짜냈다.
아이의 머릿속에 또 어떤 멜로디가 있는지 궁금했다.
“일단 넌지시 말해보도록 하지. 아무래도 1월이 아니라 더 일찍 미국으로 가야겠어.”
“꼭! 꼭! 부탁드립니다.”
“그래. 본부장에게 업무지시 내려놓고 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본부장에게 보고해.”
“넵!”
“그럼 이 곡 저작권이랑 기타 잡무는 황 팀장이 수고해줘.”
“알겠습니다.”
“남 비서. 연말까지 일정을 모조리 당겨야겠어. 내가 꼭 필요한 일은 모조리 가져와.”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상기된 얼굴로 회의실을 나섰다.
주민의 출국이 앞당겨졌다.
* * *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손바닥에 불이 나게 박수를 쳤다.
숯검댕이가 묻은 크리스
피 칠갑을 한 지한
좀비 분장을 한 보조 출연자들
두껍게 옷을 껴입고 장비 앞에 서 있는 스태프들
모두가 힘내서 영화 <바이러스>를 촬영했다.
그리고 오늘 그 촬영이 끝났다.
대규모 장면이 꽤 있었음에도 빨리 촬영을 끝낼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지한의 역할이 컸다.
그가 촬영하는 장면은 10테이크를 넘지 않았으니까.
“지한. 너와 함께 촬영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저도 정말 좋았어요.”
“다음에도 나와 같이 해주겠나?”
“음. 대본 보고요.”
“프하핫. 역시 한은 제대로 된 배우라니까. 암. 배우라면 대본을 보고 선택해야지.”
“아마 감독님이랑 다음에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이거 힘내야겠구만.”
로한 감독이 호쾌하게 웃었다.
다음 작품도 저 배우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거 절 빼고 말하시면 섭섭합니다.”
“오. 크리스 자네도 그동안 수고했어.”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크리스와 로한이 손을 마주잡았다.
“한, 다음에도 나와 함께 해 줄 거지?”
“감독님한테도 말했는데요. 대본이 좋으면요.”
“물론이지. 역시 잘 배웠다니까.”
“선생님이랑 누나가 배우는 작품을 보고 선택해야 한다고 했어요.”
“맞는 말이야. 다른 조건을 따지면 결국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못 하게 되지.”
“크리스가요?”
“명성이라는 건 때로는 독이 될 때도 있어. 조심하렴.”
“네!”
아직 지한은 명성이라느니 다른 조건이라느니 그런 건 잘 몰랐다.
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누나랑 사장님이 할 수 있게 해 줬고, 누나가 고르는 작품은 하나같이 재밌었다.
‘어른이 되면 다른 조건도 신경 써야 하는 걸까?’
나중에 누나한테 물어봐야겠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이번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세요.”
“감독님은요!”
“하하 난 편집실에 틀어박혀야지.”
하하하하하
촬영장이 화기애애했다.
크랭크 업 됐음에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 모두가 영화의 결과를 좋게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제일 첫 관객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현장을 느낄 수 있는 스태프들은 확신했다.
이 영화로 미국 좀비 영화의 판도가 바뀔 거라고!
* * *
분장을 지우고 의상을 반납한 지한이 차에 올라탔다.
“오늘도 힘들었지?”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제는 괜찮아.”
“고생 많았어. 이제 백신도 끝이네.”
지연의 말에 지한이 씩씩하게 있다가 풀이 죽었다.
“왜 그래?”
“백신이랑 더 놀고 싶어.”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게 싫은 모양이다.
<오싹한 집>에서 동자귀로 나왔을 때도
<그 남자 그 여자>에서 성진으로 나올 때도
에서 리온으로 나왔을 때도
동생은 캐릭터들과 헤어지는 것을 슬퍼했다.
그럴 때마다 지연은 동생을 달래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