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고생이 많아. 이상한 기자도 있었다면서.”
“네. 저번에 보고 드렸던 그런 기자들도 있죠.”
“그놈들이라면 내가 알아서 처리했으니 됐고, 다음에도 그런 놈들이 있으면 명단 작성해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든든한 사장을 둔 본부장이 후련한 얼굴을 했다.
연예계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기자가 약이 될 때가 있었지만 독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소속 배우와 가수들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이번에는 아이들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주민이 단호하게 대처했지만
그 행동으로 기자들이 탑엔터 소속 연예인들을 건들 때 조심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잘된 일이었다.
“아, 그런데 사장님. 지연이는 뭐로 데뷔시키실 건가요?”
“그야 당연히.”
배우?
‘지난번에 곡 선택하는 능력도 장난 아니던데. 조수경 선생님한테 성악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지? 이거야 원, 뭘 해도 다 잘하니 뭐로 데뷔시킬지가 걱정이군.’
둘 다 할 수 있지만 가수로 데뷔하느냐, 배우로 데뷔하느냐에 따라서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 결정 날 것이다.
또다시 어느 소속으로 하느냐로 싸울 직원들을 떠올린 주민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연이 선택을 따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잠시. 벌써 전달하게?”
“무려 지연이잖습니까.”
지한이 못지않은 스타가 될 재목이다.
어느 팀이 지연이를 가지느냐는 그 팀의 실적과 관련된 일이니 다들 난리가 나겠지.
‘물론 돈 말고도 지연이를 누가 데려가느냐로 싸울 이유는 충분하지.’
너희 팀에는 지한이 없지?
라고 외치면서 지한이한테 받은 간식을 자랑하던 2팀 직원들을 떠올린 본부장이 입에 미소를 띠우고 사장실을 나섰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 같았다.
* * *
곧 회사에 불어 닥칠 폭풍을 모른 채, 할리우드에 있는 이들은 평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지한의 촬영은 순조로웠으며, <사람극장> 팀도 촬영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기에 카메라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촬영과 적절한 휴식이 섞인 일정을 소화하며 아이들은 편안하게 일상을 즐겼다.
“아저씨, 아저씨! 저기요. 우리 저기 가 봐도 돼요?”
“네. 어딜 가는지 저한테 물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나가 어른들한테 우리 어디 가는지 꼭 말하고 다니라고 했는데.”
“그건 맞는 말입니다. 제가 잘 따라갈 테니 지한군은 편하게 다니시면 됩니다.”
형식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 앞에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한 것이 보여서 지연이 웃음을 삼켰다.
다 큰 어른이 어린 애 눈치를 보는 것이 신기했다.
“그럼 우리 저기 갈게요.”
“네.”
촬영하지 않는 날이라도 일이 있는 어른들을 두고 아이들은 형석만 대동한 채 집 근처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
땅덩어리가 넓은 동네라 그런지 공원도 무지하게 넓었다.
탐험을 하듯이 아이들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형석은 아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주변을 경계하면서 뒤를 따랐다.
…찍,
“?무슨 소리 안 들려?”
“나도 들었어.”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찍!
어? 위쪽에서 들린 것 같은데.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찌익!
하늘에서 다람쥐가 떨어졌다.
62. 데뷔시켜 주세요!
찰싹!
하늘에서 떨어진 다람쥐가 지연의 얼굴 위로 착지했다.
“지연아!”
“누나!”
형석이 깜짝 놀라 지연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사람만 경계했지 아이들이 예상치 못한 동물의 습격을 받을 줄 몰랐다.
아니, 습격 맞나?
당황하는 두 사람을 두고 안면으로 다람쥐를 받은 지연이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다람쥐를 두 손으로 감쌌다.
찍?
“너 뭐야.”
“다람쥐다.”
“미국 다람쥐도 한국 다람쥐랑 다를 거 없군요.”
“그런데 얘 왜 내 손에 가만히 있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지 얌전히 지연의 손 위에서 털을 고르고 있는 다람쥐를 보고 지한과 형석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누나 나 만져 봐도 돼?”
“응. 어차피 내 애완동물도 아닌데 상관없어.”
“고마워!”
지한이 조심스럽게 다람쥐의 머리로 손가락을 가져댔다.
다람쥐는 서서히 다가오는 손가락을 보고도 이를 드러내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토옥
“우, 우와아아!”
“야생동물에겐 어떤 병균이 있을지 모릅니다. 너무 많이 만지지 마시고, 돌아가면 바로 손 씻죠.”
“알았어요. 지한아 조금만 만져.”
“응응!”
이미 다람쥐의 따끈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넋을 놓은 동생은 제대로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람쥐와 놀고 있는 모습을 본 형석은 하나둘씩 모여드는 시선에도 차마 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쉬는 날이기도 했고, 지연마저 볼을 물들이며 다람쥐를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경호원들에게 더 경계하라고 해야겠군.’
아이들이 알지 못하게 경호하고 있던 이들에게 형석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보고 거리를 두고 있던 경호원들이 경호망을 좁혔다.
사람들의 시선에 예민한 지연은 점점 자신들을 보는 이가 늘어나자 동생에게 말했다.
“이제 다람쥐 집에 보내주자.”
“아. 응.”
누나의 말에 지한이 아쉬워했지만 누나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지한이도 점점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까운 나뭇가지 위에 다람쥐를 올려준 지연이 동생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사람들이 다람쥐에게 한눈을 판 사이 그 자리에서 벗어난 지연이 뒤를 돌아보는 동생에게 말했다.
“지한아 동물 키우고 싶어?”
“어. 그래도 돼?”
“네가 하고 싶으면 언니랑 오빠한테 부탁해 볼게. 이제 우리 동물 정도는 키워도 돼.”
우리가 버는 수입이 그 정도는 될 거다.
정확하게는 지한이 버는 거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에밀리한테 그림을 팔 때 조금 더 높은 가격을 부를 걸 그랬나?
‘아니야. 이름도 없는 화가의 작품을 영화에 사용했다는 걸로 그 정도 값을 치러줬으면 고맙게 여겨야지.’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낸 지연이 물었다.
“지한이는 뭘 키우고 싶은데?”
“난 다 좋아!”
“다 좋지만 한국에서는 개랑 고양이가 제일 많으니까. 둘 중에 하나로 고르자.”
“응! 좋아. 히힛. 뭉치 엄청 귀여웠는데.”
“그래. 뭉치 같은 애를 데려올까?”
“뭉치 좋아. 데려오려면 어떻게 해? 사야 돼?”
“사는 게 아니라 입양하거나 분양받아 올 거야.”
“가게에서 사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런 데는 나쁜 곳이니까 안 돼. 그리고 너무 애기부터 키우는 건 힘들걸?”
“왜?”
“아기를 키우는 건 힘들거든. 재우고 먹이고 씻기고 예방접종도 맞혀야 해.”
“그런 거야?”
“지한이 너도 그렇게 컸어.”
“그렇구나.”
동물을 데려오는 올바른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지연을 형석이 신기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도대체 지연은 어떻게 저런 걸 알고 있는 걸까?’
아직까지 동물을 입양한다거나 분양받는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였다.
애견인이나 캣맘, 애견훈련사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시대에 어른들도 잘 모르는 것을 동생에게 알려주는 지연을 보고 형석이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지연은 정말 뛰어난 아이였다.
HJ그룹의 경호팀에 있던 자신을 아이들의 개인 경호원으로 붙인 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역시 대단해. 지연이가 대학까지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룹에 필요한 인재가 될 거야.’
HJ그룹의 경호팀에서 일하면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받은 형석의 머릿속에는 지연이란 인재를 그룹에 영입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탑엔터 직원들이 들었으면 절대 뺏기지 않을 거라며 경계를 할 생각이었지만 형석은 지연의 뛰어난 점을 볼 때마다 뿌듯한 얼굴로 아이를 지켜봤다.
“그래서 지한이는 뭐 키우고 싶은데?”
“나는….”
* * *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지한은 몇 번의 씬 외에는 모든 장면을 테이크 하나로 끝내 모두의 감탄과 경악을 받았다.
오늘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 우드와 촬영이 있는 날.
이 영화의 주연인 그의 촬영 스케줄은 매우 바빴기에 지한은 겨우 끝에 가서야 그와 같이 촬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말은 즉, 이제 지한이 촬영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 된 LA 그곳에서 할리우드 탑스타인 크리스 우드와 지한이 촬영장에서 마주쳤다.
“안녕? 네가 지한이라면서?”
“네! 안녕하세요!”
할리우드 스타치고는 구설수가 거의 없는 그.
미래에는 히어로 영화에 출연해 리벤져스를 이끄는 주역들 중 한 명이 된다.
밖을 잘 돌아다니지도 않던 오지연의 귀에도 들렸던 유명한 영화의 출연자.
직접 만난 그는 영화 속 배역보다 훨씬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배우였다.
예전에 같이 촬영했던 잭슨과 소피아 역시 유망한 배우였지만 크리스는 이미 완성된 탑스타였다.
“몇 살이야?”
“10살! 아, 그러니까 미국 나이로는 8살이요.”
“8살? 초등학생이란 말이야?”
크리스가 생각보다 많은 지한의 나이를 듣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맞아요. 그런데 학교는 안 다녀요.”
“그렇구나. 대단한데? 지한이 할리우드에 데뷔한 건 몇 년 전 아니야?”
“네!”
“얼른 네 연기를 보고 싶은걸? 촬영장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동양에서 천재 배우가 나타났다고.”
“아닌데. 나 천재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다 천재라고 하는데?”
“하지만. 난 천재 아닌데. 누나가 천잰데.”
“누나?”
“저어기.”
지한이 손가락을 들어 지연을 가리켰다.
크리스는 이미 연기의 신이 될 거라고 평가받는 아이가 가리키는 여자아이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딱 봐도 지한의 보호자로 온 이들 옆에 있었는데 누가 봐도 지한의 누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 미모를 지니고, 어린아이답지 않게 얌전히 앉아 돌아보는 동생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아이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누나!”
지한의 부름이 지연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크리스! 내 누나예요.”
“안녕하세요. 지한이 누나예요.”
“안녕? 난 크리스야. 이름이 뭐니?”
“오지연이요.”
“지한이가 누나를 자랑하던데 자기보다 연기 더 잘한다고.”
지연이 동생을 돌아봤다.
방송에서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그렇고.
동생은 허구한 날 자신을 자랑하고 다녔다.
그 덕분에 피곤한 일이 끊이질 않았다.
요즘 들어 오빠랑 언니가 계속 배우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형석 아저씨도 은근슬쩍 HJ그룹을 자랑하고 다녔다.
다들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키워야 할 애가 아직 9살, 아니. 이제 10살밖에 안 됐는데.
“그냥 지한이 연습 도와준 거 가지고 그러는 거예요. 제 동생이 더 잘 해요. 완전, 엄청, 매우.”
“그러니? 연습 어떻게 하는데?”
“누나가 막 이것저것 그려요. 그럼 거기에 맞춰서 역할 놀이 하는 거예요.”
“그런 걸로 연기가 돼?”
“왜 안 돼요?”
크리스는 못하냐는 시선에 그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의 방식인가.
“지한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러니까 지한이 말을 대신하자면 먼저 제가 어떤 인물을 그려요.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을 그린다거나 경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나 책을 읽고 있는 사람 같은 걸요.”
“그렇구나. 그리고?”
“그러면 지한이가 상상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직업은 뭐고, 지금 어떤 상황이고, 성격은 어떨지.”
“흥미롭네.”
“저는 놀이의 방식으로 지한이가 캐릭터를 설정하고 연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좋은 연기를 하려면 캐릭터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니까요.”
지연의 말에 크리스가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대단한데? 누가 알려줬니?”
“트레이너 선생님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저희는 원래 그렇게 놀았어요. 지한이가 뮬란 좋아하거든요.”
“뮬란?”
“디지니 몰라요?”
“어, 어? 알지.”
“거기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잖아요.”
그런 것도 모르냐면서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지연을 보고 크리스는 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디지니를 졸업한지 꽤 됐고, 아직 결혼도 안 해서 아이도 없다.
여자친구가 있지만 그녀와 디지니를 볼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그렇게 지한이만의 뮬란을 만드는 거예요. 어느 배역에는 어떤 뮬란을 쓸지 정하는 건 지한이죠.”
“뮬란이 뭐니?”
“음. 캐릭터?”
“아, 오케이. 이해했어.”
아이들의 언어는 어렵구나.
지연의 적절한 통역을 들으면서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의 연습방법은 흥미로웠다.
자신도 해보고 싶을 만큼.
“우리 누나 대단하죠?”
“그래. 정말 대단해. 나중에 나도 같이 ‘놀이’를 할 수 있을까?”
참가 요청에 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한이 방긋 웃으며 크리스를 환영했다.
“좋아요! 크리스도 같이 놀아요.”
“고마워, 파트너.”
“파트너?”
“같이 노는 동료잖아.”
“동료. 좋아요!”
자신들의 놀이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동료에 지한이 주먹을 꼭 쥐고 좋아했다.
같이 좋아하는 놀이를 공유할 사람이 나타나 들떠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친구.’
동생의 반응을 보면서 지연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역시 동생에게는 또래 친구들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워낙 기자들이며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다녀서 홈스쿨을 하고 있긴 했지만 미국이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했다.
이 문제는 영훈오빠랑 한 번 진지하게 말해봐야겠어.
초등학교 중에서도 예술초가 있으려나?
“지연, ‘놀이’ 할 때 꼭 지연의 뮬란을 보여줘.”
크리스가 손을 건네며 말했다.
그의 단단하고 두꺼운 손을 보고 지연이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지한이 동료라면 잘 대해줘야지.
이 영화에 와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 * *
늦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