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몇 달러죠?”
“어, 음. 그러니까.”
“100억이면 1000만 달러도 안 들걸요?”
“저예산입니까?”
애런이 진지하게 물었다.
한국 영화가 저예산인 게 아니라 할리우드가 돈을 많이 쓰는 거다.
지연이 어마 무시한 할리우드 스케일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 * *
하나둘 오늘 촬영할 배우들이 모였다.
대규모 인원인 데다가 폭발씬까지 있는 터라 오늘 촬영은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지한은 주요 배역 중 하나인 백신(V)의 역으로 캐스팅되었지만 다른 주연 배우와 접점이 많지는 않다.
후반에 가서야 정체가 밝혀지는 역할이라 오늘 촬영 역시 지한이 이끌어야 했다.
“다들 준비됐지?”
“네!”
“좋아. 그럼 갑시다!”
레디, 액션!
황량한 대지.
풀마저 고개를 햇빛 아래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땅 위에 죽은 자들이 몸을 끌고 멈춰 서 있었다.
백신은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었다.
터벅, 터벅
죽은 자들 사이에 순백의 천사가 걷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광경을 보면서 티 없이 맑게 웃었다.
“흠, 흠♬”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구역질이 날 만큼 두려운 곳에서 오직 V, 혼자만 생기가 넘쳤다.
“컷! 좋아요. 이다음. 폭발 준비됐어?”
“네. 준비됐습니다.”
“자, 다들 폭발음이 들리면 그쪽으로 가는 겁니다. 카메라를 지나치면 멈추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액션!”
감독의 신호와 함께 다음 장면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폭탄까지 사용하기에 더더욱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장면이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들려오는 폭발음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서 있던 좀비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폭탄이 터진 곳으로 좀비들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뛰었다.
넘어지는 이, 부딪치는 이, 괴성을 지르는 이들이 한데 모여 움직였다.
“컷! 흐음. 우선 한 번 더 뛰어볼게요. 거기 빨간 스카프 하신 좀비분. 뛸 때 백신 앞을 너무 많이 가려요. 조금 더 사선으로 뛰어가세요. 넘어지시는 분들은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서로 밟지 않게 조심합시다.”
“넵!”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제 위치로 가 주세요.”
대규모 장면이다 보니 자잘한 실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로한 감독의 지휘 아래, 모두가 다시 제자리로 향했고 2번째 테이크가 시작되었다.
“정말 할리우드는 대단하네요.”
멀찍이 물러서 있던 <사람극장> 카메라맨과 작가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보고 감탄했다.
한국에서도 쉽지 않은 장면이었다.
전쟁이나 그런 영화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영화를 찍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도 역시.”
“오지한 배우는 눈에 띄네요.”
촬영장을 지배하는 이는 두 사람이었다.
스태프과 배우들을 조율하는 것이 감독이라면 지한은 현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과연 수많은 존재들 사이에서도 쉬이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이었다.
카메라가 움직이고 있을 때는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존재처럼 보이다가, 테이크가 끝나고 카메라 앞에 와서 자신의 연기를 볼 때는 한 명의 배우로 보이고, 또 누나가 있는 곳에 손을 흔들 때는 잘생긴 아이로 보였다.
어떻게 아이에게서 여러 가지의 얼굴이 보이는 것인지.
배우들은 다 저런 건가?
아니,
“작가님, 오지한 배우는 다른 배우들과는 뭔가가 다른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방송국에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을 보았던가.
그중에는 전국의 누나팬들을 보유한 최정상 가수도 있었고, 이제 막 데뷔한 신인도 있었다.
인기를 얻고 거만해진 이들도 있었으며, 몇 년째 무명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오지한에게는 존재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무언가가.
‘그건 저기 있는 누나도 마찬가지지.’
가끔 두 아이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역시 할리우드 배우는 다른가 봐.”
아이들이 받고 있는 가호의 정체를 모르는 작가는 한국과 할리우드의 차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61. 얘들아 언제와.
배우 오지한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탑엔터에서 식을 만하면 대중들에게 떡밥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배우 오지한, 할리우드 스타 ‘크리스 우드’와 촬영 중]
[2003년 기대작 <바이러스>]
[KBC ‘사람극장’ 오지한편 11월 11일 방영 예정]
짧은 기간이었지만 알차게 장면을 뽑아낸 <사람극장> 제작진은 잠도 줄여가며 편집에 힘썼다.
국장이 또 한 번 시청률의 기적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마침 수능도 끝났겠다 거리낄 것이 없는 KBC에서는 빠르게 오지한 편을 방영하고 싶었다.
“세상에 할리우드 촬영 장면을 볼 수 있다니.”
“우리가 그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는데.”
지한의 다큐를 기다리는 이는 비단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배우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방송이었다.
좋은 참고 자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탑엔터에서는 지한의 다큐를 회사에서 배우들과 함께 보기로 했다.
“세상에 월드컵 이후로 처음이네요.”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곧 연말이라서 더 바쁠 걸.”
“하하하하. 그 말만 안 하셨어도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하루에도 몇 십, 몇 백 건의 전화가 걸려온다.
특히 지한을 담당하고 있는 배우2실은 하루 종일 전화기만 붙잡고 있어야 해서 결국 대규모 채용을 해야 했었다.
나날이 초주검이 되어 가는 직원들을 위한 공 사장의 특단의 조치였다.
“사장님은 내년 1월에 출국하시죠?”
“그래. 바쁘겠지만 지한이도 중요하니까.”
지한의 촬영 일정은 내년 1월까지 예정되어있다.
하지만 빠른 촬영 덕분에 잘하면 올해가 지나기 전에 촬영이 끝날지도 모른다.
주민은 아이들이 귀국하기 전, 휴식을 주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돌아다니기 힘든 점을 고려해 아예 미국에서 놀고 올 작정이었다.
‘지난 번 계곡에는 못 갔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이번에는 꼭 같이 놀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연초까지의 일정을 미리 처리하고 있는 주민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합니다.”
커다란 화면에 <사람극장> 첫 출연 때 나왔던 환한 얼굴의 지한이 보였다.
그때의 소제목은 ‘부모 없는 하늘아래.’
이번 소제목은 ‘별이 되다.’
제목부터 할리우드를 겨냥하고 있는 말이었다.
티 없이 맑게 웃고 있는 지한의 사진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전환.
“안녕하세요!”
화면에 머리가 옅은 노란색으로 물든 지한이 나타났다.
“세상에.”
“우리 지한이 머리가, 머리가!”
“근데 너무 예쁘다. 지한이 요정 같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저렇게 하느라 약을 얼마나 썼을지.”
연예계 종사자들이라 그런지 지한이의 파격적인 머리색에 금방 적응한 이들이 곧 아이의 두피 건강을 걱정했다.
파격적인 시작으로 등장한 지한이 염색을 위해 헤어샵에 갔다.
빨간 머리의 헤어 디자이너와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은 지한의 옆으로 카메라가 다가갔다.
[PD: 왜 염색하는 거예요?]
“아, 다음 작품 때문에요.
[PD: 가발을 쓸 생각은 안 했나요?]
“조금이라도 더 그 배역이 되고 싶었어요. 가발을 쓰면 내 머리가 아니니까 왠지 거슬릴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어요!”
염색을 하는 지한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배역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독한 약으로 머리를 염색하는 지한을 보고 탑엔터 배우들이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저렇게 어린 애도 열심히 하는데.”
“배역을 위해서 저 정도는 해야 하는 거구나.”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봐. 그저 계속 대사를 읽고 발성에만 신경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저래야 할리우드를 가는 건가?”
지한을 보고 하나같이 모두 자신의 행동을 돌아봤다.
주민은 벌써부터 자신의 배우들에게 좋은 약이 투여되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의 배우들은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긴 했지만 회사와 자신을 믿고 조금씩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오디션을 보러가던 간절함을 잃고, 회사에서 떠먹여주는 배역만 받아들였다.
그래서는 안 됐다.
배우라면 누구나 작품과 배역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했다.
그 자리에 안주하기만 해서는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인들에게 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보고 다시 떠올려.’
이번 일로 조금이라도 향상심을 가지는 이들은 끝까지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이다.
* * *
[HOT]사람극장 보신 분
글쓴이 지한FOREVER
여러분 보셨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본 게 아니었어요.
천사를 보고 있던 겁니다.
지한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였던 것입니다.
어쩐지 제가 지한이 얼굴만 보면 손을 모으고 싶어지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일 지한이 얼굴 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세요.
└믿습니다, 천사님.
└믿습니다.
└교황청에서 천사님 보호한다고 데려가면 어쩌죠?
└우리 천사님 국적 대한민국이라구요. 어딜 잡아가. 가만 안 둬
└아…아!
└└말을 하세요, 신도님.
└└그 맘 알 것 같아요. 말이 나오지 않는 미모.
└지한이 지금도 저렇게 아긔천산데 크면 어른천사 되나요?ㅎㅎㅎㅎㅎㅎ
└└어!른!천!사!
└└└죄송합니다. 천사님. 제가 지금 불순한 생각을 했습니다.
└└└└회개하세요.
└└└└└회개합니다.
[자유게시판]여러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님!
글쓴이 지한사랑
우리는 지금 저 천사님을 앞으로 반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괜찮아. 사람극장 보면 되잖아.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 보고 있어.
└└└KBC에서도 재방송 장난 아니게 해 주더라.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줄 아네.
└그래도 빨리 보고 싶다.
└영화 언제 볼 수 있음?
└└지금 촬영 중이니까 촬영 다 끝나고 CG작업 할 때까지 기다려야함
└└└그게 언제냐고
└└└└아마 내년 여름?
└아! 내가 연출을 배웠어야 했는데! 그러면 지한이랑 몇 개월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잖아.
└└응. 할리우드 가야하는데 무리.
└└└사장아빠가 입구에서 막을 듯.
└└└└너희들 너무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한의 파격적인 변신은 온라인상에서도 난리가 났다.
이제는 배우 팬카페라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지한의 팬카페에서는 하루에도 몇 백 건에 가까운 게시글이 올라왔고, 탑엔터에서는 정식 팬클럽 창단식을 고민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지한에 대한 뜨거운 관심 덕분이었다.
주민은 긍정적인 반응들로 가득한 글을 읽으면서 매일 뿌듯해했다.
[제목] 할리우드 소식
오늘도 지한이가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배우가 다시 나타날ㄲ│
[취소] [작성하기]
한참 검지를 이용해 키보드를 치고 있던 주민의 귓가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주민이 잽싸게 마우스를 움직여 창을 내렸다.
“큼, 들어와.”
손에 펜을 쥐고 결재파일을 보는 척하던 주민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본부장을 쳐다봤다.
태연하게 펜을 내려놓고 본부장이 다가오는 것을 본 주민은 그가 용건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사장님. 오늘도 팬클럽 창단에 대한 문의가 회사로 수십 건 들어왔습니다.”
“그래. 지한이 팬클럽 인원이 지금 몇 명이라고 했지?”
“제일 큰 곳은 8만 명입니다.”
“8만?”
웬만한 가수 못지않은 수에 주민이 크게 놀라면서도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지한이가 이번 촬영만 하고 오면 공식 창단식 및 팬미팅 준비하도록 하지.”
“네, 그리고.”
“또 뭔가.”
“지연이 팬클럽도 있습니다.”
“지연이가?”
방송출연이라고는 <사람극장>밖에 없는 애한테 팬클럽이 생겼다고?
‘아니지. 우리 애라면 충분하지.’
시청자 게시판 지분을 반이나 차지한 아이 아닌가.
여전히 회사로 지연의 데뷔를 묻는 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
역시 우리 애들은 대단해.
“거긴 또 몇 명인가?”
“1만 명 정도 됩니다.”
“허. 방송 한 번 출연한 것치곤 대단하군.”
“네. 그래서 사장님. 지연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흠.”
톡, 톡.
생각에 잠긴 공 사장이 손가락을 책상에 부딪쳤다.
어떻게 한다.
지연이는 아직 방송 출연에 흥미가 없어 보이고.
하는 일이라고는 지한이를 따라다니면서 밥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놀아주고, 연습시켜주고, 등등.
틈이 날 때,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지한이 촬영 없을 때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다였지.
‘하는 게 많아. 그래서 지연이가 방송에 관심이 없는 건가?’
팬들의 요구와 지연의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저울질하던 주민이 생각을 정리했다.
“지연이한테도 물어봐야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장의 결단에 본부장이 환한 얼굴을 했다.
그로서도 내심 지연을 이대로 두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가?”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지연의 데뷔 문제로 전화가 오는지 모릅니다. 특히 기자들이 더 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