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65/296)

하얀 가운을 입은 자들의 지시를 따라 피를 뽑고 약물이 투여된다.

유리 상자에 갇힌 실험 쥐처럼 끌려다니던 어느 날 백신은 예민해진 청각으로 누군가의 애원을 듣는다.

“그마안!!!!!!!!”

고막을 찌르는 높은 소리.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

천이 마찰하는 소리.

이윽고

잦아드는 탁한 숨소리.

“이런. 이번에도 실패군.”

“V 같은 성공체가 하나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성공하면 뭐해 다른 사람들에게 쓸 수 없잖아.”

약과 독은 한끗 차이라고 했던가.

V를 통해 개발한 약은 다른 이들에게는 독이 되었다.

V라고 불린 하얀 소년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 내 피는 왜 독이 되는 걸까.’

하얀 세상에서 V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동안 V는 늙지도 죽지도 않았다.

연구원들의 얼굴에 주름이 생겨도, 옆방에서 또 실패라며 숨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계속돼도, 그리고 성과가 있다면서 연구원들이 축배를 터트릴 때도.

V는 성스럽다고 여겨질 정도로 하얗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V는 답을 내렸다.

‘나는 다른 존재보다 월등한 존재구나.’

늙지도 죽지도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

그렇다면 자신이 이대로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을 이유가 있는가?

“아니.”

V의 얼굴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가 갓난아이를 보는 것처럼

신실한 목사가 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오래된 고승이 기도를 하는 것처럼

성스러운 미소가 V의 입가에 걸렸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의 미소였으니.

성스럽게 여겨질 미소에서 순수한 악의가 흘러나왔다.

“컷. 좋아. 다음으로 넘어가지.”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았다.

* * *

“저게 뭐야.”

지한의 연기를 지켜보던 스태프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말했다.

천사 같은 얼굴에 왜 소름이 돋았는가.

내심 태평양 건너 먼 곳에 있는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말에 프로듀서의 안목을 의심했던 스태프는 방금 전 한 씬으로 모든 것을 납득했다.

왜 저 배우여야 하는지를 연기로 납득시킨 하얀 아이를 보고 스태프가 침을 삼켰다.

빨리, 빨리. 저 모습을 화면으로 보고 싶었다.

저걸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놀랄까.

다음 씬을 위해서 장비를 만지는 스태프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보고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미나가 영훈에게 슬쩍 물었다.

“왠지 다른 사람들이 묘하게 흥분한 거 같지 않아?”

“다들 한의 다음 연기를 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영훈 대신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던 애런이 미나에게 대답했다.

‘그사이 더 괴물이 되었군.’

를 찍을 때도 괴물 같다고 생각했는데 안 본 몇 달 사이에 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정말이지 저 오지한이란 배우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만한 연기에 빠른 성장 속도라니.

어린 나이에 저렇게 순수한 악을 연기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누나. 나 어땠어?”

“잘했어. 연습한 것보다 더 잘하던데?”

“히힛.”

“다음 씬은 물에 들어가 있는 건데 괜찮겠어?”

“눈 뜨는 건 힘들지만 해야지.”

“숨 막히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응!”

다음 씬을 걱정하는 누나가 보였다.

지한의 연기 디테일을 잡아주는 걸 보면서 애런이 아쉬움에 입술을 들썩였다.

‘지연이 직접 연기하는 것도 좋을 텐데.’

뛰어난 마스크에 동생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연기력, 우수한 기억력.

누나 역시 동생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남매가 한 화면에서 같이 연기를 하면 어떨까?

애런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전부터 호시탐탐 지연의 데뷔를 노리고 있던 애런이 눈앞에 탐나는 보물을 둔 것처럼 바라봤다.

‘왜 저러지?’

배고픈지 입맛을 다시는 애런을 보고 지연이 간식을 가져왔는지 생각했다.

지한이가 탈색하는 동안 도시락을 나눠 먹었는데 부족했나 봐.

다음부터는 더 많이 준비해야겠어.

지연의 오해가 깊어졌다.

씬이 끝나고 다음 씬을 준비하는 사이 잠자코 있던 <사람극장> 스태프가 다가왔다.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았네요. 기분이 어때요?”

“좋아요.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물에 들어가서 촬영하는 건 처음인데 무섭지 않아요?”

“숙소에 있을 때, 욕조에서 연습했어요. 누나가 계속 옆에 있으니까 괜찮았어요.”

“촬영하면 누나가 바로 옆에 없는데 괜찮아요?”

“바로 옆에 없어도 누나는 내가 위험하면 바로 아니까 도와주러 올 거예요. 그러니까 난 마음껏 연기할 수 있어요.”

카메라맨은 누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지한을 보고 웃었다.

아이들이란.

자신의 아이들도 어렸을 땐 날 슈퍼맨으로 생각했었지.

남매의 비밀을 모르는 카메라맨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60. 지연의 약점

지한의 촬영은 순조로웠다.

스태프들은 동양인이라고, 어리다고 지한을 무시하는 법이 없었으며, 한 번에 완벽한 컷을 찍은 덕분에 촬영 시간마저 일찍 끝나게 해 주는 그를 싫어할 스태프는 없었다.

“다음은 야외촬영이네.”

“야외촬영!”

“오랜만이다. 그치?”

“응!”

실내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것이 편했지만 그걸로 대체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거 대규모 촬영 씬이죠?”

“맞아.”

“그럼, 자외선 차단제랑 양산이랑 준비해야겠다.”

코디인 미나가 필요한 물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동안 지연은 아무런 말도 없이 동생을 북돋아 줬다.

“아직 밖에 추울 텐데.”

“이번에는 핫팩 잘 조달해 왔어. 걱정 마.”

“내일은 따뜻한 보리차 준비해야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끓이면 되겠지.

지연도 내일 챙길 물건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한아. 내일 폭발도 한다는데 괜찮겠어? 혹시나 귀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아니다. 귀마개를 준비해야 하나.”

“귀마개 하면 바로 티 나지 않을까.”

“솜 같은 걸 준비하면 되겠지요.”

내 동생(배우)은 소중하니까.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내일 촬영을 준비했다.

그 모든 것을 카메라가 찍고 있었지만 의식하지 않게 된 것이 옛날이었다.

“다들 고마워요. 그런데 누나는 괜찮아?”

“뭐가.”

“누나 그거 무서워하잖아.”

“….”

같이 대본을 보며 연습하기 때문에 이다음 장면에 뭐가 나오는지 아는 지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애써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게 준비물만 생각했는데 지한이 그 부분을 딱 꼬집어 말했다.

현실로 끌어올린 걱정에 지연의 얼굴이 답지 않게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놓칠 어른들이 아니었다.

“뭐어어?”

“우리 지연이가 뭘 무서워한다고오?”

“연이 무서워하는 것이 다 있군요.”

지한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운 어른들이 하나둘씩 지연에게 달라붙었다.

“우리 연이 그랬구나?”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언니도 무서워하는 게 있단다.”

“맞아. 그런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많아. 어른들 중에서도 있는걸.”

“선글라스도 준비해야겠군요.”

“힘들면 제가 가려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형석 아저씨까지?

지연이 눈썹이 하늘 높이 솟았다.

달래는 것 같지만 묘하게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이 사람들이.’

지연이 이를 악물었다.

두고 보자. 나만 그러는 줄 알아?

여긴 할리우드라고. 분장이 한국이랑 남다르단 말이야.

<사람극장>를 찍고 있는 카메라맨이 지연을 가까이서 찍었다.

고개를 홱 돌린 지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누나 내가 힘내서 한 방에 찍을게.”

“…고마워.”

애초에 지한이 먼저 꺼낸 말이지만 차마 순수하게 누나를 걱정해서 말을 꺼낸 동생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 네가 뭘 알고 말했겠니.

그나마 여기서 믿은 사람은 너밖에 없다.

지연이 동생의 하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 * *

지한의 차기작인 영화 <바이러스>는 어느 날 지구상에 기묘한 존재들이 등장하면서 인류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찍는 작품이다.

그리고 오늘 촬영하는 그 씬이 바로 기묘한 존재들이 대거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지한이 걱정하고, 어른들이 지연을 놀렸던 바로 그 이유가 되는 존재들.

지금 저 분장 텐트에서 그 존재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누, 누나아.”

“…오빠 지금 떨고 있어요?”

“그, 그, 그, 그럴 리가.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육군 병장 만기 제대자야,”

“아, 저기 분장 다 하고 나왔다.”

“히이이이이이이이이익!”

옆에서 영훈이 진동벨처럼 떨었다.

헹, 어제 그렇게 나보고 뭐라고 하더니 오빠도 별 거 없잖아!

지연이 동생을 품에 꼭 안고 시선을 애써 돌리며 영훈을 놀렸다.

놀리는 와중에도 지연을 생각해서 선글라스를 가져온 애런에 비하면 영훈은 저래도 쌌다.

‘언니랑 애런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태연하게 분장을 하고 나오는 이들을 ‘A급’, ‘C급’으로 평가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지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괜찮아?”

“응? 언닌 저런 거 좋아해. 귀신이나 괴물 나오는 거?”

“애런은요?”

“절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할리우드에서 에이전트로 일하다 보면 저런 건 시시때때로 봅니다.”

할리우드!

도대체 여긴 어떤 마굴인 거야!

지연이 질린 얼굴을 하고 가장 든든한 형석의 뒤로 숨었다.

아침 러닝으로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형석의 두꺼운 다리 뒤에 숨어서 분장을 받고 하나둘씩 나오는 엑스트라들을 구경했다.

“여기가 무슨 할로윈 파티장인 줄 아나.”

“누나 여기가 미국 공동묘진가 봐.”

촬영장 곳곳에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그래, <바이러스>는 좀비 영화였다.

누가 범죄 수사물과 좀비물을 좋아하는 나라 아니랄까 봐.

내가 미래에서 K-좀비 드라마가 N플렉스에 론칭됐다고 할 때도 안 봤는데 결국 돌아와서 보게 되네.

지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선글라스 너머로도 눈부신 태양을 보면서 지연이 진지한 얼굴로 동생에게 말했다.

“지한아, 너 오늘 촬영 무사히 할 수 있겠어?”

“응”

“한 방이야. 한 방에 끝내버려.”

“응! 한 방! 무조건 한 번에 끝낼 거야.”

지한이 기합을 다졌다.

“히익!”

“힉!”

옆을 지나가는 한 무리의 좀비들을 보고 지연이 다시 형석의 다리를 붙잡고 숨었다.

생각보다 더 리얼한 좀비 분장에 지한이도 같이 형석이 다리를 단단하게 잡았다.

그래. 누가 내 동생 아니랄까 봐.

너도 고생이 많다.

누나를 닮은 동생을 보고 지연이 짠한 눈으로 바라봤다.

부디 오늘 촬영이 끝날 때까지 동생의 간이 제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물론 내 간도.

* * *

구경도 끝냈겠다.

지한도 의상을 갈아입고 나왔다.

촬영장 안에서 제한된 곳에서만 촬영을 허락받은 다큐팀이 의상을 갈아입는 지한에게 오늘의 촬영 각오를 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이 찍는 건 처음인데 어때요?”

“떨려요. 많은 사람들이랑 같이 촬영하는 거 재밌을 거 같아요.”

“그동안 한 장면을 찍는데 5번을 넘지 않았는데 오늘도 가능할까요?”

“으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까 보니까 다들 열심히 분장하던데. 그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한 방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방이요. 하하. 그건 누나를 위한 바람인가요?”

“네. 앗! 이거 비밀이에요. 누나는 좀비나 귀신이나 그런 걸 무서워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는 거 싫어하거든요.”

“예. 비밀이란 말이죠? 알았어요.”

작가가 짓궂게 웃었다.

비밀이긴 개뿔.

전 국민이 내가 귀신 무서워하는 거 다 알게 되겠구만.

카메라가 찍는 시야 밖에서 지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애런이 어깨를 토닥였다.

유능한 에이전트답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애런은 몇몇 단어만으로도 무슨 내용의 인터뷰가 오갔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애런은 전국으로 겁쟁이란 사실이 팔리게 된 지연을 동정했다.

분장실을 나서자 <사람극장>팀은 카메라를 껐다.

이곳은 소송의 나라 미국이니 계약서에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는 걸 알았다.

다시 백신이 되어 밖으로 나온 지한을 누군가가 불렀다.

“V! 지한. 빨리 왔네요.”

<바이러스>의 조감독 다니엘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하얀 머리칼의 소년을 보고 다가왔다.

오늘 그가 등장하는 씬은 오후 2시에 찍을 예정이지만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된 시간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출연자가 일찍 와서 좋으면 좋았지 싫을 이유가 없는 다니엘이 살갑게 인사했다.

“많은 사람들이랑 찍는 건 처음이라서 일찍 왔어요. 진짜 많아요.”

“이 정도는 별로 많은 것도 아닙니다만.”

“진짜요? 이렇게 많은데요?”

다니엘의 말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연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많은 게 아니라고?

“맞습니다. 천 명 단위로 나오는 영화들도 많죠. 여기는 고작해야 몇백 명 정도밖에 안 되겠네요. 나머진 CG 처리 할 겁니다.”

“우와아.”

“진짜 할리우드는 대단하네.”

“제작비 규모부터 차이가 나니까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규모였다.

“한국에서는 영화 한 편 만드는데 100억을 넘지 않는다던데. 우리 지한이는 벌써 몇백 억짜리 영화를 찍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