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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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팩토리에 다큐 촬영 협조를 구하자마자 한국에서 소속사와 방송국이 일정을 조율했다.

일부러 지한이의 촬영 스케줄에 맞춘 일정이니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는데.

할리우드라는 말에 <사람극장> 제작진이 적잖게 흥분한 것 같았다.

“깜짝 놀라실걸요?”

이전에 촬영했던 연기 연습을 했던 것과 다르게 실제로 카메라 앞에서 촬영하는 지한의 모습을 본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거라며 영훈이 웃음을 삼켰다.

그날의 지한을 보고 깜짝 놀랄 제작진들의 모습이 기대됐다.

영훈이 만수의 물음을 가볍게 받아주며 차를 몰아 호텔로 향했다.

* * *

지한의 두 번째 할리우드 영화, <바이러스>의 촬영 날이 밝았다.

커다란 침대 위에 꼭 붙어 자고 있는 인영 중 하나가 꼼지락거렸다.

“우으응.”

다른 인영이 잠꼬대를 하자 움직이던 인영이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히 손을 뻗었다.

탁상에 놓인 시계를 가져와 시간을 확인한 인영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고 침실을 나온 지연이 입을 가렸다.

“흐하암.”

“일찍 일어났네요.”

“!”

하품을 하던 지연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자 지연은 그가 어제 인사했던 <사람극장> 제작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 음. 안녕하세요.”

아침인데도 붓기 하나 없는 얼굴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스태프가 몰래 감탄했다.

‘우와 진짜 오지연이다.’

<사람극장> 오지한 편에서 시청자 게시판의 지분을 반이나 차지했던 인물.

하나같이 지연의 데뷔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화제의 인물을 직접 실물로 마주한 스태프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지연을 기다려줬다.

“안녕하세요. 아직 새벽인데 왜 벌써 일어났어요?”

“오늘 지한이 촬영하는 날이니까 준비할 게 많아서요.”

“준비요?”

“도시락이요. 지한이 먹는 거 줄여야 하거든요.”

“왜요?”

“촬영 때문에요.”

지연이 스태프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촬영할 때까지 한 달밖에 기간밖에 없어서 많이 빼지는 못했지만 무려 3kg나 뺐다.

굶어서 빼면 건강에도 외모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영양을 챙기면서 지방만 줄이려고 노력했다.

근육이 잡히면서 동생의 몸이 탄탄해지는 것은 좋았지만 말라보이기 위해서 식단을 조절해야 했던 것은 마음에 아팠다.

딱 필요한 만큼의 칼로리만 섭취하느라 지한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누나도 살이 빠진 것 같은데요?”

“지한이 혼자 하면 힘드니까 같이 했어요.”

부엌으로 가는 동안 스태프의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왜 이렇게 찍는 거래.

어차피 나중에 다 편집할 거면서 테이프 아깝게.

지연이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씻고, 커다란 보울에 씻은 야채를 담은 지연이 다듬기 위해서 칼을 꺼내 들었다.

통, 통, 통.

부엌에서 지연이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서 칼 써도 돼요?”

“네. 어차피 언니랑 오빠는 요리 못해요.”

“가정부를 고용해도 되지 않나요?”

“괜찮아요. 요리하는 거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스태프가 할 말을 다 했는지 조용히 지연이가 요리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철컥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냄비에 물을 올린 지연이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59. 천사인가 악마인가.

“다녀오셨어요.”

“네.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

지연이보다 더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고 온 형석이 땀에 젖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씻고 오세요.”

“네.”

오늘은 지한의 촬영이 있는 날이니 운동할 시간이 새벽밖에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형석을 보고 지연은 다시 부엌에 들어갔다.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아침을 다 만들자 하나둘씩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좋은 아침.”

“잘 잤어?”

“흐아암. 지연이 너는 잠도 없니.”

“응.”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영훈과 미나가 부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럴 만도 하지.

지연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는데도 아직 새벽 6시니까.

“언니, 오빠. 세수부터 하고 앉아.”

“지연아, 먹고 할게.”

“엑, 더러워.”

미나가 영훈에게서 멀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오빤 저기 가서 혼자 먹어요.”

“너무해.”

그렇게 말하는 미나도 안 씻었다.

“누나.”

세수를 하고 왔지만 잠을 전부 쫓지 못한 지한이 지연의 품에 안겼다.

오늘 촬영 때문에 늦게 잤으니 피곤할 만하지.

동생을 품에 안고 토닥이는 사이 형석이 샤워를 하고 나왔다.

“오늘은 모두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날이니까요.”

“지한이 첫 촬영이 있는 날!”

“난 진짜 오늘만 기다렸어.”

지한의 코디인 미나가 다 뜨지도 못한 눈을 크게 뜨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나 오늘 카메라 들고 갈 거야.”

“그게 카메라냐? 대폰 줄 알았다.”

“후. 후후후후. 사진 찍는 친구한테 추천받아서 산 거야.”

밥까지 사주면서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면서 미나가 자랑했다.

“카메라는 왜 필요한가요?”

묘하게 들뜬 미나를 보고 스태프가 물었다.

미나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지한이 첫 염색 하는 날이거든요.”

카메라가 아침을 오물오물 먹고 있는 지한을 담았다.

* * *

“자. 어서 들어가자. 염색하는 데 엄청 오래 걸릴 거야.”

“얼마나 걸릴까?”

“아마 엄청 해야 할걸.”

“지한이 두피 녹는 거 아니야?”

“그러진 않을 거야.”

아마도.

말을 흐리는 미나를 보니까 지연이 문득 불안해졌다.

마법사 시리즈에 나왔던 한 배우는 촬영 때문에 탈색을 많이 하는 바람에 조기 탈모가 왔다고 한다.

‘지한이는 이번 촬영만 탈색하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던 지연이 두 손을 꼭 모으고 오색구름이 있던 곳에서 들렸던 목소리에게 빌었다.

‘제발 지한이의 모근을 지켜주세요!’

일행들이 샵으로 들어갔다.

“아, 한. 어서 와요. 드디어 오늘이죠?”

며칠 동안 탈색하느라 얼굴을 봤던 빨간 머리의 직원이 지한이를 의자에 앉혔다.

“며칠 동안 색 빼느라 고생했어요. 그래도 색이 예쁘게 빠져서 다행이에요.”

“오늘은 염색하는 거죠?”

“맞아요. 그래도 이렇게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은 다짜고짜 와서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바라거든요.”

“누가요?”

“누구긴요. 우리 샵에 다니는 스타가 지한 한 명뿐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죠? 다른 사람들도 지한을 본받았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하면서 붉은 머리의 스태프가 시니컬한 표정을 지었다.

지한이 자신의 옆에 와 커트보를 씌우는 스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금 카메라로 찍고 있는데 그런 말 해도 돼요?”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에 스태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이름 말 안 했잖아? 그럼 no problem”

“그렇구나.”

깔깔깔 웃은 스태프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제발 지한이 머리카락님 버텨주세요.”

“오빠는 누구한테 비는 거야?”

“천지신명님,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등등.”

“언니 지한이 샴푸 바꿔야겠지?”

“응. 탈색모에 좋은 걸로. 그리고 트리트먼트도 써야겠다. 쓰는 법 알아?”

“지한이한테는 내가 말할까?

“음. 언니가 할게.”

“제가 샴푸와 트리트먼트를 알아보겠습니다.”

“애런이 구해주신다면 고맙죠.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지한의 두피 건강을 걱정하면서 미나와 영훈, 애런까지 모두 결과물을 기대했다.

며칠에 걸쳐 탈색해 연한 레몬색인 지한이의 머리카락에 염색약이 발렸다.

약을 바르고, 열처리를 하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침내

“쨘!”

“나 어때?”

백발을 한 지한이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던 이들에게 물었다.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완벽한 백발이었다.

지한의 뒤에서 빨간 머리의 직원이 윙크를 보냈다.

* * *

염색을 하고 시간에 맞춰 촬영장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

“어서 와요.”

“일찍 왔네요.”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지한이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프로듀서의 배려 덕분인지 이 촬영장에서 지한을 동양인 배우라고 차별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있었으면 따끔한 맛을 보여줬겠지만.

‘할리우드 촬영을 했던 동양인 배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인종차별이 장난 아니라고 했는데 그런 건 없어서 다행이야.’

가뜩이나 이미란과 양심 없는 친척들 때문에 일어난 일로 소란스러웠는데 미국까지 와서 피곤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지연은 자세한 사정을 몰랐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프로듀서와 에이전시 그리고 탑엔터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인사를 나눈 지한이 의상을 갈아입으러 분장실로 들어갔다.

“지한이가 백발이라니.”

영훈이 하얀 머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지한을 낯설게 바라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된 지한을 보고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영훈을 본 지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낯설어하는 영훈을 보고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이해 가기도 했다.

지금 시대에는 저렇게 밝게 염색하는 일은 가수들 중에서도 드문 일이니까 당연하지.

아이돌들이 화려한 머리를 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2010년부터던가?

“조금 어색하지만 엄청 잘 어울리네요.”

메이크업에 의상까지 입은 지한은 새하얀 천사 같았다.

천사가 사뿐사뿐 걸어와 누나에게 안겼다.

찰칵, 찰칵.

아까부터 미나의 카메라에서 셔터 음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누나 나 어때?”

“예뻐.”

“정말?”

“응. 정말. 저기 미나 언니를 보고 포즈 좀 취해 봐.”

“히힛.”

“오오! 좋아.”

“누나 나 정말 괜찮아?”

“응응. 지한아 거기서 팔 좀 더 올려봐.”

“지한아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니.”

“놔둬요. 지한이도 자기가 어색한가 보지.”

영훈을 타박하면서도 미나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언니가 많이 찍어 줬으면 좋겠다.

작품 찍을 때마다 사진 앨범을 하나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기념으로 삼게.

“자, 그럼 한. 오늘 촬영 힘내요.”

“네! 고마워요.”

“별말씀을!”

언제 친해졌는지.

분장실 스태프와 지한이 서로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자, 이제 가자.”

지한의 촬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분장실을 나가자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동생을 돌아봤다.

흔치않은 새하얀 머리에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저절로 지한에게 향하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오! 내가 생각한 ‘백신’의 모습 그대로야.”

로한 크루거 감독이 준비를 마치고 다가오는 지한을 보고 칭찬했다.

“어때, 한. 내 머릿속에 있는 ‘백신’을 현실로 불러주겠나?”

로한이 지한을 또렷이 직시했다.

그의 눈빛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지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 대답에 로한 감독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씬 넘버 33, 컷7, 테이크1”

딱!

슬레이트가 쳐지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감독의 사인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고 카메라 앞에서 지한은 ‘백신’이 되었다.

하얀 방에 하얀 존재가 눈을 감고 있었다.

매일 정해진 만큼의 영향이 축적된 캡슐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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