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의 차기작이라니!
또 화면에서 볼 수 있는 건가?
소희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고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 PD가 궁금했던 점을 질문했다.
[PD: 차기작은 뭔가요?]
“로한 크루거 감독님의 작품입니다.”
직원의 입에서 낯선 외국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게 누구?
[PD: 영화 <파라오> 시리즈의 로한 크루거 감독님 말씀이십니까?]
“네.”
“네?”
직원의 대답에 소희가 되물었다.
<파라오> 찍은 감독님의 차기작이요?
이번에 2편 나왔다던 그 시리즈 감독님?!
무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니임?!
“할리우드으으?!”
“어머나. 나도 그 영화 아는데.”
“알겠죠! 1편은 명절특선영화로 봤으니까요!”
“뭐야. 왜 소리를 질러?”
“우리 지한이가 또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데!”
“누가 누나네 지한이야?”
“무려 할리우드라고오! 또 할리우드야! 우리 애 월드스타야!”
미친 듯이 만세를 하며 할리우드만 외치는 누나를 보고 소희의 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거 미쳤나.’
그런 시선으로 보거나 말거나 소희는 지한의 차기작이 또 할리우드 작품이라는 것에 두 팔을 벌려 기뻐했다.
“할리우드으으으!”
58. 할리우드는 처음이지?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공항에 마중 나온 애런을 보고 아이들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Moonlight 촬영 이후 처음이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나서 그런지 아이들이 애런의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훈도 영어가 많이 늘었네요.”
“아이들 덕분이죠. 이쪽은 지한이 코디네이터인 미나이고, 이쪽은 개인 경호원인 형석입니다.”
“반갑습니다, 미나, 횬석. 애런입니다.”
“안녕.”
“안녕하십니까.”
지한의 스태프들과 애런이 통성명을 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애런이 일행들을 이끌었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어서 가죠.”
“다른 사람이요?”
“누구요?”
“그거야 물론, 한의 팬이지요.”
“내 팬?”
“미국에도 지한이 팬이 있어요?”
“영화가 어디에서 개봉했는지 잊은 건 아니지요?”
그랬지!
지한이는 할리우드 영화를 찍었다.
당연히 미국에서 먼저 개봉했고, 영화를 본 사람도 꽤 많다.
“지한이 팬 많아요?”
“네. 예술 영화치고는 꽤 흥행한 편이니까요.”
“우와.”
“저길 보세요. 저 사람들이 계속 이쪽을 힐끔거리지요?”
애런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여대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 마주쳤다.’
우리도 그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움찔하더니 곧 머리를 맞대고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아마 한의 팬일 겁니다.”
“진짜 팬인가?”
“사진! 사진 찍어줘도 돼요?”
휴게소 팬미팅 이후로 지한이는 자기의 팬들과 같이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사인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해 주려고 했다.
‘그건 잘된 일이지.’
예전에는 소심한 성격 탓에 PC방비, 간식비 등을 내면서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순수한 애정을 받는 것이 지한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 지연이도 팬서비스를 하는 지한을 말리지 않았다.
“한 사람 찍어주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모여들 테니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네에.”
“팬사인회라면 한 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네!”
애런의 말에 지한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팬사인회라.
말은 저렇게 했지만 미국에는 지한의 팬이 많지 않아서 당장은 팬사인회를 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지한이도 미국 투어를 하면서 팬미팅을 할 정도로 팬들이 많이 늘어나겠지?
그날을 상상하면서 지연이 동생의 손을 잡고 애런의 뒤를 따랐다.
* * *
에이전시에서 잡아준 숙소에 짐을 풀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제작진 미팅이 있었다.
두 번째 할리우드 영환데 오디션을 보지 않고 직접 캐스팅되다니.
누구 동생인지는 몰라도 진짜 대단하다니까.
미팅에서도 갈색 머리의 프로듀서를 홀리고 온 동생을 보고 지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촬영은 곧 들어갈 겁니다. 어제 마지막 배역의 오디션이 끝났다고 하더군요.”
“벌써요?”
“네. 스태프와 배우들이 준비된 이상 더 지체할 이유가 없죠. 제작사도 월드 팩토리니 제작이 엎어지지 않을 겁니다.”
지한의 영화를 위해서 애런이 꽤 많은 걸 알아본 것 같다.
아니지. 할리우드에서 에이전시를 하면 당연한 건가?
지연이 애런을 놀랍다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얘들아. 알려줄 게 있는데.”
영훈이 아이들이 전화를 받고 돌아왔다.
한국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다큐 때문에 지한이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
“이번에 지한이가 촬영하는 동안에 다큐 촬영팀이 붙을 것 같은데 괜찮니?”
“또요?”
다큐를 이렇게 연속으로 찍어도 되는 건가?
지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난 좋아. 재밌었어.”
“지한이가 좋다면 나도 상관없어. 그런데 나도 나와?”
“이번에는 지한이의 할리우드 촬영이 주가 될 것 같아. 꼭 안 나와도 괜찮을 거야. 그렇지만 안 나오기 힘들걸?”
“지연아. 지한이랑 맨날 같이 붙어있으면서 어떻게 안 찍힐 생각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런 거라면 카메라의 각도를 생각하면서 사각지대에 서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카메라를 피할까 생각하던 지연이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왜?”
“아니, 연이 언제 방송에 출연했나 싶어서요. 미나와 훈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에서 다큐를 찍은 것 같습니다만.”
“맞아요.”
“그러면 촬영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 맞습니까?”
“다큐는 지한이 때문에 찍은 거예요.”
지연의 말에 지한이 울상이 되었다.
“누나, 나 때문에 억지로 한 거야?”
윽, 그런 게 아니라.
“아니야. 나는 그러니까. 우리 놀러 가는 거 찍는다고 해서 신경 안 썼을 뿐이야. 그런데 이건 지한이 네 촬영을 찍는 거잖아. 내가 나오면 안 되지.”
“왜 안 돼?”
“왜긴. 그 사람들은 지한이 널 찍으러 오는 거잖아.”
“그치마안.”
“누나는 저번에 많이 나왔으니까 이번에는 덜 나왔으면 좋겠어.”
“…알았어.”
주인공이 지한인데 내가 자꾸 알짱거리면 그렇잖아?
원래 조연은 조연답게 주인공을 빛내주기만 하면 된다.
“애런. 우리 지연이 나온 장면 보실래요?”
“오? 제가 봐도 됩니까?”
“물론이죠. 제가 보여드릴게요.”
“그런데 애들이 카메라에 못나게 나와서 조금 아쉬워요.”
“다큐니까 어쩔 수 없죠.”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다큐니까.
음방 무대도 아니고 촬영장처럼 조명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실물이 더 나은데. 그게 아쉬워요.”
“우리 애들 얼굴을 다 담을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런 날이 올까요? 과학의 발전을 믿어야 하나?”
“크. 날이 가면 갈수록 빛나는 얼굴인데 왠지 과학의 발전이 우리 애들의 진화를 따라가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냐.”
주접은.
아무래도 미나 언니와 영훈 오빠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
너무 과하게 올려치는데.
물론 내 동생은 한참을 올려쳐도 부족하다.
무려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 얼굴이니까.
나중에는 성스러워서 보자마자 사람들이 기도하는 거 아닌가 몰라.
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고 하면 어쩌지?
‘안 되겠어. 내가 조각도 배워야만.’
지한에 대한 주접으로는 절대 지지 않는 지연이 헨리한테 조각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애런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배우로서 잘생긴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죠.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기가 있는 셈이니까요.”
“그럼 그럼.”
“프로듀서도 천사 같은 얼굴을 보고 꼭 캐스팅하고 싶었다고 하니까요.”
“아, 지한이 역할 말이죠?”
“나는 언젠가 지한이가 그런 역할을 맡을 줄 알았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나도.”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이라면 아직 출연한 작품이 많지 않은데 기존의 배역과 완전히 다른 이미지의 배역이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신성 배우의 부탁으로 출연한 카메오가 말이 많았다.
대본을 봤을 때는 아역 배우가 쉽게 하기 힘든 역할이라 수락했는데 이미란 때문에 지한의 연기가 조명받지 못했다.
허무와 체념에서 분노, 증오, 원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기를 위해서 지한이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걸 내가 이미란을 끌어내기 위해 이용한 바람에 망쳐버렸다.
돌아오고 처음으로 동생에게 미안했던 순간이었다.
‘생각이 짧았어. 지한이가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 생각하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그때의 일을 떠올린 지연이 시무룩해졌다.
“누나? 왜 그래?”
“그렇게 부끄러워?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게?”
“그런 거 아니야.”
“정말이야?”
“연이 싫다면 보지 않겠습니다.”
“진짜 아니야. 그냥 좀 내가 아직 많이 어리구나라고 생각했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미리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어른들이 빵 하고 터졌다.
“하하하하. 지연이 너도 참.”
“진짜. 그럼 지연이 네가 어린이지 어른이야?”
“연. 연은 아직 아이가 맞습니다.”
고작 초등학생 주제에 어린 게 당연하지 않은가.
평소에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잘 볼 수 없는 지연의 허당 같은 모습에 어른들이 신이 나서 놀렸다.
“우리 지연이 지금 몇짤이지요?”
“그러지 마.”
“네네. 오지연 어린이. 지연이 지금 11살이지요? 한국이었다면 초등학교 4학년.”
“그게 왜에.”
건수를 잡았다는 것처럼 담합해서 놀리는 미나와 영훈을 보고 지연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애런까지! 입은 왜 가리는 거예요.
“연. 흐흡. 그래도 연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편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훅.”
그 손 치워봐.
당신 지금 웃고 있지?
몸은 어려도 정신만은 30살을 넘긴 지연이 눈을 치켜떴다.
“그만해!”
“괜찮아. 괜찮아. 애들은 빨리 크는 법이야.”
“오빠 말이 맞아. 지연이 너도 금방 클걸?”
“고럼고럼.”
“연. 어린 시절을 즐기세요.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2회차 초등학생인 지연이 코웃음을 쳤다.
두고 보자.
내가 오늘 일은 두고두고 기억할 거야!
* * *
“진짜 미국이네요.”
“그럼 비행기까지 타고 내렸는데 미국이 아니겠어?”
한국에서 다큐 촬영을 위해서 할리우드까지 넘어온 제작진이 화창한 날씨를 보고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아니 우리가 다큐 촬영팀이긴 해도 주로 한국 사람들을 찍었잖아요. 우리 프로그램 이름이 왜 사람극장인데요.”
“맞아요. 맞아요. 그리고 저번에는 PD님이랑 카메라 감독님, 그리고 메인 작가님만 찍으셨잖아요.”
그거야 탑엔터 사장의 기획 때문에 급히 찍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렇지.
다른 촬영 감독 하면서 찍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아무튼.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면 돼요?”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이 있는데.”
“저 사람 아니에요?”
짐을 들고 있던 막내 PD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제작진>
한글과 영어가 섞여있는 종이를 보고 만수가 끄덕였다.
“맞네. 저 사람.”
“PD니임! 여기예요!”
영훈이 오랜만에 만나는 만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낯선 외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저는 잘 지냈죠. PD님은요?”
“덕분에 엄청 바빴죠. 그래도 시청률이 잘 나와서 이렇게 미국까지 촬영하러 왔습니다.”
“KBC에서 빵빵하게 밀어주는 모양이죠?”
“그럼요. 말 그대로 스타의 탄생을 찍는 거니까요.”
할리우드 영화를 찍겠다고 나선 배우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주연을 하거나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에 주요 배역으로 출연한 배우는 오지한 한 명뿐이었다.
동양인 배우들이 진출하기 쉽지 않은 할리우드에 무려 아이인 오지한이 선명하게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찍지 않는다면 그건 방송인이 아니지.
“그래서 숙소는 저희랑 가까운 곳에 잡으셨다면서요?”
“네. 회사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아줬습니다.”
“오. 다행이네요.”
영훈이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촬영팀이라 그런지 장비 싣는 속도가 신속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꽤 많네요.”
“장소가 장소이니만큼요.”
“우리 지한이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저희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촬영은 내일부턴가요?”
“네. 빨리 찍어야 해서요.”
“잘됐네요. 지한이 첫 씬을 바로 보실 수 있겠네요.”
영광스러운 첫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말에 제작진이 작게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