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얼핏 오가는 얘기로는 지한이 몸값이 장난 아니게 올랐다던데?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도 대박, 카메오로 나온 드라마도 대박.
월드컵 응원가까지 부른 월드스타였다.
지한이의 출연료는 웬만한 인기 배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런 집 사는 건 그리 멀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나 이런 얘기는 전혀 모르는 지한이 미나의 말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우와. 이게 숙소야?”
“짐은 방에 올려놓겠습니다.”
“아, 옙. 부탁드립니다.”
뒤이어 들어온 영훈이 숙소를 보고 감탄했다.
이거 제대로 쉬겠는걸?
커다란 가방을 든 형석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으로 다가왔다.
“뭐 하러 2층을 가. 1층 써.”
“어! 안녕하십니까.”
“그래. 애들이 있는데 2층 왔다 갔다 하는 건 힘들잖아. 1층 편하게 써. 방도 많으니까.”
“엇? 여기 다 써도 되나요?”
“아까부터 계속 같은 걸 묻던데. 주민이가 말 안 해줬어? 여기 주민이 별장이야.”
“예!?”
“…말 안 해주시던데요.”
어쩐지 이 좋은 집을 편하게 쓰라고 하더라니.
그럼 저 할아버지는 이 별장 관리인인가?
그런데 왜 우리 사장님을 저렇게 편하게 부르시지?
“그렇게 보지 마. 나는 그냥 은퇴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텃밭이나 가꾸는 사람이니까. 먹을 건 냉장고 뒤져보고, 나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찾아와. 옆집이니까. 아, 계곡은 뒤쪽으로 나가서 길 따라 걸으면 보일 거야.”
커다란 거실창 너머로 옆집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이들 앞에 쟁반을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즐겁게 놀라고 말하고 쿨하게 집을 나섰다.
“…저분도 대단한 분이시겠지?”
“아마도요.”
“형, 우리 언제 놀러가?”
“아, 가야지.”
“짐은 1층에 풀겠습니다.”
“아, 넵.”
“얘들아 옷 갈아입으러 가자.”
쿨한 어르신의 행동에 잠시 넋이 나간 어른들이었지만 지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저기요.”
“어, 그래. 우린 신경 쓰지 마.”
“그게 아니라. 여기 썬크림이요. 발라요.”
“고마워.”
PD의 손에 썬크림을 건네준 지연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방에서 물놀이하기 좋게 편한 옷을 입고,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튜브를 가지고 나왔다.
“자, 가자. 계곡으로!”
“가자!”
* * *
나무집에서 뒷문으로 나오면 작은 오솔길이 나온다.
그 오솔길을 따라가다보면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를 따라가면 커다란 물웅덩이가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가 웅덩이로 이어지고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졌다.
“우와아!”
“너희들 뛰면 안 돼!”
“위험합니다. 준비운동하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영훈과 형석이 아이들을 하나씩 잡았다.
“미끄러질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네에!”
“자, 절 따라하시죠. 어디가십니까, 매니저님과 코디님도 같이 하셔야죠.”
“아, 저희도요?”
“그럼 물에 안 들어가실 겁니까? 예외는 없습니다.”
얕은 곳에서 발만 담굴 생각이던 미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지만 형석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만수가 웃음을 삼켰지만 형석과 눈이 마주치고 불려갔다.
“따라합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세엣, 네에엣.”
“매니저님과 코디님은 많이 뻣뻣하시네요. PD님 따라하고 계십니까?”
“옙.”
누가 특전사 아니랄까봐 준비운동에도 봐주는 거 없는 형석의 말에 어른들이 절로 신음소리를 냈다.
‘언니랑 오빠는 운동 좀 해야 할 듯.’
‘로봇 같다.’
아직 어린 몸이라 유연한 아이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어른들을 보고 꺄르르 웃었다.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와아아!”
“발이 안 닿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깊은 곳에는 가지 말고!”
“조끼 입었어!”
“튜브 꼭 끼고!”
“알았어!”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면서 물에 뛰어 들어갔다.
아직도 날이 뜨거웠지만 계곡물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첨벙!
한쪽에 수박을 담그고 있던 미나가 첨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 아이들이 금방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꺄르르륵
참방, 참방
“애들이 잘 노네요.”
“그렇죠? 쟤들이랑 같이 놀다가는 진이 다 빠진다니까요.”
“아이들은 체력이 너무 좋다니까요. 같이 놀아주면 힘들진 않으세요?”
“가끔은 힘들어도 저렇게 알아서 잘 노니까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
아이들이 노는데 방해하지 않으면서 만수가 능숙하게 인터뷰를 땄다.
카메라맨이 부드럽게 미소가 걸린 영훈의 얼굴과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누나, 이거 봐!”
“뭘?”
“물고기가 발가락 건드려.”
지한의 말에 물속을 쳐다봤다.
맑고 투명한 계곡물 덕분에 동생의 발 주위를 맴도는 물고기가 잘 보였다.
“누나한테도 있다!”
“그러게.”
닥터피쉬도 아니고 왜 우리 발에 이렇게 몰려들지?
내 발에 각질이 그렇게 많나?
“히히힛. 간지러.”
“나도.”
물고기들 시선에서 보면 우리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거 다 보이겠다.
“미나 누나는 안 들어 올 건가봐.”
“물 싫대.”
“영훈이 형은?”
“잘 모르겠는데?”
아이들이 얼굴을 마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물이 튀지 않게 조용히 발장구를 친 아이들이 영훈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먹잇감을 노리는 악어와 같이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튀어 올라 물을 뿌렸다.
촤아악!
“앗, 차거!”
“받아라!”
“꺄하하하하.”
미나 언니가 튀는 물을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쫄딱 젖은 영훈이 반격을 하기 위해서 몸을 담갔다.
“너희들! 받아라!”
“꺄아아!”
“질 수 없지!”
물방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헤엑. 헤엑.”
“형 더 안 해?”
“형 죽었다.”
“얘들아 잠시 나와서 햇빛에 말려. 입술 파래지겠다.”
“네에.”
“응!”
잠시 아이들이랑 놀아준 영훈이 녹초가 되어 돗자리에 엎어졌다.
미나가 물에서 나온 아이들에게 수건을 덮어줬다.
“너희들 수박 먹을래?”
“수박 좋아!”
“먹을래!”
미나가 계곡물에 담가놨던 수박을 꺼내왔다.
잠시 담갔을 뿐인데도 수박이 꽤 시원했다.
수박을 큼직하게 잘라 아이들 손에 들려줬다.
“퉤, 퉤, 퉤.”
“지한아. 누가 수박씨 멀리 보내나 해볼까?”
“좋아! 후웁. 퉤!”
수박씨가 멀리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퉤!”
지연의 수박씨가 그보다 멀리 날아갔다.
“우와아! 누나 어떻게 했어? 응? 가르쳐줘.”
“이건 발사 각도가 중요한 거야. 고개를 조금 더 들어봐.”
“이렇게?”
“조금 내리고.”
“이렇게?”
“좋아, 발사!”
“퉤!”
검은 수박씨가 아까보다 멀리 날아갔다.
톡, 톡.
“형, 형도 해봐.”
“아저씨도 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누나는 할 수 있어?”
“훗, 인현장씨 함평파 31대손 장미나를 뭐로 보는 거지. 뼈대 있는 가문의 힘을 보여주지!”
미나가 수박씨 멀리 보내기에 합류했다.
스르륵
수박씨 멀리 보내기 대회를 하느라 사람들이 열중한 사이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 * *
“지금쯤 아이들은 잘 놀고 있겠지?”
“아마도요. 애들 도착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군….”
아이들은 계곡에 있는데 자신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있다.
주민이 서류를 노려봤다.
“그렇게 보지 마시고 빨리 처리해 주시죠. 그래야 놀이동산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그랬지. 이놈의 서류가 뭐라고.”
“회사 일이 다 그렇죠. 이거 빨리 처리해야 아이들이랑 놀 수 있습니다.”
사장님이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도 놀러 가지 못하지 않느냐며 본부장이 눈을 부릅떴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동산을 통 크게 빌린 주민의 재력에 감탄하면서 다들 아이들의 제안대로 놀이동산을 가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아무렴. 회사 일을 해도 놀면서 하는 게 최고지 않겠는가.
띠리리리-
“여보세요.”
-사장님. 남 비서입니다.
“그래.”
-말씀하신 대로 천 변호사님이 처리하셨습니다. 아이들 양육권이 친척들에게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후견인을 사장님이 되도록 힘쓰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일 처리하고 복귀하겠습니다.
아직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민이 힘을 쓴 이상 결과는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민의 통화 내용을 들은 본부장이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뭘 물어. 당연히 해결했지.”
“아! 다행입니다.”
역시나 아이들 편인 본부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나중에 애들 재산에 손대려고 하면 어쩌죠?”
“걱정 마. 그것도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으니까. 지금쯤이면 여의도 것들 만나고 있을 거야.”
“공 회장님이 직접요?”
“그래. 그쪽에서도 이번 일이 화제니까 이용해 먹을 수 있어서 좋겠지.”
“회장님은 어떻게 움직이셨습니까?”
“다 수가 있어.”
알 필요 없다는 듯이 째려보는 주민의 시선에 본부장이 급히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큰 거래를 하신 건가?
본부장은 주민이 아버지와 ‘한 달 동안 회사에 찾아가서 밥 같이 먹기’로 거래를 한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얼른 손을 움직여. 그래야 그날 하루 종일 놀지.”
“알겠습니다.”
사장실에는 다시 종이 넘기는 소리와 펜이 움직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공 사장은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움직인 것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뒤 통과되는 상속권상실제도를 앞당기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부모의 부양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하는 자들의 상속권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아동학대와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이 법의 취지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주민은 빨리 이 지긋지긋한 서류를 해치우기 위해서 부지런히 손을 놀릴 뿐이었다.
* * *
주민이 아이들과 만나기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하고 있을 동안 아이들은 수박을 먹고 있었다.
“어이구. 참외 가져왔는데 벌써 뭘 먹고 있었구만.”
“어르신!”
“무거울 텐데 이리 주십시오.”
수박을 쥐고 둥글게 앉아있는 이들의 뒤로 옆집 어르신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검은 봉지. 한 손에는 목줄을 쥐고 있는 할아버지가 손을 길게 뻗어 형석에게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으르르르르
“어이쿠. 이 녀석아. 얌전히 있어.”
형석이 다가오자 할아버지가 짧게 쥐고 있던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줄 끝이 목걸이와 연결된 개가 형석을 보고 이를 드러냈다.
“이 녀석이 성질이 좀 더러워. 아까도 자기 버려두고 혼자 갔다고 삐져서 데리고 왔더니. 봉지만 받아가.”
“아. 개가 작은데도 성질이 보통이 아닌가 봐요.”
“작아도 성질이 어마무시하지.”
치와와를 보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까 잠시 따로 덜어졌다고 계곡까지 오는 길을 함께 하는 걸 보면 무척 소중한 반려동물인 것 같았다.
“안녕?”
“안녕? 이름이 뭐야?”
아이들이 치와와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위ㅎ”
“…뭐지.”
혹시나 다칠까 봐 아이들을 말리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 헥헥헥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