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도망쳐놓고 그렇다고 일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네요.”
“주변 아주머니께 물어본 결과 그렇게 남편 욕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면서요.”
“하. 지금 자신이 누구 발목을 잡고 있는지는 모르나 보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임금이 쥐꼬리만 하다면서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을 피해 도망쳐 왔다며 생활비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빌린 돈도 많습니다.”
“일한 게 다 그곳으로 나갔나 보군. 빌린 돈을 갚으니 생활비가 부족했겠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진에 나와 있는 걸 보시면 알겠지만 이미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습니다.”
“허…!”
남 비서의 말에 주민이 카드 내역을 살펴봤다.
이미 빚 때문에 현금 서비스를 받아쓰느라 신용 불량자가 된 지 오래였다.
카드를 쓰지 못해서 일한 돈을 현금으로 받아썼고, 그 돈을 어디서 사용했는지 세세하게 쓰여 있었다.
“쯧. 확실히 먹는 데 쓴 돈이 과하군.”
“저축은 전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남자와 새살림 차렸는데 저축을 했을 리가. 오히려 갖다 바치고 있는 것 같군.”
자식 버리고 가더니 다른 남자를 만나서 아주 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아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떻게 눈 맞았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주민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란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고, 일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둥 하더니 일한 기간이 길어봤자 3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3개월 동안 번 돈으로 버티다가 안 되면 다시 일을 하고, 금세 그만두고 또 짧게 일하고.
“고 변호사에게 연락해.”
“이미 연락 넣어놨습니다. 곧 답변이 올 겁니다.”
“그래.”
아이들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으면 그걸 치워주는 게 어른들의 일이 아니겠나.
주민이 시린 눈빛으로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을 노려봤다.
사진 속에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남자와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이미란이 보였다.
* * *
며칠 후, 지한이 다음 작품을 알아본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영훈 오빠는 갑자기 자기한테 온갖 섭외 전화가 몰려든다며 울상을 지었다.
‘공 사장님이 바로 들어갈 작품 알아보나 보네.’
이미란이 찾아왔다는 것을 안 이상, 판을 깔기 위해서 지금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걸 듣고 방송가 사람들이 영훈 오빠를 괴롭히는 걸 테고.
“오빠 미안해.”
“응? 아니 네가 왜 미안해? 아, 잠시만. 또 전화 왔다.”
“응. 힘내.”
저녁에는 영훈 오빠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먹어야겠다.
아주머니가 돼지갈비를 냉장고에 재워 두셨으려나?
“네?!”
“?”
“이신성 배우요? 우리 지한이를요?”
이신성이라면 그남그녀에서 지한이 누나 남친으로 나온 사람!
저번에 시상식에서도 지한이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것 같던데.
지연이 부엌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영훈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네. 혹시 시간이 될까요?
“우선 대본 먼저 보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보고 답을 드려도 될까요?”
-네. 죄송하지만 되도록 빠르게 될까요? 작가님이 대본을 좀 느리게 쓰셔서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낸 영훈이 긴장이 풀렸는지 소파에 축 늘어졌다.
“왜 그래?”
“이신성 배우가 지한이 카메오로 출연할 수 없냐고 물어봐서.”
“목소리 다른 거 같던데.”
“물론 이신성 배우 매니저지. 그런데 지연이 넌 목소리만 듣고 바로 누군지 알아?”
“왜 몰라?”
지연의 대답에 영훈이 눈이 잠시 먼 곳을 보듯이 흐려졌다.
“그래. 넌 되겠지. 아무튼 지한이가 까메오로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아. 지한이가 연기하는 거 좋아하니까. 그리고 우리 다음 작품은 미국 가서 할 거잖아. 가기 전에 한국에서도 촬영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네가 말한다면 그렇겠지. 팬 서비스 차원에서도 나쁘지 않고. 지한이는 아직 신인이잖아.”
“지한이 상 받았는데도 아직 신인이야?”
“신인이지. 신인치고는 말도 안 되게 잘 나가긴 해도. 국내 팬들을 무시할 순 없지. 어찌 됐든 지한이는 한국 사람 아니냐.”
“응.”
까메오라.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거 같다.
짧게 출연하니까 이미란이랑 만나고 나서 빠르게 미국으로 피해 있기도 좋고.
괜히 걸림돌 때문에 급하게 다른 작품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
이왕이면 대본도 좋았으면 좋겠는데.
‘뻔한 배역이 들어와도 이번에는 조금 감수해야 하나?’
빨리 대본이 보고 싶어졌다.
51. 잡았다, 이놈!
우리는 이신성 배우가 출연하고 있는 <선고하겠습니다>에 지한이를 카메오로 출연시키기로 했다.
지한이 맡은 역은 살해당한 피해자의 아이 역.
그 아이가 법정에서 증언하는 게 지한이 연기할 장면이었다.
눈앞에서 살해당한 피해자를 보고 충격받은 아이가 법정에서 울분에 차 연기하는 장면은 꽤 괜찮았다.
이러한 다크한 분위기도 괜찮지.
“형! 오늘 촬영 안 하는데도 가도 돼?”
“물론이지. 미리 촬영장 보고 싶다고 해서 허락도 받았어.”
“형 멋져!”
“그렇지? 이 형이 이제 좀 잘 나간다 이거야.”
이 오빠가 또 오버하네.
어휴. 얼른 오빠가 다른 사람도 담당할 수 있게 커야 할 텐데.
이러다가 팀장도 못 달아보는 거 아니야?
“오빠 더 열심히 일하자.”
“지연아 오빠 열심히 일하는 거 안 보이니?”
“다른 매니저 오빠는 방송국이랑 지방이랑 막 왔다 갔다 한다던데 오빠는 맨날 숙소랑 회사만 다니잖아.”
“나도 가끔 다른 데 지원하러 갈 때 있어.”
“그치만 전담은 우리가 전부지?”
“…너네가 다른 사람 3명 맡는 것보다 더 나아.”
“가성비가 좋다는 거네.”
“가성비. 지연이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워왔어?”
정곡인가 보네.
화낼 것처럼 무섭게 눈을 떴지만 오빠가 화내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누나 가성비가 뭐야?”
“다른 신인배우를 맡는 것보다 지한이 널 맡는 게 몇 배는 더 좋다는 말이야.”
“그렇구나! 형! 나 가성비 좋아!”
“지한아 어디 가서 가성비 좋은 배우라고 소개하지만 말아다오.”
내가 잘못했다.
오늘도 영훈을 놀려준 지연이 상쾌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왕 왔으니 여기 스태프들이랑 이신성 배우한테 인사하러 가야지.
오늘 있을 소동의 중요한 증인들이니까.
지연이 뒤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우리를 따라오던 택시가 조금 떨어져서 정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이다, 이미란.’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 차에 숨어있을 이미란을 보고 지연이 차갑게 웃었다.
* * *
“안녕하세요!”
“어? 왔어요? 반가워요!”
세트장에 들어선 지한이 오가는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오지한이다!’라고 외치며 놀라는 것이 한 편의 코미디 같았다.
아니 다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할리우드 배우 겸 작년 청소년 연기상 수상자인 사람 처음 봐?
“오지한 군!”
<선고하겠습니다>의 연출을 맡고 있는 메인 PD가 다가와 지한이에게 인사했다.
무려 월드컵 응원곡을 부른 사람 중 한 명인 데다가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다.
월드컵과 할리우드!
무려 치트키나 다름없는 타이틀에 PD의 얼굴에 따뜻한 햇살이 깃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라도 더 출연할 생각이라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죄송하지만 지한이 출연에 관한 얘기라면 저한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영훈이 틈을 타 출연 연장을 제의하는 PD의 앞을 막아섰다.
오, 지금 좀 매니저 같았음.
“하하하하하하하. 물론이죠.”
“지한이가 얼마 후면 미국으로 가야 해서요. 그 사이에도 이런저런 스케줄이 많답니다.”
“이런. 그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시간을 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영훈이 PD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 지연은 지한의 손을 잡고 출연자 대기실로 갔다.
그곳에서 판사 복장을 하고 있는 이신성을 발견했다.
젊고 혈기가 넘치는 열혈 판사 역을 맡은 이신성은 재벌을 연기할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안녕하세요!”
“어. 처남 왔어?”
그남그녀에서의 관계를 가져오며 신성이 지한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한이 안으로 들어가며 싱글벙글 웃었다.
“네! 저도 형부랑 같이 찍어서 좋아요.”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는 매형이라고 해야지.”
“매형이에요?”
“그래. 형부는 언니의 남편.”
“그럼 우리 누나는 형부라고 하겠네요.”
“네 누나?”
신성의 시선이 지연이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지연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지연입니다.”
“네가 지한이 누나구나. 반가워. 나는 이신성이라고 하고, 저기는 내 코디인 효영이. 저기는 내 매니저인 선재.”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신성이 지연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잘 받아주네?
연예계에는 보이는 이미지랑 실제 성격이 다른 이들이 많아서 조심해야 된다고 들었는데.
지한이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렇고.
이신성은 성격이 괜찮은가 본데?
하긴 돌아오기 전에도 이신성은 마약, 도박, 성범죄 등과는 무관한 배우였다.
“지한이가 카메오 마음에 든대요.”
“정말? 괜찮았어?”
“네! 힘들고 무섭지만 해야 할 말을 하는 게 멋있었어요! 범인 잡는 걸 도와주는 거잖아요.”
“정확하게는 벌을 받는 걸 도와주는 거지.”
“그거요! 제가 나쁜 사람 혼내주는 거 돕는 역할인 거죠? 그렇죠?”
“맞아.”
“영웅 같아요. 용기 내는 거요. 저는 블랙 같은 사람들이 좋아요.”
“블랙?”
“파워레인저 블랙이요.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같은 영웅이죠.”
“파워레인저? 너희들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네!”
“그럼 난 어때?”
“음. 형은 공주님 같은데.”
“내가!?”
지한의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신성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게 맞지.
이신성 배우는 열혈! 같은 느낌보다 부드러운 조언자나 지도자 같은 이미지거든.
파워레인저 같은 전대물에서 부드러운 조언자는 대게 이 세계의 공주님이나 외계인이 다였다.
외계인보다는 공주님이 낫지.
똑똑
문을 열고 조연출이 들어왔다.
“이신성 배우. 스탠바이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코디인 효영이 다가와 신성을 한 번 더 점검했다.
“그럼 내가 촬영하는 거 볼래? 지한이는 같이 드라마 찍을 때도 내가 연기하는 거 몇 번 못 봤지?”
“네! 좋아요!”
같이 나오는 씬이 얼마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기껏해야 골목 씬, 여자친구집 방문하는 씬, 병원 씬 정도밖에 없을 걸?
이신성의 연기를 보는 것도 꽤 괜찮을 거다.
그는 앞으로도 꽤 자주 주연을 맡을 테니까.
신성이 카메라 앞으로 들어가고 신성의 매니저와 코디가 서 있을 때 PD를 상대하고 온 영훈이 기가 빨린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빠. 누굴 만나고 온 거야?”
“PD님이지 누구야.”
“형. 발에 밟힌 잡초 같아.”
“꼭 그렇게 비유해야 했니?”
영훈이 서글프게 웃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효영과 선재를 보고 인사를 나눴다.
“이거 끝나고 여기 MBS 로비에서 인터뷰하기로 했다는 거 잊지 마.”
“지한이 드라마 출연하는 거 때문이죠?”
“그것도 있지만 지한이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가 성적이 좋잖아. 흥행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인터뷰를 하려는 거야.”
“나 인터뷰 잘 못 해.”
“괜찮아. 어제 누나랑 연습했잖아.”
“그거 말고 딴 거 물어보면 어떡해?”
“이상한 거 물어보면 영훈 오빠가 막을 거고, 오빠가 안 말리면 지한이가 편한 대로 대답하면 돼.”
“맞아. 일단 인터뷰 신청한 곳과 기자는 회사에서 한 번 거르니까. 만약 우리가 인터뷰 거절한다고 해도 회사에서 전부 수습할 거니까 걱정하지마.”
우리 지한이 하고 싶은 말 다 해.
인터뷰에 긴장하는 지한을 위해서 영훈과 지연이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그들이 오늘 찍어갈 사진은 정해져 있으니까.’
지연이 영훈을 돌아봤다.
“오빠 오늘 우리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해. 만약에 잠시 어디 갔다 왔는데 우리 없으면 꼭 찾아. 알았지?”
“그래. 알았다. 그런데 왜 그러니?”
“기자들은 무서우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인터뷰해달라고 하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오빠가 꼭 붙어 있을게.”
기자도 이쪽에서 쓰기 나름인데.
왜 그러ㅈ….
‘아. 멍청한 고영훈. 애들이 처음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까먹었어?’
지한이 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사회면이었다.
멍청한 자신의 머리를 타박하며 영훈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영훈 오빠한테도 지시를 내렸으니 이제 타이밍을 볼까?’
모처럼 좋은 판을 만들어줬는데 <선고하겠습니다> 팀에게 피해를 줄 수 없지.
지연이 촬영장 입구를 힐끔거렸다.
* * *
지연이 기다리고 있던 타이밍은 금방 다가왔다.
신성이 연기하던 씬이 무사히 끝나고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씬을 촬영하기 위한 잠깐의 휴식시간.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배우마저 다음 촬영을 위해 바쁘게 준비하는 시간.
지연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이 익숙한 체형의 사람을 발견했다.
‘용케 들어왔구나, 이미란.’
이때는 사생팬이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대비가 안 된 모양이지?
스태프들 사이로 이미란이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다니.
“오빠. 목말라.”
“잠시만. 마실 거 사 올게.”
“응. 우린 여기서 세트장 구경하고 있을게.”
“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
“알았어.”
지연이 지한의 손을 붙잡았다.
다음 씬을 위해서 지금 촬영하고 있던 세트의 장비들이 치워져 있었다.
여기라면 사람들이랑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이곳에서의 촬영이 끝나서 사람들이 그다지 오가지 않으니 이미란이 노리기 좋았다.
“지한아. 무슨 일 있어도 너무 놀라지 마. 알았지?”
“왜? 무슨 일 생겨?”
“응. 지한이가 놀랄 일.”
“뭔데, 뭔데?”
재밌는 일인 줄 알고 기대하는 지한이에게 미안했지만 그런 일이 아니야.
오히려 가슴 섬뜩한 일이지.
“지한아, 지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