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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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금은 영훈 오빠의 인생 상담을 해 줄 때가 아니었다.

“제발 가자가자가자!”

“힘내요!”

“오~필승 코리아!”

때로는 미래를 알고 있어도 즐거운 일이 있기 마련이다.

“고오오오오올!!!!!”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대한민국이 열기에 휩싸였다.

* * *

“진짜로 올라갔군.”

주민이 승부차기 끝에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선수들을 보고 흥분에 차 말했다.

고개를 돌리니 동생과 서로 끌어안은 채, 방방 뛰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우리 4강 갈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음성이 떠올랐다.

흥분에 차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가득했지만 주민의 눈에는 지연이와 지한이만 보였다.

특히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지연이.

“정말이지 대단하다니까.”

안은 사람이 자신인 줄도 모르는 본부장을 마주 안아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일을 하러 오는 건지 응원을 하러 오는 건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서서히 월드컵의 열기에서 빠져나왔다.

대한민국은 아쉽게도 4강에서 무너졌다.

역대 최고의 기록을 세운 선수들에 대한민국은 초등학생마저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

“오버헤드 키익!”

“골든골!”

“헤딩!”

월드컵은 끝났지만 광고업계는 너 나 할 것 없이 대표단 선수들을 광고 모델로 썼다.

어디서나 그들이 나왔고, 여전히 경기 하이라이트가 곳곳에서 틀어졌다.

“자, 이제 다들 정신 차리고 일해 보자고.”

“네!”

탑엔터 역시 업무로 돌아왔다.

당분간 축구 대표 선수들이 광고를 점령해서 큰 건수는 안 들어오겠지만 장기 계약을 맺은 곳을 잘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아직 빅 이벤트가 남아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왔다고.”

“네. 개봉 일정이 확정되었답니다.”

“그래.”

월드컵에서도 같은 조에 있었던 미국에서 온 연락이 어쩐지 친근했다.

유일하게 무승부 결과를 만들었던 경기이니 더 정이 갔다.

“그래서 언제 개봉한다고 하던가?”

“7월 23일이라고 합니다.”

“그래.”

월드컵으로 인한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시기.

과연 지한의 영화를 성공적으로 개봉할 수 있을 것인가.

첫 주연

어린 나이

동양인

모든 것이 흥행에 마이너스로 작용하겠지만 주민은 어쩐지 전혀 승산이 없을 것 같지 않았다.

49. 터졌다!

월드컵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을 때.

지한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개봉했네요. 할리우드 영화는 오래 걸린다고 들었는데.”

“그건 후반 작업이 많을 때. Moonlight는 CG 작업할 것도 많지 않았고, 사실 후반 작업도 끝났다고 들었는데 월드컵 때문에 개봉을 조금 미뤘다고 들었어.”

아하.

하긴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이벤트가 있을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지연에게 영훈이 뭔가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덧붙였다.

“지연이 네 그림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CG를 넣을 수가 없었대. 그림에 맞는 음악을 찾는 게 더 힘들었다던데?”

“아….”

내 그림을 좋게 평가해 주는 에밀리와 데이빗에게 고마웠다.

잘 그렸겠지?

헨리 선생님한테 먼저 허락 맡기도 했고, 지한이도 좋다고 해 줬으니까 크게 고민하진 않았는데 혹시라도 내 그림이 영화에 맞지 않아서 동생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마음을 졸였다.

“오빠가 생각할 때, 지연이는 조금 더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 내가 봐도 진짜 멋지더라. 잘했어.”

“정말?”

“그럼. 사장님이 지연이 그림 가지고 싶었는데 에밀리? 그 사람이 먼저 그림을 가져갔다면서 분해하시더라. 하하하. 그거 때문에 사장님이 분해서 한동안 기분이 안 좋으셨지.”

“사장 아저씨도 내 그림 좋대?”

“사장님은 네가 낙서를 그려서 줘도 좋아하실걸?”

흠. 다음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왜 내 그림이 좋은지.

“오빠.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지한이 영화?”

“응!”

큰 보탬은 안 되겠지만 우리가 가서 관객 수를 채워줘야 하지 않겠어?

원래 장사든 뭐든 처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럴 줄 알고 영화 티켓 미리 준비해뒀지.”

“오올. 오빠 뭔가 매니저 같다.”

“지연아… 오빠 매니저야.”

매니저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보모로서의 업무를 더 많이 본 영훈이 슬프게 반박했다.

* * *

“너희들 빨리 와!”

“간다. 가. 아니 너는 이 더운 날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내 말이. 해수 너 이신성 나오는 거 외에는 잘 안 보지 않았어?”

“야, 너희들 말 똑바로 해라. 누구 마음대로 이신성이야. 이신성님이라고 해.”

해수의 말에 친구들의 얼굴 위로 ‘지랄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겨운 친구들의 반응에 해수 역시 욕으로 화답해 주었다.

“아무튼 내가 오늘 점심 쏘기로 했으니까 너네 같이 가야 해.”

“내가 그놈의 햄버거에 넘어가서.”

“이럴 줄 알았으면 돈까스라도 써는 건데.”

햄버거에 혹해 온 친구들이 지금이라도 돌아갈지 고민하는 얼굴로 해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래. 뭐 교양 채운다는 마음으로 영화 한 편 뚝딱 보고 와야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양새였지만 교양을 채운다는 정신승리로 아이들이 영화관에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가 볼 영화 제목이 뭐라고?”

“”

“제목이 왜 그따위냐.”

“우리 동생 영화 제목에 트집 잡지 마라.”

동생이란 말에 친구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수 너 외동이잖아.”

“그래. 니가 동생이 있는 열 받음을 알아?”

“맞아. 동생은 다 웬수야. 전생에 내가 걔를 죽인 업보를 받는 게 틀림없어.”

해수의 친구인 서림과 소희는 각각 여동생, 남동생이 있었다.

성별에 상관없이 두 친구들은 전부 동생이라면 학을 뗐다.

남동생이 있는 소희는 동생과 물리적으로도 싸운다고 한다.

“걔들이랑 우리 지한이는 종이 다르다고.”

“퍽이나.”

그래도 해수가 말하는 지한이라면 알고 있다.

무려 8살의 나이에 할리우드에 진출한 세기의 대천재.

해가 바뀌었으니 9살이다.

월드컵 기간 동안 조수경과 오지한이 같이 부른 노래가 안 쓰인 방송이 없었다.

“걔는 노래를 더 잘하는 거 같던데 왜 가수를 안 하지?”

“무슨 소리야! 우리 지한이는 연기를 더 잘한다고!”

“내가 봤을 땐 노래를 더 잘 부르던데?”

“너희들 생각을 내가 바꿔준다. 오늘 영화 보고 나면 그런 생각 싹 가실걸?”

“난 자막 있는 영화는 별론데.”

“왜 한국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자막으로 봐야 하냐.”

“아니, 할리우드에 진출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지! 우리나라 배우가 무려 저 미국에서 활약을 하고 있잖아.”

“글쎄다.”

“아, 진짜. 너네 영화 다 보고도 그 말 하는지 두고 보자!”

“네에 네에.”

“네가 그래도 내 생각은 안 바뀔 거 같은데.”

“씁! 햄버거 안 사 준다?”

저항하는 친구들을 햄버거로 협박해 영화관에 앉힌 해수가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기다렸다.

친구들이랑 투덕거리는 사이 상영 시간이 다 되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가 시작되었다.

* * *

조지아 마벨과 앤디 마벨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들의 아이는 남다른 점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다지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리온. 아가. 어디서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가 왔을까.”

보채는 것도 없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잘 울지도 않았다.

게다가 부모의 좋은 점만 닮아 어찌나 예쁜지, 천사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조지아와 앤디는 자신들이 축복받은 부부인 줄 알았다.

“저기. 어머님. 리온이 병원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자폐 증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어머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리온이 병원에 한번 데려가 보세요.”

하늘이 무너졌다.

“자폐증이 맞습니다. 평소에 리온이 어머니와 눈을 잘 마주쳤나요?”

맞췄었나? 리온은 그냥 얌전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언제가 얌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자기를 부를 때 엄마를 돌아보던가요?”

잘 모르겠다.

밥 먹일 때나 씻길 때 아이를 부르기는 했지만 잘 오지 않아도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외에는 리온은 조용히 있었으니까.

“어머니. 리온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조지아는 의사의 말에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인식할 수 있었다.

‘착하다’라는 핑계로 리온의 남다름을 흘러버렸던 자신들의 안이함이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조지아는 지난날의 자신을 후회하며 필사적이라고 할 만큼 리온의 치료에 집착했다.

그 모습에 남편인 앤디와 싸우는 것은 예사였다.

치료에 들어간 리온을 보며 조지아는 가슴을 쳤다.

“오늘은 그림을 그려볼 거예요.”

그림을 배운 리온은 이제 하루 종일 하얀 종이 앞에 앉아있었다.

리온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다 못해 잘했다.

아이의 그림을 본 의사의 지인 덕분에 리온의 재능이 알려졌다.

그림을 후원하기 위해 나서겠다는 자가 나타났다.

“이 아이는 천재입니다!”

“가끔 자폐증을 가진 아이 중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죠.”

“리온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조지아와 앤디에게는 아이의 치료 외에 중요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의 병을 가지고 더욱 난리 치는 미술계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연락을 딱 자를 수 없던 것은

아이가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가. 왜 달만 그리니?”

“달이 예뻐서.”

“왜 예쁜데?”

“어두운데 제일 빛나.”

리온이 달을 그렸고

조지아는 달로 대화했다.

앤디는 달을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족들을 데려갔다.

환한 달빛이 내리는 숲속에서 아이가 밖으로 나섰다.

달을 보러 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곳에 와 버렸다.

점점 차가워지는 손끝에 리온이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때,

“리온!”

“아가!”

조지아와 앤디가 나타났다.

그들이 자신을 안아주자 따뜻한 달빛이 자신에게도 스며들었다.

리온이 조지아와 앤디를 마주 끌어안았다.

“아가 뭐 그리니?”

“달.”

숲을 다녀온 뒤로 리온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달을 그린다고 하면서 자꾸만 조지아와 앤디를 그렸다.

“경과가 점점 좋아지고 있네요.”

“그런데 요즘 그림 그리는 것에 푹 빠져서 밥도 잘 안 챙겨 먹어요.”

“하지만 밥 먹자고 하면 그리는 걸 그만두고 오죠?”

“네.”

“좋아졌네요.”

의사가 조지아의 불안을 덜어주었다.

정말 우리 아이가 나아가고 있구나.

조지아가 목 놓아 울었다.

화면 한가운데에 리온이 나타났다.

아이의 손에 기다란 붓이 걸려있었다.

“….”

붓을 내려놨다.

드디어 달을 그렸다.

“리온? 이게 뭐야?”

“달이야.”

“이건, 우리잖니.”

캔버스에는 행복하게 웃는 조지아와 앤디,

그리고

리온이 있었다.

아이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엄마.”

“…!”

“아빠.”

“…리온.”

“나.”

“리온!”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온 날이었다.

* * *

“…킁.”

“너희 울었냐?”

“난 안 울었다.”

“안 울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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