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96)

* * *

시간이 흘렀다.

[2002 월드컵 우대입장권 2차 판매 첫날 매진]

[업그레이드 코리아. 질서 지키기]

[월드컵 전력분석 A조]

[LZ전자, 월드컵 마케팅]

월드컵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전역이 들썩였다.

[‘월드컵 전야제, 세계적인 이벤트로’ 총 9시간 호화 축제]

[월드컵 전야제 리허설 현장]

[월드컵 전야제 입장권, 인터넷 배포]

세계인의 축제.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TV 앞에 모이게 만드는 화합의 장.

월드컵 전야제 날이 밝았다.

48. 쟤가 우리 애예요.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더니 전야제 날에 결국 비가 내렸다.

비협조적인 날씨에 관계자들은 걱정이 가득했지만

구경을 온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팀장님. 장비 이상 없습니다.”

“공연 참가자들은.”

“전부 공연할 수 있답니다.”

“그래. 이거 망하면 우리 모가지로 안 끝난다. 알지?”

“넵!”

군기가 잔뜩 들어간 스태프들이 빗방울도 아랑곳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제 리허설을 한 출연자들은 비가 와도 공연을 강행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오빠. 뭐래?”

“형, 나 노래 못 불러?”

몇 개월 동안 연습했는데 무대가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지한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진짜 열심히 준비했는데.

내 노래 기대한다고 했는데….

울 것 같은 지한의 얼굴이 영훈이 손을 허공에 파닥이며 지한을 다독였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문제없어. 지한이 넌 노래만 신경 써.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응!”

든든한 영훈의 말에 지한이가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해야지.

어떻게 준비한 공연인데.

전야제 며칠 전부터 계속된 리허설과 공연 연습.

그리고 오늘 하루를 위해서 새벽부터 준비한 지한까지.

모두가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능력 있는 소속사가 있으면 편하다니까.’

지연이 오늘을 위해서 몇날 며칠을 고생한 탑엔터 직원들을 떠올렸다.

* * *

비 예보가 온 날부터 탑엔터 회의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월드컵 축하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영광이다.

이 일로 인해서 지한의 인기는 한층 더 높아지리라.

그리고 그걸 떠나서.

‘우리 애 첫 공연인데 비 때문에 망칠 수 없어.’

지난 5개월 동안 지한이 엄청 열심히 연습한 것은 탑엔터 직원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겨우 비 때문에 그 중요한 첫 무대를 못 서게 된다니.

그런 일 따윈 일어나서도 안 됐다.

아무튼, 지한이 무대 하나 성공시키겠다고 탑엔터 직원들은 사장을 조르는 지경까지 갔었다.

‘사장님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절대 취소되면 안 돼요.’

‘조수경 선생님도 무대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사장은 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

“내가 전화하지.”

전화 한 통에 모든 문제를 해결한 공 사장을 보고 모두가 환호했다.

며칠 전 지한의 곡을 전야제 때 부르냐 마냐로 음반사와 싸움까지 날 뻔했는데 그때도 공 사장의 전화 한 통에 문제가 해결됐었다.

역시 빽이 든든한 사장이란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 * *

공 사장의 활약을 떠올렸던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 우리 사장님 진짜 멋져.

똑똑.

“들어오세요.”

“지한이 안녕?”

“선생님!”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인 조수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번에 지한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지연마저 월드클래스 유명 인사의 등장에 눈을 빛냈다.

“안녕하세요!”

“지연이 너도 역시 있었구나. 정말이지 너네 둘은 떨어지질 않는다니까.”

곡을 연습할 때나, 녹음할 때나, 리허설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는 아이들을 보고 수경이 활짝 웃었다.

“지한이 오늘 노래 잘할 수 있지?”

“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이겠지.”

곡을 준비하는 동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지한을 보고 놀랐었다.

항상 가르치는 그 이상을 해내는 아이니 뭐든 해 주고 싶었다.

“너희들 정말 성악 해 볼 생각 없니?”

“저는 연기하는 게 좋아요.”

“저는 생각이 없어요.”

목표가 확고한 지한과 아무런 생각이 없는 지연의 대답에 수경이 아이처럼 꺄르륵 웃었다.

만날 때마다 묻는 말이지만 어쩜 이렇게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는지.

“지연이 네가 아직 내 공연을 못 봐서 그래. 오늘 이 아줌마가 엄청 멋진 무대를 보여줄게. 아마 리허설 때와는 비교도 안 될걸?”

“선생님 노래 기대하고 있어요.”

항상 직접 한 번 보고 싶었다.

무려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니까.

뉴튜브로 봤던 그녀의 아리아는 액정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박력이 넘쳤으니까.

‘수경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는 이번 월드컵 주제곡보다 훠얼씬 유명해질 거야.’

지연이 다시 한번 지한의 축하 공연을 찬성했던 자신을 칭찬했다.

기다리는 동안 수다를 떨며 긴장을 풀고, 가벼운 식사에 의상과 메이크업을 점검하니 금세 두 사람이 공연할 시간이 다가왔다.

* * *

“감사합니다.”

조용선이 마지막으로 ‘아리랑 꿈’을 부르고 인사를 했다.

관객들이 조용선의 무대가 끝나고 모든 공연이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무대 위로 크고 작은 두 인영이 나타났다.

“누구지?”

“어? 조수경?”

“비 때문에 일부 공연이 취소됐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줄 알았는데. 조용선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관객들 역시 아직 축제를 끝내고 싶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기분 좋게 다음 무대를 기다렸다.

“저거! 오지한이다!”

“뭐? 지한이?”

“우리 지한이라고?”

지한의 등장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아시아 최초 월드컵 개최에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소프라노

할리우드 스타라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무대의 중앙에 두 사람이 서자 반주가 시작됐다.

서서히 고조되는 음에 조수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와 나 지금 여기에 두 손을 마주 잡고

찬란한 아침 햇살에 너의 다짐 새겨봐♬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가사에 사람들이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고음에 사람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지한의 코러스가 시작됐다.

♬아! 챔피언 이제는 우리 하나 되어

저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를 달려♬

어린아이의 맑고 명랑한 소리가 빗속을 뚫고 관객들의 고막을 두드렸다.

“와아.”

“진짜 좋다.”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노래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 황홀한 노래가 어느새 끝을 향해 갔다.

♬We are the champions

우리는 할 수 있어♬

힘들었던 시기도 우리가 함께 이겨내지 않았냐는 것처럼 말하는 노래에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도 우리가 기적을 보여줄 수 있기를.

와아아아아아-!

그렇게 2002년 월드컵 전야제가 끝이 났다.

* * *

“성공입니다.”

전야제가 끝난 다음 날 신문 기사를 들고 본부장이 사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조간신문으로 전야제의 피날레를 장식한 두 사람의 기사를 보고 있던 주민이 웃는 낯으로 본부장을 맞이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네. 너무 흥분하지 말지.”

“하지만 사장님 지금 모든 매체가 전야제 무대에 대해서 떠들고 있습니다.”

“지한이가 있으니 할 말이 더 많은 모양이군.”

“네. 그리고 지한이가 조수경 선생님과 함께 노래했다는 것과 그 실력이 범상치 않은 것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잘하는 거 아니냐며 벌써부터 지한이 앨범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해.”

“‘아직은’이군요.”

“저번에 회의했던 것처럼 지한이는 변성기가 올 테니 벌써부터 앨범을 낼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금의 지한이 목소리를 남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본부장의 설득에 주민이 턱을 괴고 고민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변성기가 오기 전에 지금의 목소리로 노래를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지한이가 원해야 해.”

“네. 아무렴요.”

애들이 싫어하는 일은 자신들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부장이 보기엔 어떤가?”

“네?”

“우리 지한이 정말 노래 잘 부르지 않던가? 목소리 엄청 좋았지.”

“물론입니다.”

“조수경 선생님도 칭찬했었어.”

“저도 들었습니다. 혹시 다음에 오페라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오페라라. 나쁘지 않군.”

대사를 노래로 하는 것이기에 지한이 흥미를 보일 여지가 다분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오페라가 있던가?

지한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싶은 주민이 머리를 굴렸다.

“어린아이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있는지 알아봐.”

“네. 그럼 지한이에게 오페라 대본을 한 번 흘려볼까요?”

“지금은. 안 돼.”

“예? 왜 안 됩니까?”

“축구 봐야지.”

“아.”

축하 공연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이 축구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래하다가 스트레스 받을까 봐 휴식할 겸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이들의 드리블을 막기 힘들었다.

아직 조기 축구 20년 차의 자존심으로 어찌어찌 드리블을 끊고 있기는 한데 조만간 뚫릴 것 같았다.

“아직 어리잖아. 축제를 즐기게 지금은 내버려 둬.”

“알겠습니다.”

지고하신 사장님의 명령에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영화가 개봉한 뒤 다음 작품을 들어가야 하니 지금부터 미리 오페라와 뮤지컬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 * *

“힘내!”

“가라!”

TV 앞에 앉은 아이들이 빨간 티셔츠를 입고 소리 질렀다.

옆에 있는 영훈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이들과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힘들지 않을까?”

“그건 아닐걸?”

쓸데없이 승부를 예측하느라 신경전 하는 이들을 보고 지연이 말없이 쿠션을 끌어안았다.

이전에는 집에서 가족끼리 봤었는데 지금은 탑엔터 온 직원들과 함께였다.

확실히 응원은 다 같이 하는 게 더 재밌다.

“지연아 오늘은 어떨 거 같니?”

“왜 저한테 물어요?”

“그거야.”

네가 그동안 경기 결과를 다 맞췄으니 그렇지.

“첫 경기는 이겨야 하지 않을까?”

“이길 거예요.”

6월 4일 폴란드전

2:0 완승

“미국도 함 이겨 보자!”

“지지만 않으면 되죠.”

6월 10일 미국전

1:1 무승부

“제발제발제발제발 16강 갈 수 있다.”

“지한아 우리도 붉은 악마 티셔츠 살까?”

6월 14일 포르투갈전

1:0 승리

“아아아아악!!!!!”

“16강 갔드아아아아아!!”

그날은 회사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건물이 함성으로 떨렸다.

온 국민이 발을 굴렀으니 지진이 난다고 느껴도 거짓은 아니었을 거다.

아무튼 모든 경기 결과를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맞췄으니 회사 사람들이 결과를 묻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지연아 혹시 내 앞날은 어때?”

“오빠는 지금처럼만 일해.”

지한이 전담이니까 사고만 안 치면 무조건 승승장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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