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월드컵 때문에 개봉을 미룬다는 것도 모르고 손 위원은 빨리 지한이 연기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지한이 섭외하고 진행하겠습니다.”
“네. 빨리 보내죠. 조 선생님이랑 일정도 맞춰봐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이제 반년도 안 남은 일정에 조직 위원회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 * *
“정식으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당연하지.”
지한이가 떨어질 리가 없지 않냐는 주민의 눈빛에 보고하러 왔던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실장과 팀장들에게 그들을 병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전달해야겠다.
“어찌 됐든 지한이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곡은 넘어왔나?”
“네. 같이 넘어왔습니다. 곡을 함께 부를 사람이 소프라노 조수경 선생님입니다.”
본부장의 말에 주민이 이외라는 듯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천상의 목소리.
클래식의 불모지인 이곳에서 그런 위대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지한이가 더 열심히 해야겠군.”
“네. 하지만 금방 늘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 아이들이니까.”
시간이 있으니 그 정도면 개막식까지 문제없겠지.
“애들한테 곡 전달하고 트레이너한테 신경 쓰라고 해.”
“알겠습니다.”
공 사장의 지시로 지한이를 위해서 탑엔터 아이돌 연습생 트레이너 선생님이 특별히 지한이를 전담하게 됐다.
얼마 전에 보컬의 기본을 가르치던 신기주 트레이너였다.
“악보 어려워. 검정 콩나물 같애.”
“나도 음표만 보고는 잘 모르겠다. 집에 가서 계속 들어보자.”
“응.”
일단 이론적인 것보다는 몸으로 익히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계속 듣고 계속 불러보는 게 더 빨리 몸에 익었다.
개막식은 5월 말이니 그때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만 우리라면 충분하지.’
지연이 복잡한 악보를 보고 있는 지한을 다독였다.
“일단 가사만 보고 계속 듣기만 하는 거야.”
“알았어.”
아이들이 의지를 다졌다.
어떻게 해서든 이 곡을 마스터하겠어.
* * *
곡을 받은 날로부터 아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같은 곡을 듣는 아이들을 보고 오히려 영훈이 걱정했다.
“얘들아. 너희들 너무 집에만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밖에 추워.”
“지한이 넌 드라마 같이 찍었던 배우들이랑 같이 스키 타러 가기로 하지 않았니?”
“한재 선배님이랑 신성이 형은 드라마 들어간대.”
“아. 월드컵이 있으니 그 전에 하나 들어가나 보네.”
내 기억으로는 그때쯤 성공한 드라마가 하나밖에 없을 텐데.
뭐, 알아서 하겠지.
지한이랑 관련된 거 아니면 관심 없으니까.
“그럼 형이랑 드라이브하러 갈까?”
“이상하네. 오빠 안 바빠? 왜 자꾸 우리 밖으로 데리고 가려고 해?”
“바쁘지. 그런데 너희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니까. 너희들 지금 한 달 정도 아무 데도 안 간 거 알고 있어?”
“알아.”
“하지만 노래 연습해야 하는데.”
“그것도 맞지만 너희 연습 속도라면 제시간에 충분히 맞을 거야. 그러니까 형이 하는 말은 배우는 휴식도 잘해야 한다는 거야.”
“나 잘 쉬고 있는데.”
“으음. 뭐라고 할까. 지한이는 아직 어리지?”
“응.”
“어리니까 아직 경험이 부족해.”
“경험?”
“모르는 게 많다는 거야.”
영훈이 말에 지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30살까지 살다가 왔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지한이는 아직 보고 듣지 못한 게 많으니까.
‘영훈 오빠가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어야 했는데. 지한이는 아직 물놀이도 제대로 간 적도 없고 뮤지컬을 본 적도 없지.’
콘서트나 클래식 감상, 놀이동산, 박물관 등등.
하지 못한 것이 더 많았다.
경험하지 못하고 내가 가르쳐 준 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알기 힘들다.
그래서 많은 걸 해 주려고 했는데.
‘영훈 오빠가 시기적절하게 잘 말했어. 쉬는 동안에 많은 걸 경험하게 해 주는 게 중요해.’
영훈의 의견에 동의한 지연이 의견을 냈다.
“지한아 우리 경기장 가 볼래?”
“경기장?”
“아직 야구랑 축구 경기 직접 가서 본 적이 없잖아. 가보면 다를걸?”
“그럼, 월드컵 경기장에 가 볼래? 거기 공원도 크게 조성했다더라.”
“왜 하필 월드컵 경기장이야?”
“거기서 개막식 행사가 열린다고 하더라.”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있어?”
“그건 오빠가 알아볼게.”
영훈이 알아보러 나가자 지한이 발을 까딱이며 말했다.
“누나 나 경기장 처음 가봐.”
“나도.”
우리가 있던 곳은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니 경기장이 있을 리도 만무하지.
“경기장은 어어어엄청 크겠지?”
“그럴걸?”
“거기 있으면 선수들 잘 보일까?”
“화면이 더 잘 보일걸?”
“그럼 경기장 왜 가?”
“음.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누나 생각에는 역시 응원하는 맛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오래된 샤롯 팬인 이미란과 이모가 사직 구장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있으니까.
아마 같은 팬들과 함께 응원하는 재미 때문에 경기장에 가는 걸 거다.
“얘들아! 형 갔다 왔다. 팀장님이 알아보신대.”
“오.”
“멋져!”
“그렇지?”
본인이 한 것도 아니면서 영훈이 으쓱였다.
저런 걸 보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엄한 놈이 받는다는 거였지?
박 팀장님 앞에서도 저러는지 두고 보자.
“경기를 직접 본다면 더 좋을 텐데.”
“겨울이니까 어쩔 수 없지. 원래 추울 때는 조심해야 된다고 했어. 뼈 부러진다고.”
“…누가 그랬니?”
“할머니가.”
“할머니께서 참으로 맞는 말씀을 하셨구나. 그런데 너희. 이번에 안 내려가도 되겠어?”
“사람들이 뭐라 한다고 오지 말랬어. 할머니가 전화 자주 하래.”
“멋진 분이시네. 너희들은 안 서운해?”
“괜찮아. 할머니가 우릴 위해서 해준 말이니까.”
“나도! 누나랑 형들은 보고 싶은데 삼촌들은 좀 무서워.”
아이들이 보고 싶으실 텐데도 혹시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을까 봐 오지 말라고 하는 할머니를 보고 영훈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설 지나고 다른 사람들 안 만나게 갔다 올까?”
“그래도 돼?”
“물론이지. 너희들 할아버지랑 할머니만 괜찮다면.”
“좋아! 전화해볼게.”
영훈의 배려에 지연이 받아들였다.
삼촌이랑 이모들은 자신들끼리 서로 의가 틀어졌지만 우리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언니들이랑 오빠들은 못 보겠지만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오랜만에 가서 쉬고 와야지.
지연이 전화기를 들었다.
* * *
며칠 후, 우리들은 무사히 조직 위원회의 협조를 받아 경기장에 미리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었다.
비시즌이라 그쪽에서도 순순히 수락했다.
차를 타고 개막식이 열릴 경기장에 도착한 지한이 차에서 내려 거대한 건축물을 보고 질린 안색이 되었다.
“누, 누나아.”
“왜?”
“엄청 커.”
경기장에 압도된 듯 지한이 지연의 소매를 잡고 등 뒤에 숨었다.
직접 본 경기장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다.
여기는 월드컵 때문에 일부러 큰 규모로 지은 곳이다 보니 처음 경기장에 온 지한으로서는 압도되는 것이 있었다.
“괜찮아. 누나 손 꼭 잡아.”
“으응.”
“지연이 너야말로 내 손 꼭 잡아야지.”
“응.”
지한을 잡지 않은 손으로 영훈의 손을 잡았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지한을 보고 얼굴이 상기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도움받는 입장인데요.”
영훈과 대화하면서도 직원은 지한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지한이 팬인가 봐.
“저기요.”
“네! 말씀하세요.”
“지한이 알아요?”
“네, 네! 물론입니다. 잘 알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를 보고 지연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지한이 사인 필요해요?”
“정말 해 주실 겁니까?”
“지한아 어때?”
“좋아요! 진짜 저 알아요?”
“그럼요. <오싹한 집>부터 팬입니다.”
오? 지한이 첫 영화잖아?
물론 그거랑 <그남그녀>밖에 출연 안 하긴 했지만.
“영화 보고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공포 영화 잘 봐요?”
“하하. 귀신이나 그런 걸 안 믿는 편이라서요.”
그러면서 용케 공포 영화를 보러 갔네.
한국에서는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닐 텐데.
“사인 어디에 해 줘요?”
“여기! 여기에 해 주세요!”
지한의 말에 직원이 미리 준비한 것처럼 A4용지를 꺼냈다.
옆에 뭘 들고 있기에 서륜 줄 알았는데 사인 받으려고 준비한 거였냐고.
그래도 저 아저씨 덕분에 지한의 긴장이 줄어든 것 같아서 지연은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이름이 뭐예요?”
“허인재요.”
“허. 인. 재.”
“저기 힘내라고 해 줄 수 있어요?”
“힘내, 세, 요.”
또박또박 글씨를 적는 지한을 보고 허인재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진짜 지한이 팬인가 봐.
다 큰 아저씨가 저렇게 좋아하다니.
세은 언니 말고 연예인 팬은 처음 봐.
내 친구들 중에서도 가수 사인 받으러 갈 만큼 열성적인 팬은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다.
“지한이 첫 사인이네.”
“정말요? 제가 처음으로 사인 받은 겁니까?”
“네!”
“정말 감사합니다. 가문 대대로 가보로 남기겠습니다.”
“히히힛.”
지한이 사인을 소중하게 대해주다니 이 직원은 좋은 사람인가 봐.
감격한 얼굴로 계속 고맙다고 하는 직원을 보고 지연의 호감도가 상승했다.
“자, 보시죠. 여기가 바로 월드컵 경기장입니다.”
직원이 마술사처럼 손을 펼치고 말했다.
관객석으로 나온 우리는 어마어마한 객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와아.”
“진짜 크네.”
“의자가 엄청 많아.”
고개를 좌우로 크게 돌려도 보이는 건 의자뿐이었다.
“누나아. 너무 많아.”
지한이 벌써 이곳을 가득 메울 관객을 상상한 모양이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을 상상하고 겁을 먹은 동생을 보고 지연이 든든하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그치만.”
“누나가 항상 지한이 보고 있을게.”
“정말?”
“응.”
“…히이.”
지연이 든든하게 등을 보이고 지한의 앞에 서 있자 지한이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여기 올 관객 수 생각하고 쫄 거 없어.”
“쪼, 쫄. 사람들 꽉 차면 엄청 많을 거 같은데.”
“지한이 연기 보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괜찮아. TV나 영화관에서 지한이 보는 사람이 저 많은걸?”
“어? 그런가?”
“물론이지. 그리고 여기 올 사람들보다 지한이 팬이 훨씬 많아.”
“그래. 지한아. 널 좋아해주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맞습니다. 벌써 오지한 배우 팬카페 있어요. 물론 저도 가입했습니다.”
지한이한테 벌써 팬카페가 생겼어?
지금이라면 다움 카페인가?
언제 생겼데.
생긴 줄 알았으면 나도 가입할걸.
“지한이 팬 엄청 많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그리고 누나가 있잖아.”
“그래두 공연 보러 오는 사람 중에 내 팬 아닌 사람도 있을 텐데.”
“지한이가 노래 부르는 순간부터 팬이야. 그러니까 팬들 앞에서 노래하는 거라고 생각해.”
“저는 오지한 배우가 동요를 부르더라도 좋아할 자신 있습니다.”
“형이 들었을 때 지한이 노래 정말 잘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될걸?”
“들었지?”
굳건한 얼굴로 말하는 1호 팬과 든든한 지지자인 누나, 그리고 영훈의 말에 지한이 서서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내 팬들로 만들려면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계속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니까 충분히 잘할 거야. 그리고 조금 실수해도 지한이가 노래 부르는 거 다들 좋아할걸? 팬이니까.”
“좋아합니다.”
“으응. 그치만 잘하고 싶어.”
팬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지 열심히 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그럼 누나랑 같이 열심히 연습하자.”
“응!”
그래. 우리가 둘이 함께라면 못할 게 뭐가 있겠냐.
스파르타로 한번 해 보자.
지한이 다시 배시시 웃자 안심한 어른들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자. 이제 공원도 보러 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네!”
지한이 영훈과 지연의 손을 잡고 1호 팬인 직원의 안내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