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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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 좋아해?”

“몰라. 그런데 영훈이 형이 이제 슬슬 스키장 오픈할 시즌이라고 했어.”

두고 보자, 고영훈.

“그럼 가서 스키나 보드 탈까? 어린이 강습이 있으려나. 전화해봐야겠네.”

“영훈이 형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아?”

“그래. 그러자. 이왕 오빠가 말 꺼낸 김에 숙소도 잡아달라고 하는 건 어때?”

“좋아!”

“스키장이면 강원도 쪽이겠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강원도는 뭐가 유명한데?”

“닭갈비나 막국수?”

사실 잘 몰라.

미안하다.

나도 여행이란 걸 가본 적이 없어서.

지연이 지한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한은 스키장 간다며 가방을 싸러 나갔다.

어차피 내가 다시 봐 줘야 하는데 왜 벌써 짐을 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영훈 오빠. 고생 좀 하겠네.”

그러게 누가 쉬는 날에 스키 얘기를 꺼내랬어?

지연이 영훈에게 심술을 부리고, 영훈이 영문도 모른 채 숙소와 어린이 강습을 알아보는 사이 아이들이 스키장이란 말에 들떠 이것저것 일정을 추가했다.

“스키장 갔다가 온천 가면 좋겠다.”

“근처에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호텔은 없을까?”

“저기 얘들아. 오빠 지금 숙소 알아보고 있는데.”

“스키장 갔다가 온천 가면 되지 않아?”

“누나. 나 바다도 보고 싶어.”

“겨울 바다는 추울 텐데.”

“그치만 나 동해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저기, 얘들아? 운전은 내가 하는데.”

옆에서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영훈의 말을 무시한 채 아이들이 일정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흐음. 그건 그렇지. 지금도 지한이가 어디 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한 사람이라도 덜 알아볼 때 여행 다니는 게 좋긴 하지.”

“나도 누나처럼 연기로 사람들 속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너도 곧 할 수 있을 거야.”

“얘들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는 건데 어디 가고 싶으면 꼭 말해줘야 한다. 알았지?”

“에이. 오빠. 우리가 오빠 없이 어떻게 어딜 가.”

“맞아!”

아니, 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연덕스럽게 우린 아직 어린애라고 말하는 지연을 보는 영훈의 눈이 흐려졌다.

“출발하자.”

예약 끝났다.

아이들이 환호했다.

* * *

2001년 초 <그 남자 그 여자>를 방영한 KBC 측에서는 높은 언성이 오갔다.

“왜, 왜?! 오지한 배우를 남우주연상 후보에 넣을 수 없어!”

“오지한 배우가 맡은 역할은 여주인공의 동생입니다.”

“심지어 출연한 씬도 많지 않지요.”

“그 몇 씬 만으로도 시청자 게시판을 불태웠던 건 잊었어?”

“하지만 만약 오지한 배우가 그 역할로 남우주연상이나 대상을 받으면 비난이 더 커질 겁니다.”

“기자들이 좋아하겠네요.”

“그러면 탑엔터에서 우리 방송국에 출연 안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KBC야 KBC!”

“네. 그리고 탑엔터 사장은 HJ의 막내 도련님이죠. 오지한 배우는 할리우드에서 주연까지 맡은 배우고요.”

“크흑.”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배경을 지닌 공 사장 덕분에 의견을 꺼냈던 이가 침몰했다.

“무슨 수가 없을까? 우리 방송국은 오지한 배우와 인연이 있잖아. 그런데 이걸 써 먹을 수가 없다니.”

“그러게요. 그건 아쉽습니다.”

“다른 방송국에서는 아직 오 배우를 섭외했다는 말이 없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언론과의 인터뷰 역시 며칠 미뤘다는 모양입니다.”

“아니,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왜 활동을 안 하는 거야. 크흑.”

“촬영 끝나고 거의 바로 들어왔다잖아요.”

“게다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요. 아직 10살도 안 됐을걸요?”

“10살도 안 됐는데 할리우드 진출했다니.”

“괴물이네요.”

새삼 지한이 할리우드에 진출한 업적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탑배우들도 힘든 일을 데뷔한 지 고작 1년 정도 되는 아이가 해냈다.

심지어 올해 지한이 자신들의 방송국에서 촬영한 배역은 여주인공의 동생이라는 흔한 배역이었다.

‘그 역할로 전국민들의 눈물을 뽑아낸 게 대단해. 역시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는 떡잎부터 남다른 건가?’

아직 어린 나이의 배우가 그 정도 성과를 냈다.

자라서 성장할수록 맡을 수 있는 배역은 더 늘어나겠지.

그때, 오지한이라는 배우는 어떠한 연기를 보여줄 것인가.

“이럴 게 아닙니다. 오지한 배우의 차기작을 저희가 잡아야 합니다.”

“이미 드라마국이나 예능국, 교양국에서도 연락을 넣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얼른 더 접촉해 봐. 따지고 보면 우리가 친정 아닌가!”

KBC에서 첫 드라마를 데뷔했다고 친정이라고 주장하는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들도 KBC에서 근무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들이었지만 저 사람은 자신들과 비교도 안 됐다.

흡사 광신도 같달까.

“크흡. 그러면 오지한 배우에 대한 접촉은 계속하는 걸로 하고, 후보는 이 상으로 하지.”

“찬성입니다.”

“찬성합니다.”

눈물을 머금고 특정 상에 후보로 올리기로 한 의견에 대해 모여 있는 이들이 모두 찬성했다.

KBC 연기대상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 * *

“미나 언니. 어린이 양복은 어디서 구해왔어?”

“후, 후후. 시중에 예쁜 게 없어서 직접 만들었지.”

우리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어쩐지 다크서클이 심해 보이는 미나 언니를 보고 지연이 부엌으로 가 오렌지 주스를 꺼내왔다.

“고마워.”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직접 만드셨는지 톡톡 씹히는 오렌지 알갱이를 씹으며 미나가 옷에 시침핀을 찔렀다.

“우리 스키장 갈 때 같이 안 가더니.”

“후후. 누나는 코디잖아. 이번 연기대상에서 무조건 지한이가 상 하나 받을 텐데 누나가 힘내야지.”

대상보다 주목받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허름한 차림으로 보낼 수 없었다.

다른 아역 수상자와는 달랐다.

“암. 다르지. 감히 우리 애를 누구랑 비교해?”

“누나?”

“언니?”

“아니야.”

연기대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 중 하나인 지한을 위해서 며칠 밤낮은 새워 10개의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실제 제작한 것은 3벌.

그렇게 힘들게 고르고 고른 옷은 지연에게도 한 번에 통과 받았다.

“지한아, 잘 어울린다.”

“정말?”

미래에서 온 내가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걸?

우리 애는 아직 어리면서 벌써 이렇게 이목구비가 선명한 거지?

거기 온 여자들은 전부 널 보고 반할 거야.

“아니지. 꼭 여자만 반하라는 법은 없지.”

혹시라도 내 동생이 너무 잘 생겨서 들이대는 남자 놈들이 있으면 어쩌지?

늙은이들도 손대는 거 아니야?

그러기만 해 봐.

가만 안 도.

“언니. 지한이가 너무 멋져서 누가 내 동생 노리면 어떡하지?”

지연의 말에 미나가 정색했다.

“가능성 있다…!”

두 누나들의 주접을 보면서 영훈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발 정신 차리자. 지한이 아직 8살이다.”

“오빠, 지금 우리 지한이 무시함? 우리 지한이는 전 세계 사람들을 반하게 만들 미남이라고.”

“그래.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10년은 이르지 않을까?”

“무슨 소리!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릴 때부터 노릴 수도 있지!”

“미나야. 너는 가서 잠부터 자자. 너희들 지금 지한이가 몇 살인지는 아는 거지?”

“지한이의 잘생김은 나이를 뛰어넘을 잘생김이야!”

“옳소! 오빠는 매니저면서 그것도 몰라? 연예계에는 얼굴만 멀쩡한 또라이들이 많다구!”

“언니, 정말이에요?”

“그럼! 내가 전에 일하던 곳에서 같이 일하던 언니의 친구의 친구 얘긴데….”

요새 들어서 지연이의 동생 주접이 엄청 심해졌다고 듣긴 했는데 거기에 미나가 동조할 줄은 몰랐다.

너 지금 수면 부족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제발 들어가서 잠 좀 자.

이곳에서 멀쩡한 이는 자신밖에 없다며 영훈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해서든 지한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12월 31일.

다사다난했던 2001년의 마지막.

KBC 연기대상이 방영됐다.

45. 어머 이건 데려와야 해.

화려한 별들의 잔치.

KBC 홀에는 연기대상에 참석하기 위한 스타들로 가득했다.

“저기, 들어온다.”

“최서라다.”

기자들이 입장하는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곧 연기대상에서 수상할 거라고 예상되는 <그 남자 그 여자> 팀이 들어왔다.

올해의 기대작이며 주목받는 드라마라는 것을 안 걸까.

그남그녀팀은 주연을 맡은 남녀 배우가 연이은 순서로 입장하였고, 여주인공의 가족을 맡은 이한재, 박수진, 오지한이 한꺼번에 차에서 내려 입장했다.

그 색다른 모습에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한아! 누나야악!!”

“여기! 여기 좀 봐 주세요!”

“성진이네 최고예요!”

여주인공은 성아였지만 어쩌면 오늘만큼은 여주인공보다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성진이 더 주목받았다.

성진 역을 맡은 지한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우고 양옆으로 박수진 배우와 이한재 배우의 손을 잡은 채 입장했다.

드라마 상이었지만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한 성진의 모습은 마지막에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웃던 아이가 나왔던 장면을 모두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했다.

“오지한이다. 찍어!”

찰칵, 차라라락, 찰칵

셔터음이 파도처럼 들렸다.

박수진과 이한재는 지한이를 보호하며 2001 연기대상이 열리는 홀로 들어갔다.

“후아. 사람 엄청 많아요.”

“놀랐지?”

“조금 놀랐는데 괜찮아요.”

“아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늦은 시간에 시작되는 방송이다 보니 아직 어린 지한을 보고 수진과 한재가 걱정했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 일찍부터 시상식 준비 때문에 바쁘게 움직였던 지한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하품을 삼켰다.

“스키 타는 건 재밌었는데.”

“하하. 스키 탔었어?”

“네! 영훈이 형이 말해줘서 스키 타러 갔는데 재밌었어요.”

“지한이 잘 타?”

“음. 잘 몰라요. 그런데 스키 선생님이 저 잘 탄다고 했어요.”

“어머나. 그럼 다음에 이 엄마랑도 같이 갈까?”

“아빠랑도 같이 가자.”

“네! 좋아요! 이번에 가서 스키도 타고 온천도 했는데 어엄청 좋았어요. 다음에 또 가자고 했는데 엄마랑 아빠도 같이 가요.”

“그거 좋지.”

“온천이라. 시간 좀 내볼까?”

“저도 가도 될까요?”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던 이들 사이로 부드러운 미성이 끼어들었다.

드라마의 남주인공이자 우수 연기상 후보인 이신성이 대화에 합류했다.

“사위도 온다면 환영이지.”

“우리 성진이가 허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당신이 허락하고 그래?”

“그런가? 하하하.”

“그럼 처남. 어때? 나도 가도 될까?”

이신성마저 역할놀이에 합류하자 지한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허락했다.

“좋아요!”

그때 연기대상을 시작하는 안내와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40주년을 기념하는 해라 더욱 거창해 보였다.

지한이 첫 시상식을 떨리는 마음으로 감상했다.

* * *

연기대상은 엄숙하게 흘러갔다.

연예대상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래도 지한은 양옆에 함께한 배우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지한이 차례지?”

“미리 축하해.”

“아직 안 받았는데요.”

“걱정 마. 우리 연기 생활이 몇 년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무조건 우리 지한이가 받을 거야.”

사실일까?

아직 드라마는 한 번밖에 안 찍었는데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상 받으면 좋겠지만 못 받아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받으면 좋겠다.

내가 상 받으면 누나가 무슨 말을 해 줄까?

아마 엄청 좋아하겠지?

“올 한 해 이분의 연기를 보고 많은 분들이 울었죠. 이미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바다 건너 낯선 땅에서도 눈부신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분입니다.”

전년도 수상자인 조성환이 청소년 연기상 수상자를 불렀다.

그의 말에 연기대상을 시청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기대를 터트리듯이 조성환이 객석에 앉아 있는 어린 배우를 보고 미소 지었다.

“2001년 연기대상 남자 청소년 연기상 수상자는 오.지.한 배우!”

와아아아아아!

객석이 만루 홈런을 때린 타자를 본 것처럼,

결승 골을 터트린 축구 선수를 본 것처럼,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성을 질렀다.

올해 인기상을 저 어리지만 놀라운 배우가 탄 것에 아무런 이견도 없다는 듯이 앉아있던 배우들이 박수를 치며 수상자를 축하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지한이 화면에 잡혔다.

동글동글한 눈이 크게 떠져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모두가 웃는 얼굴로 바라봤다.

한재와 수진의 부추김에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지한의 수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가 어리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한이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올라갔다.

“수상 축하합니다.”

조성환이 몸을 숙여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넸다.

꽃다발이 지한의 얼굴을 가렸다.

“이대로는 수상 소감을 발표하기 어렵겠네요.”

성환이 꽃다발을 대신 들어주고, 마이크까지 잡아주었다.

“어. 감사합니다. 제가 상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그래서 절 많이 좋아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해요. 탑엔터 형, 누나 고마워요. 유호진 PD님. 김은영 작가님, 감사합니다. 영훈이 형 미나 누나 고마워요. 그리고 누나! 나 상 받았어!”

카메라를 보고 해맑게 웃는 지한이 자랑하듯이 두 손으로 트로피를 들었다.

그 모습에 객석에서 보고 있던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엄빠 미소로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쳤다.

관계자석에서 그 모습을 영훈과 함께 보고 있던 지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장하다 내 동생.’

화면 너머로 모두의 축하를 받으면서 무대에서 내려오는 동생을 지켜보았다.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며 지연이 영훈의 옷을 잡아끌었다.

“오빠. 이제 가자.”

“그래.”

받을 거 다 받았으니 이제 집에 가서 파티를 열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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