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호가 방긋 웃었다.
감독의 기운을 북돋아준 지연이 동생을 데리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누나, 오늘은 뭐 그릴 거야?”
“오늘은 엄청 무서운 그림을 그릴 거야.”
“왜? 예쁜 거 그리면 안 돼?”
“조금 화난 일이 있어서 그거 풀려고.”
“알았어.”
“너는 뭐 그릴 거야?”
“나는 누나 그릴래.”
“그래.”
뭘 그릴지 정한 아이들이 캔버스 앞에 자리 잡았다.
미리 젯소를 칠해둔 캔버스에 아이들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나가려던 철호가 조용히 아이들을 보았다.
‘집중력이 대단해.’
아마 아이들은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거다.
높은 보수와 다음 다큐멘터리에 대한 지원을 약속으로 아이들을 촬영하기로 한 최 감독이 감탄했다.
국내 어느 배우도 뚫지 못했다는 할리우드의 벽을 고작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뚫었다.
올 초 대한민국 안방에 앉아 있던 이들에게서 눈물을 뽑아내 관계자들 사이에서 최루탄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연기를 위해 배웠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배우의 누나였다.
‘거장 같군.’
같은 그림을 그리더라도 지한의 그림은 풋풋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사랑
행복
기쁨
그러나 지연의 그림은 세월을 느끼게 했다.
외로움
절망
좌절
슬픔
분노
초등학생 아이가 담았다고 하기에는 묵직한 감정들이 캔버스를 채웠다.
지한의 촬영 일정에 맞춰 9월에 같이 입국한 최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것처럼 진지한 태도로 지연의 그림을 렌즈에 담았다.
철호는 붓을 놀리는 지연의 모습을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면서 숨 쉬는 것도 잊었다.
“후우.”
붓을 내려놓은 지연이 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철호는 자신도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섭군.’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묘한 기백을 느끼게 만드는 그림을 보고 철호가 물었다.
“그림의 제목은 뭔가요?”
“검은 숲이요.”
길 잃은 자들을 삼킨 검은 숲이 보였다.
철호는 돈에 굴해 카메라를 잡았던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 * *
“헥, 헤엑.”
“아, 한슬기 더러워.”
“선배. 여긴 무슨 10월인데도 더워요?”
“묻지 마라. 나도 더우니까.”
더운 LA에 도착한 두 기자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가 있는 곳.
“그런데 선배 진짜일까요?”
“뭐가.”
“오지한 배우요. 진짜 할리우드에서 촬영 중일까요?”
“그걸 확인하려고 우리가 이 더운 날에 땀 흘려가며 찾고 있는 거 아니겠냐.”
“근데 선배 진짜면 대박 아니에요?”
“아니다.”
“예? 왜 아니에요?”
“초대박이란 뜻이다.”
“오호!”
더위에도 불구하도 두 사람이 잔뜩 들떴다.
이 특종을 위해서 무려 편집장의 바짓가랑이까지 붙들고 LA로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지한과 매니저의 출국 기록을 찾은 덕분에 받을 수 있었던 허가였다.
“그럼 우리 이제 여기서 뭘 하죠?”
“어떤 영화에 들어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촬영은 얼마나 진행됐는지 등등.”
“그럼 제작사를 찾아야겠네요.”
“그것도 그거지만 우린 최 감독을 찾아야 해.”
“최 감독님을 어디서 찾아요….”
드넓은 미국 땅에서 슬기가 허망하게 말했다.
그 최 감독 덕분에 지한이의 행방에 대해 찾을 수 있었지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도 아니고.
이럴 거면 차라리 영화 제작사를 뒤져 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걱정 마.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찾는 곳이 있으니까.”
“네? 그게 어디에요?”
“한인 마트.”
“선배…!”
연륜이 묻어나는 추리에 슬기가 성민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봤다.
후배의 존경 어린 눈을 본 성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 선배만 믿고 따라와.”
“네!”
두 사람이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42. 갑자기 찾아온 그대.
“흐으음.”
지연은 캔버스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리온의 전시회를 장식하는 그림.
주제를 꿰뚫는 마스터피스(Masterpiece).
“어떻게 그리지?”
대본을 봤을 때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떠오르는 이미지는 없었다.
막연한 느낌만으로는 마스터피스를 완성시킬 수 없었다.
“지한아.”
“응?”
옆에 엎드려 대본을 보고 있던 지한이 누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단어에 색색의 펜으로 설명해놓은 지한의 대본이 알록달록했다.
“리온이 마지막에 그린 그림. 어떤 그림일까?”
“으음. 보기만 해도 포근한 그림?”
“뭘 그리면 포근해지는데?”
“흐으음. 나는 누나만 보면 편안해. 힘이 쫙 빠지고 구름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아.”
그렇다고 그림에 내 얼굴을 그려 넣을 순 없잖니.
‘리온’이 그려야 하는 그림이기에 더욱 어려웠다.
“안 되겠다. 선생님한테 전화해야지.”
지연이 전화기를 들었다.
헨리 교수의 이번 학기 시간표는 작업실 문에 붙여져 있었다.
지금은 공강이니 전화 받으시겠지?
다행히 지연의 바람대로 헨리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생님.”
-욘? 잘 지내고 있니?
“네! 전 잘 지내요. 딴 게 아니라. 선생님 리온의 그림 있잖아요.”
-리온? 아. 한이 연기하는 배역 말이구나. 그래. 말해 보렴.
“선생님은 마지막에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했어요?”
-으음. 리온이 보는 엄마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서 그리려고 했지.
“그럼 조지아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던 거예요?”
-조지아?
“리온의 엄마요.”
-하하하하. 그렇단다.
“예에.”
스승의 대답에 지연이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진 걸 들은 헨리가 지연이 지금 어떤 벽에 막혀 있는지 알고 입을 열었다.
-너무 뻔해서 그러니?
“그게. 네에. 솔직히 리온이 보는 엄마의 모습이라고 조지아를 그리는 건 너무 재미없어요.”
-그렇다면 재미있게 그리면 되지 않니.
“재미있게요?”
-리온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항상 날 지켜봐주는 사람. 화를 내기도 하고 웃어주기도 하고. 어느 때나 따뜻하게 바라봐줘요.”
-그래. 그 모습에서 시작하는 거야. 일단 계속 그려보렴.
“계속 그려요? 같은 모습을요?”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네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 눈앞에 나타날 거란다.
두루뭉술한 헨리의 말에 지연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해볼게요.”
-그래. 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네. 선생님도 밥 잘 챙겨 먹고 건강하세요.”
-너도. 항상 건강하렴.
지연이 전화기를 내려놨다.
통화가 끝난 지연의 옆으로 지한이 다가왔다.
“누나, 선생님이 뭐래?”
“조지아의 얼굴을 계속 그려보래.”
“왜?”
“그리다 보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나타날 거래.”
“그럼 나도 같이할래.”
“좋아. 지한이가 옆에 있으면 리온이 보는 조지아를 더 잘 알 수 있을 거 같아.”
“응! 내가 도와줄게.”
본인도 하루 종일 대본을 보며 연기 연습을 하기 바쁘면서 누나를 도와주겠다고 당차게 말하는 모습에 지연이 꺄르르 웃었다.
갑자기 거실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영훈이 잠시 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즐거워 보이는 아이를 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경비처리를 위한 영수증이며 지한이와 지연이의 활동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야 했다.
“아, 이제 곧 11월이네.”
다음 달이면 지한이의 할리우드 촬영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뿌려질 것이다.
그때 영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띠리리리-
“여보세요?”
-고 매니저님….
“최 감독님?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있나?
혹시 촬영 테이프를 날려 먹은 건 아니겠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영훈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건 아닙니다. 테이프는 무사합니다.
“휴우.”
철호의 말에 영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무슨 일이세요?”
-저어. 제가 기자에게 뒤를 밟힌 모양입니다.
“네? 기자요?”
-네. 지금 오지한 배우와 인터뷰하고 싶다며 기자가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기자!
스타의 숙명처럼 따라붙는 그 이름에 영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한이의 할리우드 소식이 곧 보도될 예정이었으나, 미국에서 기자를 만나게 된 영훈이 머릿속이 하얘져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고 매니저님?
“일단 그 사람들에게 지한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지 마시구요.”
-네.
“저도 회사에 연락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보도할 예정이긴 했거든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영훈이 간신히 지시를 내렸다.
괜히 자신 때문에 기자가 꼬인 게 아닌가 걱정했던 최 감독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제가 이따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이 재빨리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사 그쪽이 지금 이른 아침이라고 할지라도 팀장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 * *
“기자가 미국까지 쫓아갔다고?”
“네. 한동안 지한이의 행방을 찾는 전화가 오긴 했는데 미국까지 찾아간 기자는 처음입니다.”
인터넷도, SNS도 아직 활발하지 않을 시기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지한이 지금 미국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한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
“어차피 다음 달부터 언론에 흘릴 생각이었어.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진 거라고 봐야지.”
“네. 그러면 촬영 소식만 전달할까요?”
본부장의 말에 주민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주민은 본부장에게 지시했다.
“이걸 이용하자고. 지한이 특집 기사 준비해. 제작사에 문의해서 촬영 현장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취재해도 되는지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 감독이라고 했나?”
“최철호 감독님 말씀이십니까?”
“지연이 그림 그리는 모습 말고 일상도 같이 찍고 싶다고 하더군. 휴먼 다큐 느낌으로.”
“방송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이야 채널은 지상파 3사가 꽉 잡고 있다지만 나중에는 모를 일이지.
혹시 알아?
평범한 사람들도 채널을 가져 방송을 하는 시대가 올지.
지연이 알았다면 사장님도 미래에서 돌아온 거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주민이 먼 미래로 치부하며 홀로 계획을 세웠다.
“본부장 생각은 어때? 지연이가 나중에 TV에 나올 만큼 인물이 될 것 같나?”
“제 눈에는 지연이도 지한이 못지않은 스타의 재목으로 보입니다.”
“그래. 그러니 지금부터 찍어둬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최 감독에게 호텔 방을 빼고 아이들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겠습니다.”
“방은 많다고 하니 고 매니저에게 말해서 미리 준비해 두라고 해.”
“네.”
본부장이 고개를 숙이고 사장실을 나섰다.
누군진 몰라도 미국으로 찾아간 덕분에 단독 특종을 잡게 되었군.
우리도 그 기자를 이용해서 지한이에 대한 특집 기사를 좀 내 볼까?
그 기자들을 이용해 지한을 거대하게 홍보할 생각이 가득한 주민이 기대가 된다는 듯이 웃었다.
* * *
“와아.”
“여기서 머문다고요?”
“현지 에이전시에서 구해준 집입니다. 물론 임시로요.”
넓은 마당에 커다란 저택을 본 두 기자가 입을 떡 벌리고 집을 보았다.
저택만 보아서는 지한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배우인 것처럼 느껴졌다.
“두 분 뭐하십니까? 안 들어오세요?”
영훈이 넋을 놓고 집을 올려다보는 두 기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흐, 흠. 한 기자 정신 차리지 않고 뭐해?”
“선배님도 입 벌리고 계셨잖아요. 침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어흠. 흠!”
슬기의 트집에 성민이 헛기침을 했다.
“들어가서 절대 촌스럽게 굴지 말자고.”
“넵!”
“사진기는 챙겼지.”
“물론이죠! 기자가 장비 빼고 오면 쓰나요.”
“그 말을 하니 더 불안한데.”
“에이 참. 자자. 어서 들어가자고요, 선배. 특종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영훈의 뒤를 따라 들어간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있는 두 아이들이 보였다.
이렇게 넓은 집에 있는 아이라면 안 봐도 뻔했다.
‘‘그 남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