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지한이 정도의 연기라면 언제 작품을 들어가도 괜찮아.”
“하지만 사장님. 지한이 인지도가.”
“변 실장.”
“네, 사장님.”
“지한이가 연기대상에서 수상한다고 치고, 할리우드 영화 주연 촬영 소식이 이어지면 어떨 것 같나?”
“인지도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할 겁니다. 모든 방송국에서 지한이를 데려가려고 할 겁니다.”
“지한이가 상 못 받으면?”
“그럴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리우드 촬영 소식이라면 못해도 며칠은 떠들썩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조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나?”
“없습니다.”
몇 마디 말로 실장들을 납득시킨 주민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명확하군. 연말 시상식 준비하고, 내년 2월경에 지한이가 촬영 끝나니까 4월이나 5월에 들어갈 작품 하나 알아봐. 시상식 전에 할리우드 촬영기사 나올 수 있게 홍보 자료 준비하고.”
“네, 사장님.”
“김 실장은 미국에 있는 쪽에 연락해서 기사에 쓸 수 있는 사진 몇 장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주민은 사장실에 올라가서 업무를 보았다.
연예계에서 치트키나 다름없는 ‘할리우드’라는 단어에 실장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이해한다.
자신도 그러니까.
미국에서 있었던 그 일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회사에 지한이를 찾는 연락에 업무가 마비되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예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언이라.”
그 단어와 함께 갑작스럽게 떠오른 인물에 주민이 깍지를 꼈다.
지금도 동생의 곁에서 함께 하고 있을 여자아이가 떠올라 주민이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혹시 홍보 타이밍도 지연이가 알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주민이 고개를 털었다.
“아니지, 벌써 2번이나 맞췄잖아. 혹시 이번에도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혹시나 하면서도 기대되는 마음에 주민이 수화기를 들었다가 지금은 한밤중이란 생각에 전화기를 내려놨다.
“내일 알람을 일찍 맞춰놔야겠군.”
호기심에 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왠지 이번에도 지연이 뭔가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41. 안 될 거예요.
이른 아침.
화창한 10월의 LA의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다.
에이전시에서 구해준 집에서 자고 있던 지연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하아암.”
햇빛을 피해 몸을 돌린 지연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여전히 옆에 붙어 자는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서서히 정신을 차린 지연이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럭.
“우응.”
지연의 인기척에 지한이 살짝 투정을 부렸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준 지연은 동생이 다시 잠들 때까지 가슴을 토닥이고 내려왔다.
햇살이 들어오던 커튼 사이도 꼼꼼히 여민 지연이 방을 나섰다.
“….”
씻을까.
잠 좀 깨야겠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 지연이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어제까지 열심히 촬영했고,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며칠 동안 고생한 동생을 위해서 오랜만에 맛있는 걸 해 줘야겠다.
“닭고기, 인삼, 대추, 밤, 찹쌀….”
보양식은 역시 삼계탕이 제맛이지!
“갈비찜도.”
“양파, 갈비ㅉ…?”
옆을 돌아보니 애런이 싱글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애런?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일정 변경이 있어서 전해드리러 왔지요.”
“이렇게 일찍?”
“네. 덕분에 연의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군요.”
“수상한데….”
“하하하. 고는 저쪽 방에 있습니까?”
애런이 지연의 시선을 피해 영훈 오빠 방으로 들어갔다.
저 능구렁이 같은 사람.
촬영장에서 내가 싸 온 도시락을 먹고 나서부터였나?
한 번 먹었더니 그다음부터 슬금슬금 밥 먹는 자리에 끼어든다.
지한이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니까 밥 챙겨 주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밥 먹고 쉬다가 잠만 자러 집에 돌아가는 모습이 백수 삼촌 같아서 기분 나빴다.
“조금 얄밉네.”
오늘은 설거지를 시켜야지.
장 볼 목록에 갈비찜 재료도 쓰면서 지연이 다짐했다.
…리리리!
어어억!
영훈 오빠의 방에서 벨소리가 들린다.
그거에 놀라서 오빠가 일어나는 소리도.
아침부터 연락이라니.
매니저는 바쁘구나.
산발이 된 머리에 입가에 침이 흐른 자국이 역력한 영훈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전화기를 들고 나왔다.
“지연아! 사장님 전화!”
이렇게 일찍부터?
아, 서울은 지금 밤이겠네.
지연이 영훈이 내민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어어, 지연아. 일어났니?
“네, 일어났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
“네. 잘 먹어요. 사장님은 안 자요? 지금 거기 밤이잖아요.”
-통화만 하고 잘 거야.
“일찍 자야 건강해요.”
사장님이 건강해야 우리도 무사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 아프면 안 돼요.
-하하. 내 건강을 다 생각해주고. 고맙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이 시간에 전화했다는 건 일부러 이쪽과 통화할 일이 있어서겠지.
국제전화는 비싸니까 빨리 용건을 말해라.
-지한이 일 때문에.
“왜요? 지한이 촬영 잘하고 있는데요.”
-홍보 때문인데 이런 건 잘 모르겠네. 음. 그냥 물어볼게.
다음 달쯤에 지한이 영화 촬영 소식 홍보하고, 연말에 시상식 참여, 내년 4, 5월쯤에 드라마 들어가려고 하는데 지연이는 어때? 잘 될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엔터 회사에서 일해본 기억이 전혀 없는 데다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도 없었다고.
그쪽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전혀 몰라.
“저는 홍보 잘 모르는데. 왜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게. 아저씨가 잠시 뭐에 홀렸나 보다.
전화기 너머로 공 사장의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힘 빠질 필요는 없는데.
내가 홍보를 잘 모를 뿐이지 미래는 알거든.
“그런데 그거 안 될 거예요.”
-응?
“드라마.”
-어떤 드라마 들어갈지 알아?
“아니요.”
-…그럼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내년에 월드컵 하잖아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 기억에도 선명했던 월드컵의 기억.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마다 아파트 전체를 울리던 커다란 함성.
2002년은 월드컵의 해였다.
모든 매체들이 월드컵 선수들을 다뤘고, 고무적인 성과에 트는 곳마다 안 나오는 선수들이 없었으니까.
4, 5월에 드라마를 들어간다고?
월드컵 경기랑 겹칠 텐데?
안 봐도 뻔했다.
-으음. 지연아. 네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축구를 잘 못 한단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개최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전부 축구를 보는 게 아니야.
“아닌데.”
-뭐가 아닌데?
“다들 축구만 볼걸요?”
오죽하면 결혼식장에서, 장례식장에서 경기를 시청했다는 영상이나 기사가 나오겠는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네. 다들 축구만 볼 거예요.”
-그래?
확신하듯이 말하는 지연의 말에 잠시 수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 알았다. 지연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제 말 믿어요?”
-지연이 네가 확실하게 말하는 건 다 이루어졌잖아.
“고작 2번이었는데요?”
-이번에도 맞으면 3번이 되겠네.
아직 사춘기도 안 된 어린아이의 말을 믿어준다는 말에 지연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 아저씨 생각보다 머리가 유연한 사람이잖아?
어린애의 말도 허투루 듣지 않고.
공 사장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 지연이 조금 들떠서 천기를 누설했다.
“우리 4강 갈 거예요.”
-지연아.
“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진짠데.”
사실을 말해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에 지연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 * *
이 분노는 그림으로 풀겠어.
점심으로 삼계탕을 맛있게 먹은 지연이 작업실에 틀어박혀 의지를 불태웠다.
“지연아, 그림 그릴 거니?”
“응.”
“지한이도?”
“네!”
앞치마를 입고 캔버스 앞에 앉은 두 아이들을 보고 영훈이 물었다.
“그럼 감독님 오라고 해야겠다.”
“옆에서 누가 보고 있는 거 싫은데.”
“저번처럼 카메라만 두고 가실 거야.”
그건 괜찮았었지.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계탕을 먹고 소파에 늘어져 있던 미나가 벌떡 일어났다.
“앗! 그럼 얘들아, 옷 갈아입을래?”
“왜요?”
“카메라 앞에 서는데 너무 잠옷 차림이지 않니? 조금 더 멋지고 예쁜 모습으로 나와야지!”
“그럼 지한이만,”
“무슨 소리야. 지연아 여자는 항상! 어디에서도! 카메라 앞에서는 완벽한 모습이어야 해.”
이 언니는 나를 어딘가의 배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왜 일반인인 날 가지고 저러나 몰라.
지연이 미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언니 세수했어요?”
“앗! 안 했는데 티나?”
“카메라 앞에서는 완벽해야 한다면서요.”
“나는 안 나오니 괜찮지 않을까?”
비겁한 변명입니다.
하지만 지연은 순순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누나 이거 괜찮다.”
“그래? 너도 잘 어울려.”
미나의 말을 따르기는 싫었지만 지한이가 같이 옷 갈아입으러 가자고 하는 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던 옷이 아니라 새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옷에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저 언니는 도대체 미국 오면서 옷을 얼마나 챙겨 온 거야.
이것도 못 본 거 같은데.
“아. 역시 내 안목은 완벽해!”
꾸민 듯 안 꾸민 듯 물감이 묻어도 어색하지 않은 옷들로 애들을 갈아입힌 미나가 자화자찬했다.
최 감독이 오기 전 자연스럽게 꾸민 아이들을 본 영훈과 애런도 감탄했다.
“흐음. 연? 혹시 아동 모델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없어요.”
“지연아 너무 딱 잘라 말하지 말고. 오빠가 보기에는 애런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냥 한 달에 하루 정도만 모델로 일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림 그려야 해요.”
“앗….”
영훈이 침몰했다.
영화 촬영 일정에 맞춰서 그림 그려야 하는데 이 사람이 무슨 소리래?
지연이 영훈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내 동생한테 집중해요!’
차가운 시선에 영훈이 쭈그러들었다.
“촬영이 끝난 다음에도 생각해 보시죠. 미술 활동에는 지장이 없도록 스케줄을 잡아보겠습니다.”
애런이 훌륭한 에이전트의 자세로 굴하지 않고 들이댔다.
“싫어요.”
이 사람들이 왜 자꾸 귀찮게 구는지 모르겠다.
모델이라면 당연히 옆에 있는 내 동생에게 제안해야 하지 않은가?
할리우드 영화도 찍고 있고, 얼굴도 잘생겼고, 연기도 잘하고, 화제성도 좋은 내 동생을 두고 왜 나한테 난리지?
“한에게도 그런 스케줄이 갈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연도 스타성이 있어요.”
“네. 안 해요.”
지연의 단호한 거절에 애런이 손을 들고 한발 물러섰다.
능글거리며 웃는 모습이 ‘10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말하는 거 같아서 재수 없었다.
저녁에 하기로 한 갈비찜을 취소해야겠다.
띵동-
누군가가 벨을 울렸다.
* * *
“삼계탕이라. 아쉽네요.”
최 감독이 라면으로 때우고 온 점심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공 사장이 지연의 그림 때문에 따로 고용한 그는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지한이 촬영이 없는 날에만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는 촬영이 있는 날만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처음부터 지연을 대상으로 다큐를 기획했으면 계속 촬영할 수 있었을 텐데.’
철호가 아쉬워했다.
그것에는 지연의 요리도 한몫했다.
먼 타지에서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저녁에는 갈비찜이에요.”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