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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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피곤해 보인다?”

“조금요.”

걱정하는 영훈의 말에 지연이 눈을 비볐다.

꿈에 나온 이상한 뱀 새끼 때문에 잠도 설치고 이게 뭐야.

“누나, 이거 먹어.”

“고마워.”

피곤해하는 누나를 위해서 지한이 새콤한 오렌지 주스를 넘겨줬다.

혀를 자극하는 새콤한 맛에 지연이 정신을 차렸다.

“오늘따라 시구나.”

“아주머니가 생과일로 만들었는데 오렌지 엄청 셔.”

“지한아 혹시 너 먹기 싫어서 누나한테 준 거 아냐?”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지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나의 눈을 피한 지한이 포도 주스를 마셨다.

너 이 자식 아니라면서 왜 너 혼자 포도 주스야.

“오지한 치사하게.”

“…나눠 줄까?”

“됐다. 그냥 너 다 먹어라.”

지연이 오렌지 주스를 원샷했다.

발끝까지 저린 맛이었다.

“얘들아. 이제 곧 비행기 타러 갈 거야. 지연이 너도 피곤하면 비행기 안에서 자.”

“응. 바로 잘 거야.”

그럴 생각으로 일부러 옷도 자기 편한 옷으로 입고 왔다.

이미 필요한 짐은 미리 다 부쳤고, 캐리어에 들고 갈 물건 중 빠진 건 없는지 영훈이 다시 한번 살피러 갔다.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체크하는 모습이 이제 좀 숙달된 매니저같이 보였다.

“누나.”

“왜.”

“나 어제 또 뱀 봤다!”

그래. 그 새끼 나한테도 찾아왔었어.

“이번에는 또 뭔 말 하디?”

“그림 잘 봤대. 다음번에는 반대로 그려 주라던데?”

“반대로?”

“내가 해를 그리고 누나가 달을 그려보래.”

나한테는 와서 협박만 하고 가더니 동생한테는 퀘스트를 주고 간 모양이다.

“도대체 그것들은 뭐 하는 놈들이야.”

“잘 모르겠는데 좋은 사람인 거 같아. 누나랑 앞으로도 잘 지내래.”

“그 사람들이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야.”

“히힛. 정말?”

“그래. 정말.”

그래.

그딴 정체도 모를 녀석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버릴 생각이 없어서야.

“얘들아. 이제 가자.”

“네에!”

“네.”

아이들이 손을 잡고 영훈의 뒤를 따라나섰다.

40. 우리 애 어디 갔니?

예정된 일정보다 미뤄졌지만 지한이의 첫 할리우드 영화 (가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하이. 큐!”

감독의 신호에 감정을 잡고 있던 배우들이 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리온, 아가.”

“….”

“또 하늘을 보고 있었니?”

조지아의 말에도 리온은 꼼짝도 않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큰 창이 있는 방을 내어 준 조지아가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고 방을 나섰다.

조지아가 떠난 방.

리온은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다만 아이의 눈동자는 어두운 하늘이 아니라 밝은 달이 비치고 있다는 점은 아이를 제외한 누구도 몰랐다.

“컷! 오케이.”

감독의 사인에 스태프들이 기분 좋게 움직였다.

“첫 장면부터 한 방에 가다니.”

“이거 왠지 잘 될 거 같은데?”

“맞아. 그리고 어린 배우도 생각보다 잘하던데?”

“우리 감독이 어떤 사람인데 아무리 어린 애라고 해도 연기 못하면 얄짤없어.”

스태프들이 열연한 배우들을 보고 감탄했다.

촬영장 분위기를 살피던 지연에게 영훈이 말했다.

“잘됐나 보다.”

“두 사람 다 잘했어.”

“외국 촬영이라 걱정했는데 역시 지한이구나. 어디서도 연기를 잘해.”

“우리가 같이 있으니까 지한이는 걱정 안 하고 연기할 수 있는 거야.”

씬을 끝내고 이쪽을 본 지한을 알기에 지연이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지한이가 영어로 말하는데 문제없어서 다행이야.”

“디즈니 열심히 봤어. 그리고 내가 대본 읽어줬으니까.”

“그래. 지연이 너도 영어 진짜 잘했지. 너넨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니?”

“왜?”

“너무 잘해서. 둘이 연기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영어도 잘해서 그랬어. 너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오빠가 자괴감이 든다.”

“오빠 이제 영어 잘하잖아.”

“그렇지만 여기서는 오빠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에이전시 일은 애런이 다 하는걸.”

“미국에 우리 회사가 없어서 그래?”

“대충 그렇지.”

미국에 회사를 세울 순 있어도 활동하는 연예인이 없어서 그렇다.

이제 지한이가 활동하니 언젠가 미국에도 진출할지도?

아무튼 지금 자신은 보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 지한이 또 촬영한다.”

“순조롭네.”

“오빠 잘 봐 줘야지. 그래야 나중에 뭐가 잘했고 뭐가 못했는지 말해 줄 수 있잖아.”

“오빠가 아무리 잘 봐 봤자, 지연이 너보다 못하잖니….”

아이보다 못한 현실에 영훈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저기 봐. 지금 지한이 연기 잘했지?”

“지한이는 항상 연기를 잘했지.”

“그런 게 아니야. 오빠는 바보야?”

“…잘못했다.”

“저 장면은 지한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눈치채는 장면이란 말이야. 그래서 일반적인 애들이랑 반응이 다르다고.”

“그렇구나.”

영훈은 지연에게 혼나가며 연기를 보는 법을 배웠다.

잠시 통화를 하고 온 애런이 지연에게 구박받고 있는 영훈을 보고 물었다.

“연? 왜 고에게 화를 내고 있죠?”

“화내는 게 아니라 가르쳐 주고 있는 거예요.”

“고에게요? 뭘 가르치고 있었나요?”

“지한이 연기가 어디가 좋고 어디가 안 좋은지 보는 방법이요.”

“오. 에이전트의 일을 가르치고 있었군요. 좋아요. 저도 고를 도와주도록 하죠.”

“아니, 그럴 필요는.”

“애런도 도와주는 거예요?”

“저기….”

“고를 위해서죠. 우리 둘 모두 한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넵.”

어느새 죽이 맞은 두 사람이 영훈의 양옆에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살려줘.

영훈이 눈물을 삼켰다.

* * *

“아니, 근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대?”

“누구 말이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기사를 쓰고 있다가 속이 터진 여성이 혼잣말을 하자 옆에 있던 동료가 의자를 밀어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얘 말이에요.”

화면에는 올 초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그 남자 그 여자>에서 나온 성진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아아. 얘? 왜 찾아?”

“아니 곧 연말 시상식이 가까워지잖아요. KBC 보니까 올해 청소년 연기상 후보에 올라갈 거 같아서 미리 좀 취재해 두려고 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요.”

후배의 말에 선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후속작 들어갔겠지.”

“아니, 지금 드라마 끝난 지가 언젠데 다른 데 들어갔다는 소리가 없어요.”

“그래? 다른 드라마에서 섭외 안 한 건 아니고?”

“아니에요. 제가 전화 다 돌려봤어요. 그랬더니 그쪽에서도 섭외하고 싶었는데 다른 작품 때문에 안 된다고 했대요.”

“이상하네. 영화 쪽도 들어간 거 없고?”

“없어요. 첫 작품이 <오싹한 집>이라고 해서 영화 들어간 줄 알고 다 찾아봤단 말이에요. 지금 크랭크 업된 곳에는 전부 전화해봤어요.”

“아직 제작 준비 중인 곳은?”

“혹시나 해서 전화해 보긴 했는데 역시 아니었나 봐요. 이미 작품 들어갔다고 했어요.”

“아니, 도대체 무슨 작품에 들어간 거야?”

연예인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연예부 기자 한슬기와 구성민이 미궁에 빠진 지한의 행방에 고민에 빠졌다.

올해 연기대상에서 많은 상을 받을 거란 예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였다.

<그 남자 그 여자> 이후로 KBC에서 시청률 30%를 넘는 드라마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에 나온 배우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 드라마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란 말이야?

“혹시 연극 쪽인가?”

“누가 연극판에 애를 끼워주겠어요.”

“모르지. 성진이잖아. 걔가 병원복 입고 나올 때마다 안 운 집이 있을 것 같냐? 오죽하면 우리 아버지도 그 장면 보고 우셨다.”

“선배 아버지는 드라마 잘 안 보시잖아요.”

“그렇지. 아들이 연예부 기자라고 연예인들은 쳐다도 안 보는 사람이지. 그런데 그건 보더라고.”

브라운관 너머로 보던 이들이 보여지는 것과 다르게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안 선배의 아버지는 드라마를 끊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사극도 끊고 뉴스만 보고 계신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쵸? 사실 오지한 배우 부모가 질 안 좋은 건 유명하잖아요?”

“그렇지. 내가 살다가 배우 부모를, 그것도 스크린 데뷔도 안 한 아역 배우 부모에 대한 기사가 사회면에서 나올 줄 생각도 못 했다.”

기자만큼 소문에 빠른 이가 어디 있을까.

기사로 안 썼을 뿐이지 이미 지한의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탑엔터에서 극성으로 막아 기사로 쓰지 못했을 뿐, 이미 연예계 있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거 파보자.”

“넵, 선배님!”

기자가 냄새를 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기자가 뒤를 쫓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아이들은 커다란 세트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온통 초록색이야.”

리온이 휴양을 온 산속에서 달을 보고 영감을 얻는 장면이었다.

숲속에서 본 달은 리온이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서 마주한 달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리온은 자신의 세상에 있는 달과 밖에 있는 달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춥겠다. 손난로 챙겨올걸.”

“여기서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미국에도 손난로가 있어?”

“있지 않을까?”

그건 몰랐네.

혹시나 해서 보온병에 따뜻한 물 가득 담아왔는데 몸에 안고 있다가 지한이 촬영 끝나면 줘야겠다.

“그래도 일찍 찍어서 다행입니다. 이제 날이 추워질 때여서 걱정했는데 말이죠.”

“촬영이 더 늦어졌으면 밖에서 못 찍을 뻔했네요.”

“아니요. 세트를 만들었을걸요.”

무섭다. 할리우드.

뭘 하든 스케일이 엄청 커.

“지한아. 옷 갈아입자.”

미나가 옷을 들고 다가왔다.

옷을 받아든 지연이 지한이와 함께 트레일러로 들어갔다.

이제 몇 번 따라다니다 보니 할리우드 촬영 현장에도 익숙해졌다.

“이거 입고 패딩 입자.”

“응!”

지한이 순순히 지연의 말을 따라 옷을 입었다.

벗은 옷은 왼팔에 입을 옷은 오른팔에.

인간 옷걸이가 되어 있자 동생이 씩씩하게 혼자 옷을 갈아입었다.

“추우면 말해.”

“응.”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서 있었다.

“크흠!”

첫날에 지한이 안 좋게 봤던 남자다.

지연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지한이를 뒤로 보냈다.

“저기. 지하니라고 했지?”

이름을 제대로 발음도 못 하다니.

마이너스 1점.

“오늘 첫 촬영인데 잘 부탁해. 내 이름은 잭슨이야.”

“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먼저 다가온 잭슨을 보고 지한이 누나의 뒤에서 나와 잭슨과 악수했다.

지한의 연기를 보고 조금 반성한 것 같군.

플러스 0.5점.

“아. 지한은 어디서 왔어? 일본? 중국?”

“아뇨, 한국에서 왔어요.”

“거기가 어디야?”

감히 단군의 후손을 보고 일본인이랑 중국인인지 물어본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다니.

마이너스 100점.

“지한아. 일단 오빠랑 언니가 있는 곳에 가 있자.”

“응.”

“헤이. 너는 누구야? 오늘 촬영하는 또 다른 배우가 있단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지한이 누나.”

“한의 시스터? 그런데 왜 여기 있어? 학교 안 가?”

“안 가.”

“동생 촬영장까지 따라오다니 한의 보모 같네.”

하하 웃으며 말하는 잭슨을 보고 지연이 이를 악물었다.

첫인상대로 재수 없는 놈이었어.

무례한 놈!

마이너스 100만점.

* * *

아이들이 순조롭게 촬영하고 있을 때쯤 탑엔터에서는 지한의 홍보를 위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주연을 맡은 이는 지한이가 처음입니다. 지금도 늦었습니다.”

“하지만 단독 주연이 아닌 데다가 미술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장르는 인기가 없습니다.”

“지한이는 올해 청소년 연기상이 기대되는 배웁니다. 연말 연기대상을 생각해서라도 지금부터 홍보해야 합니다.”

“할리우드라는 이름값만으로도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질 겁니다. 게다가 내년에 월드컵이 열린다는 사실과 함께 대한민국을 빛낸 스타라고 홍보한다면 지한이의 몸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겁니다.”

“이제 막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작사에서도 월드컵 기간을 피해 상영할 예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년 추수감사절 정도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긴 하더군.”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가장 좋은 타이밍에 지한이를 최대한 홍보하는 것.

할리우드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부터 기다렸던 일이다.

비록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준 사건 때문에 홍보가 미뤄지긴 했어도 할리우드라는 좋은 소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생각에는 지금 할리우드 촬영으로 화제를 만들고 지한이가 연말 시상식에서 상 탈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리고 Moonlight 촬영이 끝나면 드라마 하나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인데 TV에 나오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팬들이 떠날 겁니다. 가뜩이나 아역 배우들은 자라면서 다른 활동으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에 회의실에 앉아있던 이들이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주민이 상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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