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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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비서는 유능했다.

HJ그룹의 비서실에 채용된 인재이며 오너 일가를 바로 옆에서 보필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자였다.

지금은 탑엔터 소속이지만 원래 남궁진은 여기 있기에 너무 뛰어난 인재였던 것이다.

아, 그의 성은 남궁이 아니라 남이다.

오해 없도록 바란다.

“다큐 <3일>과 <천하장사>를 촬영하신 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최철호라고 합니다.”

남 비서는 하루 만에 촬영감독을 구해왔다.

두꺼운 팔을 가진 포동포동한 아저씨를 보고 아이들이 영훈의 뒤로 숨었다.

“소시지 같다.”

“아니야. 마시멜로 같은데.”

“얘들아. 사람을 눈앞에 두고 먹을 거에 비유하면 안 되지.”

영훈이 아이들을 뒤에서 꺼내며 인사를 시켰다.

“오지연입니다.”

“오지한입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철호 아저씨라고 불러주면 됩니다.”

“철호 감독님이라고 할게요.”

“철호 감독님.”

지연의 말에 아이들과 거리감을 좁혀 보려던 최 감독이 뻘쭘하게 웃었다.

역시 아이들은 쉽지 않았다.

“사장님 그런데 철호 감독님은 여기 왜 왔어요?”

“저 촬영해요? 그런데 대본 못 받았는데.”

“아니야. 저 감독님은 너희 그림을 찍으려고 왔어.”

“왜요?”

“왜 카메라로 찍어요?”

“일반 디지털카메라로는 그림이 주는 느낌을 다 담을 수 없어서 모셔왔어.”

“사진작가님도 있잖아요.”

“그 생각을 못 했군. 남 비서.”

“예. 준비하겠습니다.”

괜한 말에 순식간에 추가 인원이 늘어나자 지연이 눈을 깜빡였다.

우리 사장님 얼핏 돈 많은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막힘없이 일을 처리하는구나.

그런데 이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사장님. 그냥 촬영만 해요. 아니, 디지털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안 돼요?”

“그걸론 그림을 다 못 담을 텐데.”

“그치만 그림 찍는 건데 너무 과해요.”

아이의 말에 주민이 턱을 쓸었다.

이 정도가 과한가?

남 비서가 옆에 다가와 주민에게 조언했다.

“사장님. 나중에 영화 홍보할 때 쓴다고 말씀해 보시죠.”

솔깃한 내용에 주민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걸 찍어서 에밀리에게 보낼 거야. 그리고 영화 홍보할 때 영상을 풀 예정이다.”

주민의 말에 지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촬영 비하인드나 메이킹 영상으로 쓰겠다는 건가?

확실히 대본 리딩 영상도 홍보로 많이 올라왔었지.

그런데 이 시기에도 그랬었나?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후반부에 짤막한 비하인드 영상이 올라오곤 합니다.”

“아!”

쿠키 영상인가 보다.

역시 할리우드 빠르구나.

지연이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좋아요!”

좋았어!

아이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주민이 남 비서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잘했어. 남 비서.’

‘별거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사용하나?’

‘저도 잘 모릅니다.’

‘몰라도 돼. 잘했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어린아이를 훌륭하게 속여 넘긴 나쁜 어른들이 칭찬을 주고받았다.

* * *

“안녕 얘들아!”

어울리지 않게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성이 묵직한 가방을 들고 인사했다.

또 낯선 사람이다!

아이들이 다시 영훈의 뒤로 숨었다.

“오늘부터 지한이 코디네이터로 온 장미나라고 합니다!”

묘하게 텐션이 높은 언니다.

이제 곧 할리우드 촬영에 들어가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영훈 오빠가 미국 가서 혼자 심심하긴 했었지.

촬영하는 동안 말 상대도 늘어서 좋겠다.

“고 매니저님. 저 이것 좀 들어주세요.”

“이게 전부 뭡니까?”

“뭐긴요. 지한이가 촬영할 때 입을 옷이죠.”

이렇게 많이?

“매일 같은 옷을 입진 않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쪽이 평상복이고, 이쪽이 전시회나 작업할 때 입는 옷.”

“뭐가 달라요?”

“전시회 쪽이 조금 더 고급스러운 옷이야. 나머지는 영화사에서 요청한 대로 최대한 맞춰봤는데 그중에서 지한이한테 어울릴 법한 옷들을 가져와 봤어.”

“이거 전부 다 입어요?”

“골라봐야지.”

그러니까 인형 놀이를 하자는 거구나.

이 많은 옷들을 전부 입어야 하는 동생을 지연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너무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옷보다 더 많아 보였다.

“지한아 이거부터 입어볼까?”

“네에.”

촬영을 위한 일이라 지한이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미나가 지한이의 옷을 벗기고 직접 입히려고 하자 지연이 막았다.

“제가 도와줄게요.”

“어. 그럴래?”

코디의 팔에 걸린 옷을 들고 지연이 지한이랑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너머로 짐을 풀어놓느라 부산스러운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라마 찍을 때는 소영 누나가 미리 옷 준비해 줬는데.”

“이제는 우리가 옷을 챙겨가야 하나 봐. 지한이 네 비중이 늘어서 그런가 봐.”

“비중?”

“대사가 많다고”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지한이가 중요한 배역을 맡으면 맡을수록 따라다니는 스태프들이 점점 늘어날 거다.

챙겨줄 사람도 늘어날 테니 이제 내가 항상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겠지.

“이제 누나가 없어도 되겠다.”

“안 돼!”

옷을 입다 말고 지한이 지연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누나, 어디가? 나는 왜 안 데려가? 싫어. 같이 가.”

제 말에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안 지연이 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사과했다.

“미안해.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 뭐야? 왜 사과해?”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 누나는 그냥 지한이 촬영장에 안 따라가도 될 거 같아서.”

“싫어. 누나 내가 연기하는 거 계속 지켜봐 준다고 했잖아.”

“누나가 계속 따라다니는 거 안 싫어?”

“안 싫어. 나는 누나가 내 연기 봐 줬으면 좋겠어.”

“영훈 오빠랑 미나 언니가 누나 대신 있을 건데?”

“형이랑 그 사람은 누나가 아니잖아.”

배에 얼굴을 묻고 팔에서 힘을 풀지 않는 지한이 계속해서 가지 말라고 투정을 부렸다.

으음. 내 말에 아무래도 겁을 먹은 거 같은데.

아직 8살이고, 보호자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 사람들과만 있는 건 불안한 모양이다.

“알았어. 어디 안 갈게.”

“계속 같이 있겠다고 해 줘.”

“계속 같이 있을게.”

“약속?”

“그래 약속.”

“스케치북에 도장 찍을 수 있어?”

“…물론이지.”

내 동생. 잘 배웠구나.

어디 가서 밑지는 계약은 안 하겠어.

보고 배울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강렬한 생각에 지연이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똑똑똑.

“얘들아 아직 멀었니? 입을 옷이 엄청 많은데!”

“가요!”

문밖에 있는 이에게 대답한 지연이 동생을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누나가 도장 열 번, 백 번, 천 번이고 찍어줄게. 이제 옷 갈아입을까?”

“으응.”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진 동생을 보고 지연이 웃고 지한의 옷을 갈아입혔다.

* * *

쉬익-

아 시끄러.

쉭, 시익?

왜 자꾸 귓가에서 얼쩡대?

쉬시시시시-

“아, 진짜!”

지연이 짜증을 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데자뷴가?”

어딘가 익숙한 오색구름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공을 맴도는 피리 소리가 지연의 주위를 휘감았다.

“또 너냐?”

시이익!

오랜만이라는 듯이 하얀 뱀이 눈을 찡긋했다.

“웃지마, 정 안 든다.”

지연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어이 뱀.”

쉬익?

“그 목소리는 안 와?”

[기다렸니?]

“옴마야!”

지연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하여튼 뱀이나 이 공간이나 저 목소리나!

하나도 정이 안 가는 것들이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아니요.”

보내준 선물로는 뭐든 빨리 익히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얼굴 보정이 되는지 얼굴이랑 몸매는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생활이 변하게 된 건 탑엔터와의 계약 덕분이었다.

[우리 선물에 불만이 많은가 보네.]

“다른 거 보면 돈도 잘 벌고 재능도 팍팍 생기고 하던데 저희는 뭘 하든 많이 배워야 하니까 선물 같지 않아서요.”

[인간은 많은 걸 바라지.]

경고하듯이 낮아진 음성에 지연이 입이 꽉 다물렸다.

[제 스스로 무언가 하지 않는 이에게 우리가 왜 도와줘야 하지?]

“….”

[대가 없는 힘은 없단다. 그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해.]

“…알겠습니다.”

목소리의 말에 제가 한 말이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연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제 경고를 잘 받아들인 것 같자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너희들의 모습은 잘 지켜보고 있단다. 잘하고 있더구나.]

채찍 뒤에 이어진 당근에 지연의 어깨가 다시 펴졌다.

[그때 우리가 동생과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었지. 기억나니?]

“기억하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 우리가 준 선물에 문제는 없었지. 그런데 이변이 발생해서 이렇게 찾아왔단다.]

“이변이요?”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구나.]

목소리의 말에 오늘 있었던 일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며 온 힘을 다해 붙들었던 동생이 떠오르자 지연의 얼굴이 흐려졌다.

“제가 두고 갈까 봐 지한이가 불안해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버릴 거니?]

그때처럼 버릴 거냐고 묻는 말에 지연이 단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

“절대 안 버려요. 내 동생이야. 죽을 때까지 안 버려.”

그때와 다른 눈빛, 다른 대답에 지연에게 선물을 준 존재가 만족스러워했다.

[좋아. 끝까지 너희들을 지켜보마.]

“지켜보는 건 좋은데 사생활은 지켜주실 거죠?”

[어머 시간이 다 됐구나.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아니, 또…!”

* * *

“…진짜 어느 나라 무슨 신인지 꼭 알아낸다.”

스토커도 아니고 관음하는 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라니.

그땐 변태한테 잠시 쫄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흐응. 헤헤….”

옆을 돌아보자 아직 꿈속인지 웃는 얼굴로 잠꼬대를 하는 동생이 보였다.

자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동이 터 해가 뜰 때까지 지연은 가만히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 *

“흐아아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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