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적으로 손톱을 세워 포장지를 찢었다.
그사이 영훈은 자리를 떠 짐을 풀러 방으로 들어갔다.
“…이건 또 뭐지.”
옷방이 작업실로 바뀌어 있었다.
헨리 교수의 별장과 집에서 자주 보던 것들이 옷방에 가득했다.
“아니, 그럼 여기 있던 서랍장이랑 잡동사니는 어디 갔어!?”
영훈이 잃어버린 서랍장을 찾기 위해서 방을 돌아다녔다.
아니 고작 한 달 조금 더 있다 왔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바뀌었데.
아무래도 도우미 아주머니께 연락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 * *
“지한이의 할리우드 진출에 대해서 크게 홍보할 생각이었는데 테러 때문에 망했습니다.”
“망했다는 소리 하지 말도록. 지금은 뭘 해도 묻힐 때야, 몸 사리고 있어야 해.”
“하지만 정말 아쉽습니다. 무려 할리우든데.”
“사실 이미 캐스팅은 4월에 확정 나지 않았나.”
“그때는 다른 배우의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고요. 대본 리딩 현장도 찍어오고 영화제작 소식과 더불어서 홍보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는 영화 제작도 불투명하지 않습니까.”
“영화는 확실하게 제작될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탑엔터 직원들은 우리 배우를 자랑할 기회를 놓쳐 아쉬움이 가득했다.
경력이 오래된 실장들도 이렇게 반응하는데 홍보팀이나 다른 직원들은 얼마나 더 아쉬워할지 눈에 선했다.
“홍보할 타이밍이 미뤄진 것일 뿐, 다른 건 바뀌지 않아. 다들 침착하게 기다리자고.”
앞으로의 일정을 다시 점검하며 임시 회의가 끝났다.
사장실에 올라가서 자리에 앉은 주민이 목을 조르던 단추를 풀었다.
“후우.”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은 주민이 늘어졌다.
그래도 공항에 가서 직접 누나와 아이들을 보고 오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사장님.”
“왜.”
“고 매니저한테 연락이 왔는데 집이 좀 바뀐 것 같은데 뭔지 묻습니다.”
“아, 말해주는 걸 깜빡했군. 지연이 작업실 한다고 원래 있던 물건은 손님방으로 옮겨뒀다고 말하고. 거실에 있는 건 선물이니까 마음껏 쓰라고 말해 줘. 그리고 도우미 아줌마는 내일부터 다시 올 거라고도.”
“알겠습니다.”
남 비서가 사장의 말을 듣고 방을 나섰다.
주민이 다시 눈을 감았다.
* * *
“흐으으음.”
“흐으으음.”
지연과 지한이 똑같은 소리를 내며 똑같이 팔짱을 끼고 캔버스를 노려봤다.
뭘 그려야 하나.
우선 지한이 작품에 들어가는 그림 하나 그려보고 싶은데.
“지한아.”
“응.”
“리온은 왜 달이 좋은 걸까.”
“그거야 하늘 위에 커어다랗게 떠 있잖아. 엄청 멋져! 왕 같아!”
“해도 커어어다랗잖아. 낮에는 해밖에 안 보이는걸? 해가 더 왕 같아.”
“그치만 달이 더 좋아. 다른 별들이랑 같이 있잖아. 낮에는 해밖에 없어.”
지한의 말에 지연의 눈앞이 번뜩했다.
홀로 빛나는 태양이랑
모두와 같이 빛나는 달이라.
“그럼 같이 그려볼까?”
“뭘?”
“누나는 해를 그릴게. 너는 달을 그려봐.”
“좋아!”
그릴 것을 정한 아이들이 캔버스에 색연필을 그었다.
미리 젯소 칠을 해 둔 상태라 부담 없이 선을 그렸다.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해.
다른 이들을 살게 하지만 반대로 죽게 할 수도 있으며 모든 이에게 없어서는 안 될 빛.
너무 빛나서 다른 이들의 빛을 잃게 하는 해.
그중에서 나는 어떠한 모습을 그리고 싶은가.
계속 보면 눈이 멀어버리는 모습?
홀로 높은 곳에 빛나는 모습?
자애로운 빛을 선사하는 모습?
‘내가 그리고 싶은 해는 정해져 있어.’
색연필이 홀로 빛나는 태양을 그렸다.
가까이 오는 이들을 모조리 태워버려 홀로 빛날 수밖에 없는 태양을.
하얀 배경에 환한 노랑과 주황이 섞인 태양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재처럼 흩날리는 우주를 그린다.
우주 속 가장 빛나는 태양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둠마저 태워버렸다.
그 모습이 슬퍼서
지연은 태양을 고독에서 꺼내주고 싶었다.
똑똑.
“얘들아? 안에 있니?”
휴가가 주어진 동안 집에 다녀온 영훈이 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아이들을 찾았다.
거실에 없어 작업실 문을 연 영훈이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캔버스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청 무시무시하네.”
캔버스를 쳐다보는 눈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헨리 교수님한테 배워서 그런가?”
무시무시한 인상의 헨리 교수를 떠올린 영훈이 부르르 떨었다.
저럴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속에 있는 영감을 끄집어내는 작업이기에 화가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이었다.
“간식이나 준비해 볼까.”
그림을 그리고 나오면 아이들은 항상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엠마가 만들어준 달콤한 쿠키를 한가득 입에 넣었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영훈이 간식을 사러 나갔다.
* * *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이 입혀졌다.
흩날리는 재를 표현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물감을 가루로 날려 뿌려야 할까.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아무런 더러움도 묻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는 해를 그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가루가 묻을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점묘로 가야 하나.”
길을 정한 지연이 밖으로 나갔다.
TV를 올려놓은 거실장을 뒤져 이쑤시개와 면봉을 가져왔다.
“인디고, 바이올렛, 블랙.”
지연이 생각하는 우주의 색이다.
이쑤시개와 면봉에 물감을 묻혀 찍어봤다.
원하는 모양이 나왔다.
“좋아.”
지연이 부지런하게 배경을 채웠다.
“누나, 나도 써도 돼?”
“응. 가져가.”
지한도 뭔가 찍을 게 필요했는지 면봉과 이쑤시개를 가져갔다.
아이들이 또다시 말없이 작업에 열중했다.
찍고
바르고
문대고
한참을 팔이 저릴 정도로 손을 움직인 지연이 붓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막혀 있던 숨을 토해내듯이 크게 내쉬었다.
“다 그렸다.”
지연이 자리에 주저앉아 완성한 을 보았다.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다가 다가오는 이들마저 태워버린 태양이 캔버스에 있었다.
“우와.”
“? 오빠 언제부터 와 있었어?”
“아까부터. 지연아 너무 잘 그렸다.”
“히이. 그치? 어엄청 열심히 그렸어.”
지연이 벌러덩 누웠다.
작업실 천장을 본 지연이 고개를 돌려 영훈을 보았다.
“지한이는?”
“지한이는 아까 간식 먹으러 갔어.”
“벌써 다 그렸나?”
“그리다가 배고파서 빵 먹고 소파에서 자는 중.”
먼저 넉다운 된 동생의 소식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아직 해가 길 땐데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지?
“오빠. 나 배고파.”
“하루 종일 그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뭐 먹고 바로 자자.”
“일으켜 줘어.”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지연을 보고 고개를 저은 영훈이 지연을 안아 들었다.
“헤헷.”
옮겨다주니 좋단다.
인간 택시 취급에 영훈이 피식 웃었다.
저런 그림을 그렸으니 진이 다 빠질 만하지.
환기를 위해서 환기 스위치를 누르고 방을 나오면서 영훈이 다시 한번 캔버스를 보았다.
완성된 지연의 그림과 윤곽만 잡힌 지한의 그림이 보였다.
지연이 그린 해도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왠지 이 그림은 지한이가 그린 그림과 함께 봐야 할 것 같았다.
‘빨리 지한의 그림도 완성돼 두 그림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보고 싶네.’
영훈이 문을 닫고 나갔다.
* * *
“나도 열심히 그릴 거야!”
꼬박 하루를 써서 완성한 지연의 그림을 보고 자극받은 지한이 눈을 뜨자마자 한 소리였다.
물감이 마를 때까지 캔버스에 올려둔 지연이 오렌지 주스를 원샷하고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응!”
지한이 작업실로 도도도 뛰어갔다.
어제 하루 종일 그림을 완성시키느라 힘이 없는 지연이 소파 위에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지한이 들어간 작업실로 향해 있는 지연을 보고 영훈이 슬쩍 물었다.
“안 도와줘도 돼?”
“저건 지한이 그림이니까.”
“그래. 너희들이 알아서 하겠지.”
자신보다 더 똑 부러지는 아이들이니까 괜찮을 거다.
“지연아 그림 헨리 교수님한테도 보여줄까?”
“흐음. 지한이도 다 그리면.”
“그래. 알았다. 오빠가 알아서 할게.”
“응!”
소파에 늘어졌던 지연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더니 드로잉북을 가져왔다.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손을 움직였다.
슥, 스윽.
“지연아 이번에는 뭐 그려?”
“달.”
“달은 지한이가 그리고 있잖아.”
“지한이 달 말고 내 달.”
“그래. 그려라.”
천재들의 화법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한이가 지연이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듯이 지연이도 지한이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리온이 보는 달이 어떤 느낌인 줄 알겠어.’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지연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을 그렸다.
커다란 종이 가운데 길쭉한 아치형 창문이 그려졌고 그 너머로 조각난 달이 보였다.
창살 때문에 조각난 달은 어느 칸에서는 꽉 차 있었고 어느 칸은 귀퉁이만 있었다.
‘그리고 싶다.’
오늘 하루 쉴 생각이 가득하던 지연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실로 뛰어가는 지연을 본 영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여튼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니까.”
* * *
“남 비서. 쉬고 있는 촬영감독 있는지 찾아봐.”
“네. 이왕이면 다큐 쪽으로 알아볼까요.”
“그래. 그게 좋겠어.”
최대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잘 담기 위해서 남 비서가 다큐 촬영 감독을 제안했고, 주민이 동의했다.
아이들의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시간을 내어 찾아온 주민이 이 그림을 에밀리와 헨리 교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과한 행동이 아닌가 싶지만 뭐 어떤가.
자신은 돈이 많은데.
“해와 달이라.”
짝을 이룬 듯 나란히 걸린 그림을 바라봤다.
하나는 우주 속에서 홀로 빛나는 태양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밤하늘에서 별들과 함께 빛나는 달이었다.
태양과 달
고독과 유대
이 그림은 따로 봐도 좋았지만 함께 보면 더 좋았다.
“누가 유별난 남매 아니랄까 봐.”
뭘 해도 같이하던 아이들이 작품까지 같이 완성할 줄 몰랐다.
주민은 이 그림을 보고 날뛸 에밀리와 헨리를 떠올렸다.
“갑자기 찾아오지 않게 잘 말해야겠군.”
작업장 한쪽에서 건조되고 있는 두 그림을 잠시 감상한 주민이 시선을 옮겼다.
옮긴 쪽에는 창문과 달이 있었다.
지연이 순식간에 완성한 또 다른 작품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시나리오의 한 장면을 떠올린 주민이 신음성을 냈다.
“불과 이틀 만에 두 작품이라고?”
괴물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직 이 그림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이 앞으로 나올 작품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39. 다시 만난 뱀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