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픈 연기가 아니라 마음이 아픈 연기를 해야 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제안이 들어온 조지아라는 역이 마음에 들어서 승낙했다.
데이빗 감독에 대한 조사도 미리 했다.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설사 탑배우라고 해도 한마디 한다는 고집불통에 소신 있는 감독.
그런 이가 찍기로 결심했다면 리온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도 믿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오만했어. 그 아이의 연기에 맞추기 위해서는 나도 진짜 조지아가 돼야 해.”
동안인 데다가 하이틴스타의 이미지를 벗지 못한 소피아가 주먹을 쥐고 다짐했다.
이 영화야말로 자신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분기점이었다.
그녀가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스튜디오에서는 아직도 남매가 남아있었다.
“지이이이인짜! 정말 어디서 이런 애들이 나타났지?”
에밀리가 아이들을 품에 안고 기특하다는 듯이 볼을 비볐다.
“지한이 덕분에 데이빗 감독이 10년 동안 묵혀뒀던 영화를 찍기로 했지, 헨리 교수가 자문을 맡아 주기로 했지, 지연이 네가 리온의 작품을 그려 주기로 했지! 진짜 우리 영화 잘 될 거야!”
“에밀리, 정확하게는 묵혀둔 게 아니라 찍을 수 있는 배우가 없었던 거야.”
“됐어! 나이를 조금 더 올리자니까.”
“그러면 캐릭터 설정을 다시 짜야 하잖아. 앞으로의 전개가 크게 변한다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오랜 친구를 보고 에밀리가 불퉁한 시선을 보냈지만 데이빗은 피하지 않았다.
“그럼 너희들 이제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니?”
“네!”
“그래. 조심해서 돌아가고. 지한이랑 지연이 기대하고 있을게.”
손을 흔들고 에밀리가 아이들을 배웅했다.
곧 비행기 탈 시간이 되자 애런과 영훈이 아이들을 챙겨 나갔다.
“아.”
무언가가 떠오른 지연이 멈춰 서더니 에밀리에게로 돌아갔다.
고개를 숙여보라는 듯이 옷을 잡아당기는 지연에 에밀리가 허리를 숙였다.
“에밀리. 11일에는 절대 어디 가면 안 돼.”
“그게 무슨 말이야?”
“9월 11일이야. 절대 안 돼. 공항 근처도 가지 마.”
할 말만 마친 지연이 다시 등을 돌려 가던 길로 돌아갔다.
“에밀리랑 무슨 말 했어?”
“하늘 조심하라고 말했어.”
“또 그 소리니.”
지연의 말에 영훈이 질린 얼굴을 했다.
꿈에서 봤다는데 11일에 무슨 큰일이 생긴다나?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하도 말하고 다니는 통에 이제 모두의 머릿속에 11일이 박혀버렸다.
‘얼른 빨리 11일이 지나가야지 원.’
미래를 모르는 영훈이 속 편하게 생각했다.
* * *
영훈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서일까, 그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학기가 개학하자 헨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우리는 선생님의 배려로 촬영이 시작할 때까지 시카고에 있는 헨리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 어디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선생님. 누나랑 약속까지 했잖아요.”
“그래. 알았다. 어디 안 가니 이거 놔라.”
고목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다리 한 짝씩 매달린 아이들을 본 헨리가 졌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들과 한 약속이니 어쩔 수 없지.
헨리가 거실에 앉자 아이들이 그를 감시했다.
‘지한아, 선생님 신발은?’
‘침대 밑에 숨겨 놨어.’
어제 미리 작전한 대로 용의주도하게 헨리의 신발을 숨긴 아이들이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헨리가 어디 가지 못하게 그의 근처에서 길목을 차단한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펴고 연필을 들었다.
슥, 스윽.
한 달 정도 되는 수업 동안 몰라보게 실력이 상승한 지연이 금세 스케치를 완성했다.
“누나 이거 리온이 그린 거야?”
“응. 어때? 괜찮아?”
“으음. 요기랑 요기는 이렇게 하는 게 좋아.”
“그래?”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스케치를 수정해나갔다.
헨리의 시선이 슬그머니 스케치북으로 향했다.
“이전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누나 그림이 좋긴 한데. 리온이 그려야 하니까요. 리온은 이렇게 그리지 않아요.”
지한의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를 위한 작품이니 좋은 평가였다.
“너희들 이거 좀 먹으면서 하렴.”
부엌에서 엠마가 아이들을 위해 마들렌을 구워왔다.
엠마의 쿠키!
아이들이 고무줄이 튕기듯이 일어나 엠마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들게요.”
“저 주세요.”
이미 제 몫을 챙겨간 아이들이 소파에 앉고, 남편과 영훈의 몫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부인이 구운 쿠키는 맛있다니까요.”
“고마워요, 고.”
“아내의 솜씨가 좋지. 내 덩치는 다 엠마의 요리 때문이야.”
“당신은 저 만나기 전에도 그 체구였어요.”
엠마의 팩트 폭격에 헨리가 침묵했다.
조용히 강한 스타일이구나.
햄스터처럼 마들렌을 오물거리던 지연이 속으로 엠마에 대한 평가를 상승시켰다.
“당신이 애들 말을 이렇게 잘 들을 줄 몰랐어요.”
“어쩔 수 없지.”
“우리 애들이 들으면 서운하다고 하겠어요.”
“아니 그럼 다리에 매달리는데 어떡해?”
“욘과 각서를 쓴 것 때문은 아니구요?”
“그것도 있지.”
영훈이 불쌍한 피해자를 보고 안쓰러운 눈을 했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두 번째였다.
그때 TV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비행기가 세계 무역 센터에 부딪쳤습니다.
뉴스를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 * *
-…미국에서 테러가 일어났어요!
“이게 대체.”
지연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전부 11일을 머리에 새겨두고 있어서 집에 와서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TV 앞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급하게 걸려온 영훈의 전화에 주민은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이 멍하게 같은 말만 반복했다.
“지금, 지금 당장 지연이 바꿔 줄 수 있나.”
-네, 사장님.
잠시 수화기 너머가 부산스러웠다.
-여보세요.
“지연이니?”
-네.
“…어떻게 알았어?”
-뭐를요?
“비행기 테러가 일어날 거란 거.”
하늘을 조심하라던 아이의 말, 공항을 가지 말라던 경고.
지연의 말은 확실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꿈에서 봤어요.
“꿈?”
-비행기 타고 있었는데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그 나이대면 한 번씩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고 하던데.
그것이었나?
아니야, 그러기에는 날짜까지 너무 정확했어.
“오늘 지연이가 말한 대로 정말 큰일이 일어났어. 오늘이란 건 어떻게 알았니?”
-꿈에서 누가 그랬어요. 오늘이 11일이라고.
“그래….”
그냥 넘어가기에는 소름 돋게 정확한 꿈이었지만 아이가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겠는가.
예지몽이라도 꾼 건가?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생각했더니 꿈도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었다.
“그래. 당분간 몸조심하고. 위험하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혹시 다음에도 비슷한 꿈을 꾸면 아저씨한테 알려줄래?”
-네. 사장 아저씨도 건강하세요.
“고맙다. 고 매니저 좀 바꿔줄래?”
-네.
벌써 두 번째다.
승우의 영화 관객 수가 400만을 넘는다는 것과
비행기 테러 사건이 일어나는 것.
“만약 우연이 3번 겹친다면….”
그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필연?
-사장님. 고영훈입니다.
“애들 경호에 신경 쓰고 사태가 진정되면 즉시 아이들과 귀국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지연이가 뭔가 조심하라거나 작품에 관해서 얘기한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
-옙!
지연의 말에 무언가 있다고 느낀 영훈이 각 잡힌 태도로 대답했다.
아이들의 안전을 당부하며 주민이 전화를 끊었다.
“당분간 바쁘겠어.”
* * *
전대미문의 사건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난리가 난 상황에서 지연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는걸.’
안다고 해서 고작 10살짜리 어린아이가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구한테 가서 테러가 있을 거라고 말해도 믿어주는 이 하나 없었을 거다.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받아들이자.
“누나아.”
“어, 응.”
지한이 살풋 잠이 깨서 눈을 비볐다.
올해 고작 8살이 된 지한도 어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요 며칠 지한은 지연의 옆에 착 붙어 잤다.
“조금 더 자.”
“으응.”
이 충격이 수습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하물며 여기는 사건이 있었던 미국 본토.
이럴 땐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최고였다.
지한이를 토닥여 다시 재운 지연이 침대에서 스르륵 내려와 밖으로 나섰다.
“누구, 욘이니?”
헨리 교수가 퀭한 눈으로 지연을 반겼다.
“선생님 안 잤어요?”
“…걱정이 많아서.”
“괜찮아요.”
지연이 패전한 장수 같은 헨리의 곁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고맙다.”
“뭐가요?”
“위험하다고 알려줘서.”
“그냥 나쁜 꿈 때문에 억지 부린 거예요.”
“그래도 그 꿈 덕분에 안 좋은 일을 피할 수 있었어.”
말은 그렇게 해도 자선 경매가 있었던 곳은 테러가 있었던 곳도 아니었으면서.
내 덕분이라고 말하는 헨리에게 지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다음에도 제가 약속하자고 하면 해 주셔야 해요.”
“허헛, 그래.”
지친 얼굴로 험상궂게 웃는 헨리를 보고 지연이 이번에는 스케치북에 서명을 받지 않기로 했다.
38. 작품명 ,
누군가 그랬던가.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고.
그 말처럼 전 세계도 서서히 일상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민은 사태가 진정되자마자 표를 구해 우리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많이 놀랐는지 공항으로 직접 마중 나오기도 했었다.
“누나는 안 보이니?”
“…잘 왔어.”
아이들을 부탁한다며 자신 대신 가준 누난데 멀쩡한 모습을 보자 주민의 눈이 촉촉해졌다.
공과 사는 철저히 분리한다며 집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냉정해지는 동생인데 보자마자 울컥한 모습을 본 아영이 동생을 안아줬다.
제 동생의 반응을 보고 만족한 영아가 주민과 헤어져 회사로 직행했다.
“저 이모가 잘 챙겨줬니?”
“가끔 와서 맛있는 거 사줬어요.”
“물감이랑 스케치북 많이 사줬어요.”
“우리 그림 그리는 거 보고 갔어요.”
“잘 챙긴 거 맞겠지?”
아이들의 대답에 주민이 미묘한 듯 혼잣말을 했다.
“가자, 집으로.”
“네!”
“네에!”
“고 매니저는 일주일 쉬고 출근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공 사장이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왔는데 숙소를 변한 것이 없었다.
“누나 이거 봐!”
“아직 추석도 안 됐는데 산타가 다녀갔나.”
변한 게 있었다.
거실 한복판에 상자들이 가득했다.
“오빠 이게 뭐야?”
“어. 그러게 이게 뭘까.”
같이 막 귀국한 참인데 영훈이라고 아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딱 봐도 선물로 보이는 상자 무더기에 아이들이 포르르 뛰듯이 날아갔다.
“카드다!”
“‘지한이 첫 할리우드 영화를 축하합니다.’ 지한아, 너한테 온 선물인가 봐!”
“우와아!”
지한이가 팔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형, 형! 이거 지금 뜯어봐도 돼요?”
“잠시만. 지연아, 카드 좀 보여줄래?”
“여기.”
“사장님이 보내셨나 보네. 뜯어도 될 거 같다.”
“와아아!”
아이들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