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잠 안 오는데.”
“그냥 자. 자는 게 오빠 도와주는 거야.”
너무 놀렸나보다.
남매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얌전히 옆방으로 걸어갔다.
“오빠.”
“또 왜?”
“우리 아직 안 씻었는데.”
“….”
더운 여름날.
아무리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냈다고 하지만 땀을 흘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영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방향을 틀어 아이들을 욕실로 이끌었다.
* * *
-Hello? Mr. Ko?
“말씀하세요, 애런.”
-제가 제대로 전화한 게 맞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애런의 말에 LA에 오고 나서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린 영훈의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지연이가 가끔 해주는 요리를 먹지 않았다면 향수병에 걸릴 뻔했다.
물론 요리할 때 칼질은 자신이 했다.
처음에는 옆에서 지켜보던 지연이 불안하게 지켜보긴 했는데 이제는 조금 능숙해졌다.
‘LA에 와서 늘어나는 것은 양육 스킬과, 칼질, 영어 회화밖에 없구나.’
잠시 딴생각을 하던 영훈의 정신을 애런이 일깨웠다.
-미스터 고?
“아, 저는 잘 지냈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배우 캐스팅이 끝나서 말입니다. 조만간 미팅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날짜는 어떻게 됩니까?”
-미팅은 9월 5일로 정해졌습니다. 촬영은 11월 마지막 주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변경 사항이 있으면 바로 말해주세요.”
-물론이죠. 그럼 조만간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애런에게 전달받은 사항을 곧바로 팀장에게 보고한 뒤, 영훈이 거실 한쪽에 앉아 기다렸다.
아이들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또 다시 외로운 싸움이었다.
“훈? 오늘도 영어 공부를 하고 있나요?”
“아, 엠마. 열심히 해야죠. 여기까지 와서 아이들에게 통역해 달라고 할 순 없어요.”
“뭘 배우려고 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죠.”
“하하. 아이들이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저도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사실 일본어는 조금 배워뒀었는데 제가 맡은 배우가 바로 할리우드로 진출할 줄은 몰랐어요.”
“지한이 말이죠? 저 아이가 연기를 그렇게 잘하나요?”
“네! 무려 영화 주연으로 캐스팅 됐어요.”
“어머나. 대견해라. 지한의 연기를 빨리 보고 싶네요.”
“과제용으로 촬영한 게 있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영훈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왔다.
지연이가 지한이의 모습을 그냥 촬영할 때도 있어서 항상 들고 다니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영훈이 자식을 자랑하는 부모처럼 쉴 새 없이 지한을 자랑했다.
엠마는 화면을 통해 본 지한의 연기를 보고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빨라지는 말에 영훈이 가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할 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소통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당신 뭐 보고 있어?”
“어머나! 당신 언제 나왔어요?”
“조금 전에. 그런데 그거 뭐야? 지한인가?”
“맞아요. 지한이 연기하는 영상이에요. 당신도 볼래요?”
“나중에. 조교한테서 연락이 와서 잠시 전화하러 나왔어.”
“알았어요. 일 보고 와요.”
“그래.”
헨리가 통화하러 자리를 비웠다.
수업이 잠시 중단되자 아이들이 거실로 쪼르르 나왔다.
“형! 그거 내 동영상이야?”
“그래. 맞아.”
“보여줬어? 엠마, 봤어요?”
“그래. 봤어. 지한이 연기 너무 잘하더라.”
“정말요? 저 잘했어요?”
“내가 보기에는 정말 잘하던걸?”
“히히히!”
엠마의 칭찬에 지한의 광대가 하늘로 올라갔다.
볼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지한을 보고 지연이 뿌듯하게 웃었다.
‘암. 내 동생이 연기는 끝내주게 하지.’
지연은 앞으로 동생이 칸이랑 오스카를 씹어 먹을 건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때는요 리온이 처음으로 엄마랑 대화가 통한 날이에요.”
“그랬니?”
“그동안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엄마가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기뻤어요.”
“그렇구나.”
“그리고요.”
지한이 신이 나서 엠마에게 자신의 연기를 하나씩 설명했다.
어떤 장면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다.
이때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안 돼서 연습을 많이 했다.
등등.
엄마한테 성적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엠마에게 말하는 지한을 보고 지연이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달칵.
“여보 왔어요?”
“어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헨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왔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는지 영훈의 몸이 소파 위에서 튀었다.
“자선 경매에 쓸 그림 한 점 내 달라고 하더군.”
“누구를 위한 경맨데요?”
“소아 백혈병 환자들을 위한 경매래.”
백혈병이라니.
왠지 익숙한 병명에 남매와 영훈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게 웃겼다.
“애들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도와준 미술관에서 주최하는 거니 참석해야지.”
“당신 그림이 되도록 많은 사람이 봐 줄 수 있는 곳에서 가져갔으면 좋겠네요.”
“그래.”
엠마가 헨리가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말했다.
자신의 그림이 누군가의 창고에서 쓰러져 가는 것보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봐 주길 원한다는 것을 아내는 이해했다.
“경매는 언제예요?”
“9월 11일.”
귓가에 스치는 익숙한 숫자에 지연의 고개가 파드득 움직였다.
“안 돼요!”
“욘?”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지연이 헨리를 붙들었다.
갑작스러운 지연의 행동에 헨리가 의아해하며 지연을 자신의 몸에서 떨어트려 눈높이를 맞췄다.
“9월 11일에는 어디가면 안 돼요.”
“욘, 그게 무슨 말이니?”
“그날 엄청 위험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그 자선 경매란 것도 취소될 게 분명해요.”
아이의 말에 어른들이 시선을 나눴다.
“욘. 그냥 자선 경매에 다녀오는 거야. 경비도 확실하고 신원이 보장된 이들에게만 초대장이 간단다.”
“그게 아니에요.”
“그러면?”
“경매장이 위험한 게 아니에요. 하늘이 위험해요.”
아리송한 지연의 말에 어른들의 고개가 또 한 번 까딱였다.
지연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아니 그날은 테러가 일어날 거라고!’
그때는 초등학생이었고 커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난 테러라는 것과 전 세계적으로 크나큰 충격을 준 날이라는 사실만 대략 알고 있었다.
어떤 비행기가 하이잭되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선생님이 탄 비행기가 하이잭되면 어떡해.’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남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국 땅에 있다 보니 남 일이 아니게 돼버렸다.
잊고 있었던 그날에 지연이 억지로 떼를 썼다.
오형우나 이미란이었다면 그런 일 당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헨리는 달랐다.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엠마랑 영훈에게서 들었다.
그런 이가 순전히 선의로 자신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지연의 옆에 지한이 다가와 같이 헨리의 옷자락을 쥐었다.
“선생님 누나 말 들어주면 안 돼요?”
지한의 행동에 지연이 놀라 돌아봤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지한을 보고 지연이 울컥했다.
지한이까지 합세하자 헨리가 아이들이 다칠까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래. 알았다. 그날은 어디 가지 않으마. 그림만 보내도록 할게.”
“진짜죠? 정말이죠?”
“선생님 누나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헨리의 말에 아이들이 방방 뛰었다.
“약속해요.”
“그래 약속.”
“절대 어기지 않을 거죠.”
“절대로.”
아이답지 않게 성숙해 보였는데 그래도 아이같이 떼를 쓰는 모습에 헨리가 빙그레 웃었다.
그 험악한 얼굴도 이제는 적응해서 무섭지 않았다.
“그럼 여기에 서명해주세요.”
“응?”
지연이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누군가의 지장을 찍은 이후 다시 등장한 스케치북에 헨리는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37. 예언자 오지연?
9월 5일.
M&M 스튜디오.
가제 Moonlight의 대본 리딩을 위해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소피아. 오랜만이야.”
“잭슨. 네가 올 거란 얘기는 들었어.”
이 영화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남녀 배우가 인사를 나눴다.
예전에 한 번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났던 이라 반가웠다.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리온 역을 맡은 아이. 동양인이라던데.”
동양인이란 말에 담긴 미미한 불쾌함을 읽은 소피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연기를 잘해서 제작사에서 가장 먼저 캐스팅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나 보지?”
“그렇지만 너랑 내가 캐스팅됐는데 아이가 동양인이면 관객들이 몰입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까?”
날카로운 소피아의 말에 한발 물러난 잭슨이 소심하게 말했다.
“제작사에서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그런 거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가서 대본 한 자라도 더 봐.”
그렇게 말하고 소피아가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잭슨이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배우가 돼서는 연기를 봐야지 오자마자 동양인 소리를 꺼내다니.
불쾌한 기분이 된 소피아가 자신의 대본을 꺼내 들었다.
“모두 다 모이신 것 같네요.”
“아직 리온 역의 배우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저 여기 있어요.”
한 배우의 말에 에밀리의 뒤에서 지한이 튀어나왔다.
지한이 에밀리의 뒤에서 걸어 나와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자리로 가 앉았다.
잘생긴 어린아이의 등장에 모여 있던 이들이 한눈에 그가 화제의 동양인 배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이제 다 왔죠? 대본 리딩 시작해 볼까요?”
“모두 반갑습니다. Moonlight의 감독을 맡은 데이빗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앤디 마벨 역의 잭슨 네이든입니다.”
“조지아 마벨 역의 소피아 하트입니다. 반갑습니다.”
테이블을 빙 돌아 배우들이 차례대로 인사했다.
그리고 감독의 옆, 잭슨과 소피아의 맞은편에 앉은 지한의 차례가 왔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지한입니다. 리온 마벨을 연기할 거예요.”
지한이 할리우드 배우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 * *
감독이 대본 리딩을 시작했다.
조지아 역을 맡은 소피아가 부드럽게 내레이션을 뱉었다.
안정적인 그녀의 대사에 지한이와 지연의 눈동자가 똑같이 반짝였다.
배우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애런과 함께 벽에 바짝 붙어 있던 지연이 소피아를 주목했다.
‘이제 곧 지한이 차례.’
지한의 연기 상대를 해 주면서 대본을 외우고 있던 지연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리온?”
“….”
“아가?”
“….”
리온이 입을 살짝 벌리고 대본 위에 무언가를 그렸다.
집중하고 있는 듯 미간에 힘을 줘서 주름진 얼굴로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리온. 엄마가 얘기하잖니.”
조지아의 말에 리온의 고개가 그녀에게 향했다.
아이의 얼굴을 본 소피아는 몰입이 깨졌지만 금세 감정을 수습하고 다시 조지아의 말을 이었다.
“후우.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는데 엄마한테 할 말 없어?”
“아니.”
그 다음 조지아가 리온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몸을 돌리는 장면이 나왔다.
“리온!”
“아아아아!”
리온이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조지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리온을 진정시키려 했다.
“리온, 왜 그래. 괜찮아. 엄마가 미안해.”
“아아! 아아아!!”
“미안해. 안 그럴게.”
엄마의 다독임에 리온이 쌕쌕 거친 호흡을 내쉬며 진정해갔다.
소피아와 지한이 강렬한 연기를 이어나가자 주위에서 보고 있던 배우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꽤 잘하잖아?’
‘소피아의 연기가 그동안 많이 늘었군.’
‘저 아이는 뭐지? 장면에 따른 감정 변화가 능숙해. 호흡도 안정적이군.’
모두가 대본 리딩에 열정적으로 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장시간 대본 리딩을 한 배우들이 진이 빠져 스튜디오를 나섰다.
그저 가볍게 대사를 맞춰볼 생각이었는데 그 아이 때문에 모두가 실제 촬영을 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같은 대사를 읊었다.
소피아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리딩을 상기했다.
“대사 못 칠 뻔했어.”
“응? 소피아 지금 뭐라고 했어?”
“너도 봤지? 지한이란 아이의 연기.”
“아. 봤지.”
이번 영화는 아역의 연기력이 꽤 높게 요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