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을 덮는 소리에 남매와 영훈이 화들짝 놀랐다.
“커흡. 코로 나왔어.”
“에이. 지지.”
“어머나, 괜찮아요? 여기 티슈.”
코로 커피를 뿜은 영훈에게 엠마가 티슈를 건네줬다.
“얘야.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저, 저요?”
“그래.”
“지연이라고 해요.”
“지욘?”
“연이요.”
“욘?”
“…편하게 부르세요.”
내 이름을 정확하게 듣는 것은 포기했다.
그래, 의미만 통하면 됐지.
“너 나한테서 그림 배워보지 않을래?”
헨리의 제안에 지연이 눈을 깜빡였다.
“제가요?”
“그래. 내가 너에게 다른 것도 알려주마.”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지연은 이게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지한이 영화 때문에 둘이 같이 그림 연습을 해야 하기도 했고, 영화 후반에는 지한이가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도 나왔다.
영훈 오빠가 알아온 바에 의하면 실력은 확실하다고 하니까 배워서 나쁠 것은 없겠지.
“좋아요. 그런데 지한이도 같이 배워도 되요?”
“지하니?”
“한이요. 제 동생이에요.”
“허니?”
“교수님 마음대로 부르세요.”
저놈의 혀에는 버터칠을 얼마나 한 거야.
지연이 티슈로 코를 풀고 있는 영훈을 대신해서 가방에서 다른 스케치북을 꺼냈다.
“이거 지한이가 그린 거예요.”
헨리가 스케치북을 받아들고 한 장씩 천천히 넘겼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렸는지 로봇, 지연의 얼굴, 공룡, 이상한 쫄쫄이를 입은 남자 등 다양한 그림들이 보였다.
확실히 아이치고는 잘 그리네.
그러고 보니 이 아이가 영화의 주연으로 뽑힌 아인가?
“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냐?”
“누나랑 같이 그리는 건 좋아요. 재밌고, 또 연기하는 데 도움이 돼요.”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걸로 보이는데 벌써부터 연기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배우려 하다니.
자신이 하려는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도 가르쳐주마.”
“…히힛!”
헨리의 말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지한이 한 박자 늦게 기뻐했다.
일단 누나랑 같이 배운다는 것이 좋은 것 같았다.
“크흠! 흠! 그런데 교수님. 방학 끝나면, 우리, 다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또 언제 오나?”
“영화 촬영할 때, 다시 돌아옵니다. 11월 쯤.”
영훈이 더듬더듬 영어로 말했다.
속성으로 배운 터라 조금 어눌하기는 했어도 필요한 정보를 잘 전달한 그의 말에 헨리가 미간을 좁혔다.
흠칫!
얼굴 근육을 조금만 움직여도 험상궂게 변하는 헨리의 얼굴에 영훈이 잠시 움찔하다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내가 뭐 잘못 말했니?”
“아니요.”
“우리 11월에 다시 온다고 말했어요.”
“그렇구나.”
그럼 실수한 건 없는데 왜 저러시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헨리 교수를 보고 영훈이 시선을 피하며 몸을 슬쩍 돌렸다.
본능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자세였다.
“일단 이번 방학까지는 내가 데리고 있겠네.”
“이미, 호텔, 예약했습니다.”
“…그럼 매일 아침 여기로 오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헨리와의 말다툼에서 이긴 영훈이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를 봤지만 자신의 앞에 다시 커피를 타 준 엠마 덕분에 금세 환한 얼굴이 되었다.
지켜보고 있던 지연이 판정을 내렸다.
헨리 의문의 1패!
영훈 오빠 의문의 1승!
* * *
-…그래서 방학동안 헨리 교수가 애들을 가르치기로 했어.
“왜 애들을 혼자 보낸 거야.”
-호호호. 오랜만에 에밀리를 만났더니 나도 모르게.
철없는 누나의 말에 주민이 눈두덩이를 짚었다.
나 대신 책임지고 잘 돌보겠다며!
이러고도 호텔이랑 백화점 잘도 관리하네!
누나보고 얼음여왕이라고 하는 거기 직원들이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후우. 그럼 지한이 연기 수업은 선생님과 잘 대화해 봐야겠네.”
-그런 건 네가 잘 알아서 할 거라고 믿어, 내 동생.
“제발 부탁이니까 애들이 거기서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줘.”
-그래그래. 그건 너무 걱정 마. 오히려 헨리 교수가 방학 때만 가르친다고 애가 타는 모습이던걸?
“교수가?”
-그래. 그리고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헨리 교수에게서 직접 그림을 배우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야. 미술계에서는 아직도 그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주길 바라는 팬들이 많아.
자신의 누나, 공아영의 말에 주민이 진지한 얼굴이 됐다.
사실 아이들에게 정규 교육이 필요한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남매의 재능은 넘쳐났고 그 재능을 꽃피우는 데만 시간을 쏟아 부어도 부족했다.
이러한 주민의 생각에는 이미 정규 교육의 수준을 넘는 아이들의 수준도 한 몫 했다.
‘헨리 교수의 1대1 수업과 초등학교 정규 수업 중 어느 것이 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전학 전의 학교 성적이야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 조금 똑똑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학 오자마자 시험에서 100점을 연달아 받아오는 아이들을 보고 주민도 놀랐다.
지한이는 하루 종일 연기 연습을, 지연이는 지한이의 연기 연습을 지켜보고 도우미 아주머니에게서 요리를 배운다.
지난번 촬영장에서는 지연이 싸 온 도시락을 먹으려고 대기실 앞을 스태프들이 기웃거린다는 웃지 못할 보고도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술에 대한 재능까지.
“누나.”
-어, 왜?
“누나 생각은 어때? 애들을 학교를 보낼까 말까.”
-솔직히 내가 뭐라고 못 하겠네. 애들 부모는 내가 아니잖아?
부모 얘기에 주민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지금도 가끔 보고받는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동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딴 것들이 무슨 부모라고.’
-그래도 내 애들이 만약 이 아이들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바로 홈스쿨링 시킬 거야.
누나의 대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미 아이들에게 학교 정규 교육을 넘어서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중학교에 올라갈 때가 되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헨리 교수의 기회가 아이들에게 더 득이 될 것이다.
“좋아. 그럼 내가 홈스쿨링 알아볼게. 아이들에게는 누나가 물어봐줘.”
-그래, 알았어.
“강요하진 말고. 애들 의사가 제일 중요한 거 알지?”
-알았어, 얘는 진짜 누가 보면 네가 걔네들 아빤 줄 알겠다.
누나의 말에 주민이 잠시 묘한 얼굴이 되더니 이내 고개를 털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누나도 이제 진짜 계속 애들 옆에 있어줘.”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누나도 일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거 알지? 지금이야 전화상으로 업무를 보고 있다지만 떨어져 있을 수도 있어.
“알아. 그런 사정까진 내가 뭐라 하지 못해.
-하여튼 네 부탁으로 나도 휴가 아닌 휴가에 온 셈이니 고맙다.
호텔과 백화점 대표로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준 누나의 말에 주민의 얼굴이 잠시 부드럽게 풀렸다.
“고마워, 누나.”
-어머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이건 녹음해야 해! 다시 한번 말해 봐.
“…끊을게.”
-잠ㄲ!
주민이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우리 집 식구들에게는 뭔가 틈을 보여서는 안 된 다니까.
고개를 젓던 주민이 전화기를 들어 비서에게 연락했다.
-네, 사장님.
“남 비서. 지한이랑 지연이 홈스쿨링 좀 알아봐.”
-알겠습니다.
36. 그날
“자, 잘 봐라. 이게 그림을 그리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도형들이니까.”
“왜 그게 기본이에요?”
헨리의 말에 지한이 순수하게 물었다.
“모든 사물은 이 도형들로 단순화할 수 있단다. 보렴.”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헨리가 화분을 가져왔다.
화분을 두고 원뿔, 원기둥, 원으로 해체한 헨리의 스케치를 보고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선생님 마법사예요?”
“아니란다. 너희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미술 시간에 정육면체 그리기는 나도 해본 거 같은데.
지연이 연필을 들었다.
헨리가 위험하다면서 대신 깎아준 연필이었다.
누나가 선을 그리자 지한이도 연필을 잡고 선을 그렸다.
스윽, 슥, 스윽.
대범하게 선을 긋자 헨리가 그린 도형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누나와 함께 화분을 그리는 지한도 점차 선에 숙달되어갔다.
‘놀랍군. 이렇게 빠르게 습득하는 이들은 처음 봤어.’
자신도 어릴 때 천재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런 자신도 한 번에 이 정도로 스케치를 하지는 못했다.
처음 보고 또래 아이들보다 나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지한도 어느새 영재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도대체 이 남매는 뭐지?’
이 아이들이 어디까지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올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이들의 보호자로 따라온 남자의 말에 의하면 아이들이 다음 학기부터 학교를 가지 않고 홈스쿨링을 한다고 한다.
정말이지 자신에게 천만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남매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니.
오랜 시간 강단에 서면서 지쳐왔던 마음에 활기가 타올랐다.
“잘했다. 그럼 다음은,”
똑똑
“헨리?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밥부터 먹자.”
“와아!”
“엠마. 오늘 메뉴는 뭐예요?”
“너희들이 좋아하는 바비큐야.”
“예쓰!”
“바로 갈게요!”
점심부터 바비큐라는 거창한 메뉴에 아이들이 잔뜩 신이 나서 의자에 내려왔다.
날듯이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헨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빨리 와요.”
지연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가 보기만 해도 엄숙해지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얼른 가자.”
* * *
“아이들은 잘 수업 받고 있나?”
-네. 헨리 교수님 별장에서 오후까지 수업 받고 저녁까지 먹은 뒤 호텔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한이 연기 수업은 어떻게 됐나?”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꼬박꼬박 하고 있습니다. 지연이가 옆에서 봐주고 있거든요.
“지연이가?”
-네. 옆에서 지한이가 연기할 때 안 좋은 습관이 있는지 발성은 잘하고 있는지 대본 분석을 잘하는지 도와주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아이라니까.
연기 수업에 항상 따라붙더니 선생을 보고 그런 것도 배운 모양이다.
-지한이 선생님이 이제 수업을 자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선생님 의견대로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배우 캐스팅이 끝난다고 하더군. 기사도 나갈 예정이야. 미팅 일정이 잡히면 전달하지.”
-넵!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팀장한테 보고하지 말고 나한테 바로 연락하도록 해.”
-헙, 알겠습니다.
무려 사장에게 직접 연락받고 급한 일 한정이지만 직통으로 사장에게 보고할 수 있게 되다니.
자신과 같은 연차의 매니저 중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은 아마 자신이 최초일 것이다.
콕콕.
“형, 뭐 해?”
“오빠 왜 허공에 대고 인사해?”
남매는 전화를 받다 말고 허리를 숙여 허공에 인사하는 영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비겁하게 옆구리를 찌르는 아이들의 손을 꿀렁거리며 피한 영훈이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얘들아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란 거야.”
“허공에다가 인사하는 게?”
“누나, 사회생활이 뭐야?”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야.”
“그렇구나.”
지한이에게 사회생활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며 지연이 영훈에게 물었다.
“오빠 사장님이야? 사장님이 뭐래?”
“지한이 연기 수업 덜 받아도 될 거 같다고 말씀드렸어.”
“지한이가 잘해서?”
“나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
“그래. 그래서 선생님이 지한이한테 가르칠 게 더 없대.”
“아닌데. 나 아직 많이 배워야 하는데.”
주변에서 계속 연기를 잘한다, 재능이 있다, 천재다. 라고 말해주어도 지한이는 항상 아직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저게 바로 천재의 사고인가?
그런 것보다 눈앞에 또 다른 천재가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연이와 지한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영훈이 고개를 털었다.
“아, 또 전달사항.”
“뭔데?”
“형, 뭐야? 응? 뭔데뭔데?”
“얘들아 잠시만 얌전히 있자.”
하루 종일 헨리 교수한테서 수업받고 호텔에 온 데다가 저녁에는 민재휘 선생이 내준 과제를 하느라 바빴을 텐데 얘들은 왜 안 지치지?
24시간 풀충전 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영훈이 집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제가 불효자였습니다. 돌아가면 잘하겠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은 영훈이 눈물을 머금었다.
“어? 형 운다!”
“오빠 울어요?”
“형 운데요!”
“울보래요!”
“형 안 운다.”
“거짓말!”
“오빠도 거짓말쟁이야!”
자신을 빙빙 돌며 놀리는 아이들을 보고 영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장을 보고 꿀밤을 참은 영훈이 아이들을 데리고 옆방으로 향했다.
“너네 얼른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