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의 말에 주민이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받았다.
막 인터넷 기사를 출력해온 듯 종이가 따뜻했다.
[영화 ‘열혈선생 김봉두’ 사학재단 비리는 실제로 있었다?]
[○○고에서 일어난 영화보다 더한 현실.]
“제작사에게 들은 소식은 없어?”
“그쪽에서는 ○○고와는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영화 소재를 찾다가 감독이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생각한 소재라고 하더군요.”
“그럼 이게 우연히 겹친 거다?”
“네. 실제로 감독의 고등학교를 찾아봤지만 사립재단이 있는 학교는 아닙니다.”
“그래서 영화에 영향은?”
“일단 영화에서 나온 사학재단 비리가 현실에서도 터졌으니 덩달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재단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니 악영향은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너도나도 보러 가려고 한답니다.”
“반응 계속 체크하고 홍보팀과 연계해서 배우들에게는 피해 없게 잘 처리해.”
“네, 사장님.”
회사의 간판 배우 중 하나인 정승우의 영화에 닥친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단 악재가 없으니 화가 될 것은 없으나 재단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 정승우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다.
“상춘재단이었던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별거 아닌 쪽인 거 같고 혹시 모르니 동태를 살펴보라고 해야겠군.”
어찌 됐든 좋은 쪽으로 화제가 되고 있으니 호재였다.
문뜩 영화의 예상 관객 수를 떠올리다가 주민이 흠칫했다.
“350만 정도 예상했는데 거기서 더 오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연이가 말했다던 400만이란 숫자가 눈앞을 어른거렸다.
주민이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 * *
정승우가 출연한 영화 <열혈선생 김봉두>에 대한 관심이 심상치 않았다.
5월을 노리고 개봉한 영화는 300~350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뉴스에서 사학재단 비리 건이 터지면서 덩달아 영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덕분에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상영관을 늘렸고 한 달이 되어가자 관객 수가 395만에 이르렀다.
고무적인 반응에 제작사 측에서도 상영을 조금 더 늘리자는 반응이었다.
400만의 고지가 코앞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얘들아!”
“어? 정승우 선배님?”
지한이의 연기 수업에 들어온 승우가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의자에 앉아 지한이의 수업을 보고 있던 지연은 갑자기 쳐들어온 정승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 수업 중입니다만.”
갑작스러운 대배우의 등장에도 재휘가 엄하게 말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들어와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설사 상대가 대배우라고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기뻐서 그만.”
“…지금은 수업 중입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수업이 끝난 뒤에 오시죠.”
“기다리겠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번 수업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허리를 숙이는 승우를 보고 지연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연예계가 보이는 것과 달리 엄청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란 건 어렴풋이 듣고 알고 있었다.
정승우 정도 되는 스타에게서 유난스러운 구석이 없는 것이 드물어서 <오싹한 집> 촬영 때는 이미지 관리의 일환일 줄 알았다.
아직 그때는 지한이가 일반인에 더 가깝기도 했었고.
그런데 저렇게 연기 트레이닝을 하러 온 선생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다니.
이게 바로 정승우가 롱런하는 비결인 것 같았다.
“지연아.”
정승우가 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지연에게 바짝 붙어 작게 속삭였다.
지연이 그를 따라서 귓가에 손을 모으고 속삭였다.
“왜요?”
“고마워.”
“뭐가요?”
“네 덕분에 400만 넘었어.”
정승우가 정말 고맙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한 번 돌아와서 알고 있었던 것 뿐이다.
뉴스라면 어차피 터질 일이었고.
“저는 한 게 없어요.”
“아니야. 네가 말해 줘서 넘은 것 같애.”
“아닌데.”
“사실 네 말 덕분에 이번 촬영에서 진짜 열심히 했거든. 400만 무조건 넘어보자고.”
아무래도 내 말에 정승우가 자극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연기했고 그로 인해서 400만이 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도 잘 될 것 같으면 미리 얘기해 줘.”
“그런데요. 이게 우연일 수도 있잖아요.”
지연의 말에 승우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 지연이 너는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어.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거란 듯이.”
아차. 너무 티가 났었나?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도와줄래?”
“절 믿어요?”
“이쪽 업계는 이런 운이 중요한 업계거든. 혹시 알아? 네 말 듣고 찍었다가 또 대박 날지?”
그건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다.
내가 명절 특선 영화를 본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
“다음에도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배우님도 우리 지한이가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나중에 안 도와주시면 안 돼요.”
“그래.”
“도장 찍어주세요.”
“하하. 물론이지.”
손을 내밀어 손도장을 찍어주려는 승우을 보고 지연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으, 응?”
“여기다가 찍어주시면 되요.”
지연이 스케치북을 꺼내 각서라고 쓴 뒤, 내밀었다.
아직 내용도 없는 백지 각서였다.
승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35. 자네 그림을 배워보지 않겠나.
햇살이 따가운 8월.
남매는 다시 LA 땅을 밟았다.
“LA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에밀리가 일행들을 환영했다.
짐을 끌고 나온 남매와 영훈과 주민의 대리로 온 사람이 제시카를 격하게 반겼다.
“에밀리! 오랜만이야.”
“제시카! 이게 얼마만이야?”
두 사람이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다 큰 어른들이 저게 무슨 짓이람.
지연이 지한이의 손을 잡고 영훈의 뒤로 숨었다.
“지한이랑 지연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너희들 왜 그렇게 멀리 가 있니?”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어요.”
“그래? 그렇지만 경호원들이 있을 텐데.”
“그렇지만 우릴 지키는 게 아니잖아요.”
“이 아줌, 아니 이모를 지키는 거니까요.”
무심코 아줌마란 말을 입 밖으로 내려고 하던 지한이 제시카의 눈치를 봤다.
아니, 아줌마는 싫어하면서 이모는 왜 괜찮은 거야?
공 사장이 자신을 대신해서 어떤 아줌마랑 같이 갈 텐데 절대 아줌마라고 하지 말고 이모라고 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 여기서는 너희들 옆에 꼭 붙어 있을 거니까.”
“이번에는 애들 보호자로 온 거야?”
“우리 공주님이 하도 극성을 부리잖아.”
“풉. 제시카네 공주님이 도도하긴 하지.”
주민이 없는 자리라고 두 여자들이 하하호호 수다를 떨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 언제까지 말할 거야.
우리는 비행기 오래 타고 와서 쉬고 싶다고.
여긴 낮이라도 우리는 잘 시간이란 말이야.
“오빠, 우리 언제 가?”
“지연아. 오빠도 궁금해.”
힘없는 말단 직원인 영훈이 서글프게 대답했다.
차라리 공 사장님이랑 오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먼 곳에서 왔는데 호텔부터 가자. 애들은 쉬게 둬야지.”
“좋아. 어후 너무 오랜만에 비행기 타고 왔더니 어깨가 다 뻐근하네.”
“우리는 마사지 받으러 갈까?”
“그거 좋지.”
아무래도 사장님이 우릴 맡길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 * *
띵동-
햇빛이 따가운 천사들의 도시.
방학을 맞이한 헨리 교수는 LA에 있는 별장에 와 있었다.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지어진 곳에서 벽 한쪽이 통째로 유리로 되어 있는 작업실에서 교수는 캔버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똑똑.
작업실 노크소리가 들리고 헨리의 아내 엠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보, 바빠요?”
“아니야. 무슨 일야?”
“당신 손님이 왔어요.”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을 떠올린 헨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은 손님인가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냐 당신 얼굴이 환하게 폈으니까. 기뻐 보이네요.”
다른 이들이 보면 눈을 피할 것 같은 헨리의 얼굴을 보고 엠마가 그의 기쁜 감정을 읽었다.
“조금 기대되기도 해.”
“어머나, 세상에. 요즘 당신 일하면서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다행이에요. 좋은 친구였으면 좋겠어요.”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직 너무 어려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동료라고.”
“그랬지.”
아내의 말에 헨리가 잠시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 같이 먼 곳을 보는 눈을 했다.
뜻도 모를 현대미술을 하는 애들을 보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화가들을 보다가 모처럼 대화하고 싶은 이가 나타났다.
어쩐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는 마음에 헨리가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음을 빨리 옮겼다.
“엠마, 당신한테도 보여주고 싶어. 당신도 보면 좋아할 거야.”
“당신이 좋아하니 그렇겠죠.”
자신의 가장 오랜 지지자이자 그림을 두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인 아내의 말에 헨리가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을 디뎠다.
* * *
헨리 교수의 별장에 도착한 남매가 커다란 저택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누나 천장이 엄청 높아.”
“거실도 엄청 넓어.”
“저기 바다가 바로 보여.”
지한의 말에 지연이 쪼르르 창으로 다가갔다.
거실 한 면에 수평선이 드리웠다.
“멋지다.”
“이따가 바다 가자.”
“좋아! 나 수영할 거야.”
“그래 누나가 가르쳐줄게.”
수영이라고는 돌아오기 전에 동네 청소년회관에서 배운 게 다지만 그래도 초급반까지는 뗐다.
혹시나 몰라서 튜브도 가져왔으니 어떻게든 물에는 뜨겠지.
“얘들아. 앉아있어야지.”
“네에.”
영훈의 말에 아이들이 다시 쪼르르 영훈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한 테이블에 아이들을 앉혀 주고 영훈도 앉았다.
“그런데 어제 봤던 그 이, 모는 안 와요?”
“그분은 에밀리 씨랑 밤늦게까지 술 드신 모양이더라.”
“어제 우리 옆에 꼭 붙어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랬지.”
“거짓말쟁이.”
“혹시라도 그분 앞에서는 그러지 마라.”
그래도 사장님 친누난데 아이들이 말실수할까봐 영훈이 입단속을 시켰다.
“그런데 우리만 와도 되요?”
“되겠지? 교수님이 보고 싶다고 한 건 지연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교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괜찮을 거야. 오빠도 따로 알아봤는데 엄청 고지식하고 엄하고 무서우신 분인데 그래도 실력은 좋으신 분이래.
전시회도 꼬박꼬박 하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전시 기회도 여러 번 제공하신다더라. 좋은 분이신 거 같아. 교수님이 묻는 것만 잘 대답하면 될 거야.”
영훈의 말을 새겨들으며 지연이 헨리 교수에 대한 인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엄청 깐깐하신 분이란 거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복도 너머에서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던 부인과 헨리 교수로 추정되는 사람이 걸어왔다.
“흐익!”
옆에서 지한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나도 그럴 뻔.
뭔 사람이 저렇게 험악한 거야?
옆에 귀부인처럼 보이는 분과 함께 있으니까 21세기 미녀와 야수가 따로 없었다.
장비가 서양인으로 환생했으면 저 인상일 것 같았다.
“네가 지연이니?”
“네.”
눈앞에 바짝 다가온 장비에 지연이 목을 움츠리고 겨우 대답했다.
지한이는 누나가 잡아먹힐까봐 걱정이라도 된 듯 지연의 옷을 붙잡았다.
“네 그림 좀 보자.”
장비, 아니 헨리의 말에 영훈이 대신 챙겨온 스케치북을 꺼냈다.
“당신 거기 서 있지 말고 앉아서 봐요. 여러분들은 오렌지 쥬스 좋아하나요?”
“네.”
“좋아해요!”
“저, 죄송하지만, 커피 부탁드리겠습니다.”
“커피! 좋아요. 다들 조금만 기다리세요.”
온화한 인상의 엠마 부인의 말에 헨리의 얼굴을 보고 긴장했던 이들이 한숨을 돌렸다.
맞은편에 앉아 지연의 스케치북을 들고 뚫어져라 보는 헨리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세 사람이 작게 속삭였다.
“무서웠어.”
“오빠, 얼굴이 무섭다고 해줬어야죠.”
“나도 얼굴이 무서운 건 줄 몰랐어.”
영훈이 정보 수집에 실수가 있었던 사실을 사과했다.
“여러분. 모두 쿠키 좋아하나요?”
엠마가 음료와 함께 직접 만든 쿠키를 들고 나왔다.
쿠키의 달달한 냄새와 노오란 오렌지 주스에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친절하게 빨대까지 꽂아준 엠마 덕분에 아이들이 잔을 잡고 편하게 주스를 마셨다.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