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이 비밀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모르는지 태산이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사지 멀쩡하고 얼굴도 멀끔하게 생긴 놈이 뭐가 부족해서 여자가 없어.”
“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올해 안에 결혼할 사람 데려와라.”
“아버지!”
“시끄러, 이놈아!”
두 사람이 투닥거리며 아침 식사가 끝났다.
태산이 먼저 자리를 뜨자 식탁에 남은 형제들이 주민을 타박했다.
“너는 그냥 한 번 나간다고 하면 되지 왜 고집을 그렇게 부리냐.”
“싫은 건 싫은 거야.”
“우리 막내 누굴 닮아서 그리 고집이 센 건지.”
“형은 보면 몰라? 아버지랑 똑같잖아.”
“하여간 고집쟁이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다니까.”
“아아. 진짜. 그냥 혼자 살고 싶다.”
“넌 절대로 혼자 못 살 거다.”
“맞아. 누가 챙겨주는 사람 없으면 저놈은 아무것도 못할걸?”
“형!!”
짖궂게 말하는 형들을 보고 주민이 소리쳤다.
나도 이제 다 컸고 멀쩡하게 회사도 잘 운영하고 있는데 아버지도 그렇고 형제들도 그렇고 아직까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
“그럼 도련님 이따가 회사로 찾아갈게요.”
“뭐야. 당신이랑 막내랑 무슨 일이야?”
“도련님이 작은 부탁을 해서요.”
“주민이 네가?”
첫째 며느리 진희의 말에 형제들이 주민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일 때문에.”
“수상한데.”
“진짜 일 때문이야.”
형제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피해 주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출근하든가 해야지.
하여튼 이 집 사람들은 날 가만히 놔두질 않아.
34. 내 말을 믿어
탑엔터 맨 위층, 주민의 사장실.
밤사이 있었던 주요 사항들을 체크한 주민이 소속 연예인들의 차기작을 점검했다.
“우진한 PD라면 연출은 좋은데 성격이 개같은 놈이잖아. 여배우들 희롱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흠, 들어가는 애가 시우여서 넣은 건가? 현장에서 잘 지켜보라고 해야겠군.
승우는 이제 곧 개봉인가? 스승의 날에 맞춰서 개봉한다고 했었지.”
승우가 찍은 영화가 개봉할 때가 되자 주민의 머리 한편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연이가 400만이 넘을 거라고 했다지?’
그때는 아이가 하는 말이라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그 아이의 모든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일찍 철든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어른스러운 눈빛을 볼 때는 평범한 아이 같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건 맞지.”
무려 연기천재라고 회사 내에서 소문이 자자한 지한이 자신보다 더 연기를 잘 한다고 한데다가 배운지 일주일 만에 미술 관계자의 주목을 받을 만한 그림을 그린 아이이다.
흔히들 그런 재능을 가진 아이를 천재라고 하지.
“과연 지연이는 어떤 천재가 될까.”
어릴 때 신동, 천재라고 불리는 아이는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드물지도 않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보여주는 재능이 커서도 여전히 빛날 것인가.
주민은 지연과 지한, 이 남매가 가진 재능은 1%가 가진 진짜 재능이라는 감이 있었다.
예전에 자신이 이 업계에 뛰어들게 만든 첫 배우처럼.
“얼른 아이들이 자랐으면 좋겠군.”
남의 집 아이들은 빨리 큰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언제 크려나.
삐이-
비서실에서 전화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HJ미술관 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 그리고 내가 말한 거랑 같이 차를 내 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손님을 모시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이 열리고 비서의 안내를 받은 손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형수님.”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침 먹은 지 3시간도 안 지났어요.”
“그래도 제 회사에 온 건 처음 아닙니까.”
“그렇죠?”
주민의 환대에 진희가 우아하게 웃고 자리에 앉았다.
형수가 앉는 것을 본 주민도 자리에 앉자 곧바로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 이건 제가 형수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어머. 저는 빈손으로 왔는데 이거 어떡하죠?”
“괜찮습니다.”
말이 빈손이지 그녀의 비서가 알아서 선물을 챙겼을 것이다.
진희가 장미 꽃다발을 받아들고 향을 맡았다.
“역시 형수님께는 장미꽃이 잘 어울리네요.”
“우리 남편도 안 해주는 말을 도련님이 해주시네요.”
“말은 안 해도 형이 형수님을 많이 좋아합니다. 아시잖습니까, 형이 형수님이랑 결혼하려고 그렇게 청혼하고 쫓아다녔다는 걸요.”
“알죠. 아직도 가끔 그런 귀여운 행동을 하곤 한답니다.”
“지금도요? 정말 형도 징하군요.”
아버지랑 꼭 닮은 큰형이 형수에게 귀여운 행동을 하는 상상을 하자 주민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는 좋아요. 그런데 도련님 언제까지 그렇게 불편하게 말하실 거예요?”
“회사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게 좋습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거죠? 저도 알아요.”
회사라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막내다운 모습을 숨긴 주민을 보며 진희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어떤 그림을 보면 되죠?”
“아, 잠시만요.”
주민이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어 서류 봉투에 한 장씩 보관한 지연의 그림을 가져와 테이블 위로 한 장씩 올렸다.
“어머나.”
지연의 그림을 본 진희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습니까?”
“잠시만요.”
진희가 주민의 말을 막았다.
진지한 눈으로 지연의 그림을 감상하는 진희가 중간중간 감탄을 흘렸다.
비서가 내온 차가 식어갈 때쯤 진희가 감상을 끝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단하네요.”
“형수님이 보기에도 그렇죠?”
“네. 사실 그림에 담긴 구상은 저희 미술관 소속 작가님들이랑 비슷한 수준. 기술은 중고등학생 수준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그럼 전시회를 열 정도는 아닌가요.”
“아니요.”
진희의 단호한 말에 주민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형수의 말에 의하면 지연의 그림은 밸런스가 좋지 않았다.
한쪽이 현직 생업 작가 수준이면 한쪽은 중고등학생 수준에 그쳤다.
배운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형수의 부정하는 말에 의문이 생겼다.
“그럼 형수님은 이 그림은 전시해도 좋을 그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마추어 작가로 개인 전시를 열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겨우 수채화 그림인데요? 형수님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기술이 중고등학생 수준이라고.”
“하지만 구상이 좋죠. 왜 구상이 좋다고 한 줄 아세요?”
“흠.”
진희의 말에 주민이 그림을 깊게 들여다봤다.
재벌가의 자식인 이상 교양으로 미술과 음악적 소양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는 형수가 말하는 대로 그림의 구도를 살폈다.
어떤 것은 단순했고 어떤 것은 기발했다.
그런데 왜 모두 좋다고 느껴질까.
“아.”
“아시겠어요?”
“네. 그림이 전달하려는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썼군요.”
“맞아요! 알고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작가가 이 장면을 그릴 때 느꼈던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죠.
이 그림은 사실과 추상이 잘 어우러져 있어요. 단풍에 물든 수면이라든지 눈에 물든 숲이라든지. 이 모든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죠.”
“그렇군요.”
“누구라도 이 그림을 본다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주민이 진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라면 보러 오기 충분했다.
“화가는 그림으로 대화하는 사람이니까. 사람들이 알아준다면 충분히 전시할 이유가 있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했습니다. 그럼 지연이에게 부족한 부분만 채워주면 되겠군요.”
“맞아요! 아직 그림을 그린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다고 했죠? 제가 좋은 교수님을 알아볼게요.”
“감사합니다, 형수님.”
미술관 관장인 그녀라면 충분히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지연을 과외시켜 줄 선생을 찾아 줄 것이다.
“저기, 형수님.”
“네.”
“그림은 놓고 가시죠.”
“어머나.”
들고 있던 그림을 그대로 봉투에 넣어 챙기려던 진희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주민과 진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꽃보다 이 선물이 더 좋네요.”
“안 됩니다. 아이의 그림입니다. 제가 함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쳇.”
진희가 주기 싫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천천히 내밀었다.
독수리가 먹잇감을 낚아채듯이 주민이 봉투를 가져갔다.
가족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이었다.
* * *
“흠.”
검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는 턱수염의 중년이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그림을 보고 깊게 신음했다.
동상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남성은 간간이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었다.
“…님.”
쾅쾅!
“교수님!”
“…뭔가.”
모처럼 그림 감상을 망치는 조교를 보고 남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곧 수업입니다. 헨리 교수님.”
헨리 마커스.
시카고 예술대학의 회화과 교수인 헨리는 아이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몇 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열 만큼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였다.
“교수님. 그런데 뭘 보고 계십니까?”
“스튜디오에서 보내온 그림을 보고 있었지.”
“아. 영화 자문을 해 주기로 한 그 건인가요?”
“맞아.”
“교수님한테 그림을 부탁한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웬 그림이래요?”
“내 그림을 대체할 만한 그림이거든.”
“교수님을 대체할 만한 분이라구요? 혹시 미셸 교수님일까요?”
“아니야. 8살짜리 아이가 그린 그림이야.”
“네!?”
조교가 놀랍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교수실에 울리는 조교의 목소리에 헨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자신의 추태를 떠올린 조교가 입을 가리고 헨리의 책상 근처로 슬금슬금 향했다.
그리고 그림을 보았다.
“아….”
그림을 보자마자 조교가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마침 교수가 보고 있는 그림은 행복으로 물든 벚꽃나무 그림이었다.
뭉클한 감정을 느낀 그가 말없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 헨리가 결심했다.
“한번 보자고 해야겠군.”
“네? 교수님이 직접요?”
“이 정도 그림을 그리는 아이라면 충분히 볼 만하지. 요새 그림을 그린다는 것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 표현도 못 하는 쓰레기들뿐이야.”
“그래도 교수님 말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닌가요?”
자신이 다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맥, 너도 요즘 그림 그리는 것이 별로야.”
“하하하. 교수님 따라다니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요.”
“슬럼프가 왔다면 가끔은 다른 걸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네.”
항상 날카로운 말을 하지만 섬세한 배려가 깔려 있는 헨리의 말에 맥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 보러 갈 때 너도 데려갈 테니 따라와.”
“에엑?! 저도요?”
“그래. 이 아이를 본다면 네 슬럼프도 사라질지 모르지.”
“그런 좋네요. 언제 보러 가실 건데요?”
“지금.”
“예!? 잠시만요! 교수님 안 돼요! 수업이 있다구요!”
날뛰던 헨리의 허리를 부여잡고 맥이 탈주하려는 교수를 겨우 붙들었다.
그를 강의실에 던져두고 맥이 M&M 스튜디오에 연락해 일정을 문의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 *
“교수 쪽에서 지연이를 보자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역시 지연이는 대단해.
“역시라니. 누가 보면 네가 키운 줄 알겠군.”
-앞으로 키우면 되지!
“누구 마음대로 키운다고 하는 거냐. 지연이는 내 쪽에서 케어할 거야.”
-에이. 지연이를 그 좁아빠진 땅에서 키우려고? 지한이도 그렇고 지연이도 그렇고. 그 남매는 한국에 머물 아이들이 아니야.
에밀리의 말에 주민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건 아이들이 선택할 문제야. 그리고 에밀리 너보다 내가 더 아이들을 잘 케어할 수 있어.”
-에이 허세 부리는 거야?
“아니, 내 안목을 믿는 거다.”
단호한 주민의 말에 에밀리가 두 손을 들었다.
-Okay. 알았어. 나도 주민이랑 싸우는 건 싫다고 제시카가 미국까지 달려올 거야.
“누나는 무섭고 나는 안 무서운가 보지?”
-그럼. 주민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잖아!
뚝-
주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띠리리리리-
“여보세요.”
-주미이이인. 전화 끊지 마아아.
“용건만 빨리 말해. 바빠.”
-아이들을 이번 방학 때 초대하고 싶어.
“방학이라면 가능하긴 하지. 지한이한테 할리우드 촬영 현장도 미리 견학시키고 싶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럼 승낙하는 걸로 안다?
“그래.”
주민이 또 전화라도 끊을까 봐 용건만 간단하게 말한 에밀리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본부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정승우 배우 건으로 특이 사항이 있어서 직접 보고하러 왔습니다.”
“특이 사항?”
“영화 소재가 됐던 사학재단 비리가 실제로 터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