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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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파도 소리.”

“이번 여름에 바다 갈까?”

“바다? 정말?”

“응. 우리 동해 쪽으로 놀러 간 적은 없잖아.”

“히히힛. 좋아! 영훈이 형도 같이 가자고 하자.”

“그래.”

지금이 5월이니까 우리 방학하고 바로 가자고 하면 좋겠다.

휴가철이라도 덜 막히지 않을까?

“끝!”

“이제 스케치북 다 그린 거야?”

“응. 힘들었다.”

마지막 장은 물감이 잘 마르도록 바닥에 두고, 물감이 다 마른 나머지 그림들을 지연이 주워 모았다.

벚꽃이 가득 핀 가지.

푸른 녹음이 우거진 숲.

노랗게 익은 황금빛 논밭.

단풍이 물든 수면 위.

눈이 내린 산등성이.

파아란 파도가 치는 바다.

은하수가 반짝이는 밤하늘.

자연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담은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했다.

감정이 번진 것 같은 그림을 볼 때마다 지한은 누나가 멋지다며 감탄했다.

“얘들아. 나 왔다!”

영훈이 퇴근하는 아빠처럼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이제는 우리가 있는 숙소에서 출퇴근하는 영훈이 오자마자 양말을 벗었다.

“오빠. 옷은 빨래 통에 넣어요.”

“알았다.”

“화장실에 가서 바로 씻구요.”

“어어.”

“밥은 먹었어요?”

“…지연아. 네가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한 것 같다.”

“그래서 밥은요?”

“안 먹었다.”

“씻고 나와요.”

뒤를 따라다니면서 하는 잔소리에 영훈이 기가 쭉 빨린 얼굴을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다른 배우 지원 갔다가 아이들 덕분에 밤이 되기 전에 귀가했다.

다른 동기들이 구르고 다니는 거에 비하면 훨씬 편한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영훈이 씻고 나오는 동안 도우미 아주머니가 만들어 놓은 국과 반찬을 꺼내 식탁에 올렸다.

“누나 내가 뭐 할 건 없어?”

“숟가락이랑 젓가락 놔줘.”

“응!”

“그거 다 하면 영훈 오빠 옷 화장실 앞에 놔둬 줄래?”

“알았어!”

지연의 지시를 받은 지한이 콧노래를 부르며 식탁에 수저를 놓고 작은 방에 가서 영훈의 옷가지를 가지고 나왔다.

아이들이 차근차근 준비하는 동안 영훈이 샤워하고 나왔다.

“얘들아. 정말 고맙다. 너희들이랑 같이 안 살았으면 어쩔 뻔했냐.”

“오빠 엄마가 해주지 않았을까?”

“음. 집이 좋긴 하지만 역시 나와 사는 것도 좋지.”

집이 고향 같은 느낌이라면 아이들이 있는 곳은 자유로운 아지트에 온 느낌이랄까.

둘은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는 영훈을 두고 아이들은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빠.”

“응.”

“나 그림 다 그렸어.”

“어… 어?”

스케치북 하나를 다?

밥 먹다가 일감이 생긴 영훈이 숟가락을 놓쳤다.

퐁당!

떨어진 숟가락이 국그릇에 빠졌다.

잠시 한숨을 쉰 영훈이 허기와 업무 보고 사이에 저울질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

“네.”

“형, 빨리 와.”

영훈이 떠난 식탁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 * *

“그래. 지연이가 그림을 다 그렸다고?”

“네. 내일 회사로 그림을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며칠 안 지났는데 대단하군.”

“미술관 관계자들에게도 연락을 할까요?”

비서의 말에 주민이 잠시 턱을 쥐고 생각하더니 이내 무언가 결정한 듯이 말했다.

“아니. 그건 조금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주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한이가 영화에 들어가고 배역을 연구하기 위해서 시작한 그림으로 인해 누나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라.

만약 지한이가 연기하는 배역의 그림을 지연이 직접 그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 홍보에 무척 좋은 소재이지 않을까?

“에밀리에게 말해봐야겠군.”

“촬영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사진과 동영상 모두 찍어서 에밀리에게 보내보도록 하지.”

다음 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물감이 다 마른 마지막 작품을 포함하여 총 10작품을 소중히 품에 안고 영훈이 출근했다.

사장의 부름에 곧바로 회의실에 간 영훈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사장님과 그의 비서, 본부장을 보고 가슴이 무릎에 맞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아침부터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부지런하게 일하도록 이 업계는 성실함과 체력이 다야.”

“네!!”

인사치레를 한 공 사장이 손짓했다.

영훈이 테이블 위에 지연의 그림을 한 장씩 잘 보이도록 펼쳤다.

“이게 이제 그림을 시작한지 고작 일주일 된 아이의 그림이란 말입니까?”

그동안 보고만 받고 지연의 그림을 처음 본 본부장이 놀라며 말했다.

그림을 감상하는데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주민이 고개만 끄덕이고 새로 추가된 그림에 집중했다.

노오란 논밭에서 수확의 기쁨이 느껴졌다.

고즈넉한 풍경에 윤곽만 얼핏 보이는 농부의 모습에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에서는 왠지 눈물이 나왔다.

별을 올려다보는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에게서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킁.”

옆을 돌아보니 코를 훌쩍이는 본부장이 보였다.

아이의 그림에서 이런저런 감정과 추억이 떠올라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네 우나?”

“아닙니다.”

본부장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봐도 울컥한 모습이었다.

“남 비서. 촬영하지.”

“네, 사장님.”

미리 준비하고 있던 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로 그림을 찍었다.

“그런데 사장님. 사진으로 본다고 알 수 있을까요?”

“직접 보는 것보단 못해도 훨씬 낫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곧 파일을 미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지난번에 시나리오가 왔던 메일로 보내면 될 거야. 내가 미리 연락하지.”

“네. 그럼 저희도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겠군요.”

“힘내게.”

* * *

늦은 밤.

주민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헬로우, 미스터 프린ㅅ,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주민이 험악한 얼굴로 지금 표정이 보이지 않을 상대방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에밀리가 한 걸음 물러났다.

-오케이. 알았어.

“내가 메일 하나 보낼 텐데 한 번 확인해 봐.”

-무슨 메일?

“보면 알아. 아, 영화에서 리온이 그림은 누가 그리기로 했지?”

-아직 정해진 건 없고, 헨리 교수님한테 부탁해 보려고.

“그래. 그러면 메일보고 연락 줘.”

-알았어.

용건을 끝낸 주민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누나의 친구라지만 이 녀석과 오래 통화하면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사장님. 이제 퇴근하시죠.”

“아, 그래.”

에밀리와 통화를 위해서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있던 주민이 비서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이 올 때까지 일단은 기다려야겠어.

퇴근하고 침대에 누운 주민은 금방 잠에 빠졌다.

늦은 새벽.

밤하늘에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을 시기.

자고 있던 주민은 자신을 깨우는 벨소리에 짜증이 난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띠리리리리리.

“하아.”

이 시간에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하는 거야.

휴대 전화 옆에 있던 탁상시계를 힐끔 본 주민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여보세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주민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ㅅ,”

-주미이이이이이인!!!!!

아닌 밤중에 고막 테러를 당한 주민이 귀에서 휴대폰을 멀리 떨어트렸다.

잠시 먹먹한 귀에 정신을 차리고 있을 동안 전화기 너머로 에밀리의 높은 목소리가 계속됐다.

“시끄러. 좀 조용히 해. 지금 여기가 몇 시인 줄 알고 전화한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에밀리 조용.”

흡사 반려동물에게 말하듯이 에밀리에게 지시를 내린 주민이 전화기 건너편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혼자 열심히 떠들던 에밀리는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제야 조용히 주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여긴 새벽이니까 용건만 짧게 말해.”

-그림 봤어! 데이빗 감독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딱 이런 그림이래!

“그래. 나도 시나리오 봐서 알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보낸 거야.”

-이거 누가 그린 거야? 누구야? 고용할 수 없어?

호들갑을 떠는 에밀리를 보고 주민이 입에 웃음을 걸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애초에 지한의 연기를 위해서 그림을 시작했다.

물론 계기가 그렇더라도 지연이 받은 영감이 다른 것일 순 있었지만.

시작이 리온이 그린 그림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영향이 없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에밀리 네 생각은 어때?”

-아직 미숙하기는 한데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좋아. 조금 더 다듬으면 될 것 같은데 이 정도 실력자라면 영화에 맞춰서 작품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아직 누군지도 모르고 실력자라고 하는 에밀리의 목소리를 듣고 주민이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거 지연이가 그린 거야.”

-What? 누구?

“지한이 누나. 그때 오디션 볼 때 같이 온 여자아이 있었잖아.”

-아! 그 여자애. 세상에 그 애가 그렸단 말이야? 어쩐지 수채화더라. 나는 일부러 그런 줄 알았어.

“조금 더 배워야 하겠지만 지금 성장 속도를 봐서는 영화 촬영 때까지 유화 작품도 거뜬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았어.”

-성장 속도라니? 어릴 때부터 계속 그렸던 거 아니야?

“아니야. 지한이랑 같이 시작했어. 일주일 조금 넘은 것 같은데.

-Amazing!

에밀리의 감탄사를 들으면서 주민이 슬슬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어찌 됐건 네 생각은 어때?”

-일단 지연이한테 무작정 맡길 수는 없어. 우리 쪽에서도 보험이 필요해.

일단 헨리 교수님과 대화를 해 본 다음에 다시 연락해 줄게.

정 안 되면 리온의 초반 작품만 맡기는 쪽으로 생각해 보지 뭐.

“그래, 정해지면 말해. 그동안 지연은 이쪽에서 담당하고 있을게.”

-오케이. 알았어. 그럼 다음에 다시 전화할게.

에밀리가 쪽 하는 소리를 내고 통화를 종료했다.

마지막까지 기분 나쁘게 하는군.

이미 잠이 다 깨버린 주민이 침대 위에 휴대전화를 던졌다.

“형수에게 말해봐야 하나.”

미술관을 관리하고 있는 첫째 형수를 떠올리며 주민이 베게에 머리를 떨어트렸다.

* * *

“어머나. 도련님. 오늘따라 안색이 안 좋네요.”

“잠을 설쳐서요.”

아침 식사 자리에 앉은 주민을 보고 그의 첫째 형수, 유진희가 물었다.

“아, 형수님 할 얘기가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혹시 아이에게 미술을 가르칠 사람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는 작가님들은 많죠. 혹시 미술 과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제가 재능이 있는 아이를 발견해서요. 그런데 그림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기술적인 면이 부족해서 그 부분을 도움 받으려고 합니다.”

“어머, 도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그 아이에게 관심이 가네요. 혹시 아이가 그린 그림 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회사로 한번 오시죠.”

“좋아요.”

순식간에 약속을 잡은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아침 식사를 위한 자리에 하나둘씩 자리에 모여들고, 마침내 이 집의 주인인 공태산이 자리에 앉았다.

“다들 들자.”

태산의 말에 한 집에 다 같이 사는 삼형제와 며느리들이 수저를 들었다.

“현이는 오늘 현장 내려가냐?”

“네, 아버지. 공장이랑 연구소 좀 돌아보려고요.”

“그래. 아랫사람들에게 맡겨도 되지만 어찌됐든 네 회사다. 상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직접 보는 것도 좋지.”

“욱이는?”

“내일이 출장이라서 미리 회사 업무 처리할 생각입니다.”

“출장이니 너무 늦게까지 회사에 있지 말고.”

“알겠습니다.”

“민이는.”

자신에게 돌아온 차례에 주민이 침울 꼴깍 삼켰다.

“언제 결혼할 거냐.”

“아직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쯧, 하루 종일 회사에 붙어있는데 어느 세월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너도 낼모레면 35살이다.”

“아버지 요즘 세상에 결혼을 일찍 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네 형들은 20대 때 결혼해서 벌써 애들이 다 컸다.”

“형들은 그룹 때문에 그랬고요.”

오늘도 언제 결혼하냐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주민이 지친 얼굴을 했다.

새벽에 깨서 잠도 얼마 못 잤는데 아침부터 밥상에서 이런 잔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날 시간이 없으면 내가 자리를 만들어주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느 세월에!”

태산의 호통에 주민의 형들이 입을 벙긋했다.

‘그냥 한 번 본다고 해.’

‘가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되잖아.’

‘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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