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가자.”
아이들이 조각상 앞으로 가 앉았다.
“너희들 뭐 그릴 거야?”
“음. 아직 잘 모르겠는데. 지한이 너는 뭐 그리고 싶은데?”
“나? 나는 호랑이 그리고 싶어!”
“호랑이라.”
아직 호랑이를 그려본 적은 없는데.
어디 참고할 자료 없나?
영훈 오빠 보고 사진 좀 찾아달라고 하면 도와주려나?
“호랑이는 아직 그려본 적이 없는데.”
“누나도 호랑이 그리게?”
“응? 왜?”
“누나는 다른 거 그려!”
“누나가 다른 거 그렸으면 좋겠어?”
“응! 누나가 그리고 싶은 거 그려. 그리고 싶은 거 있지?”
그 말에 지연의 머리로 일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누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 것처럼 지한이 씨익 웃었다.
“있을 줄 알았어.”
“하여튼. 이번에는 각자 그리고 싶은 거 그리자는 거지?”
“응!”
“좋아. 그럼 누가누가 잘 그렸는지 내기해 볼까?”
“내가 이길 거야!”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연필로 윤곽을 잡아가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영훈이 감탄했다.
‘와 금방 그리네.’
대략 보기만 해도 뭘 그리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지한이는 호랑이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큼직한 코를 그리며 얼굴을 도화지 가득 그렸다.
영훈이 이번에는 지연이의 도화지를 보았다.
‘이쪽도 장난 아니네.’
도화지에는 서로의 이마를 대고 웃고 있는 남매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스케치였다.
몰두하느라 미간에 주름이 진 아이들을 보고 영훈이 조용히 두 아이를 지켜봤다.
* * *
“선생님, 선생님!”
행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가정의 달 행사로 바쁜 5월을 보내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이 달려오는 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방금 야외조각장에서 1일 어린이 미술 강좌가 끝났는데요.”
“그래서요.”
“거기를 담당하는 조 교수님이 지금 그림 하나 봐 달라고 하시는데요.”
“조 교수가?”
호들갑 떠는 직원의 반응과 그의 입에서 나온 조 교수의 말에 기획실장이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갔다.
애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뭘 봐 달라고 하는 건지.
그러나 실장의 생각은 바로 달라졌다.
“이게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 그린 그림이라구요?”
“네. 저기 야외 조각장에 마련된 행사장에서 그리는 걸 봤습니다.”
미술관 관계자들이 지연의 그림을 둘러싸고 다들 감탄했다.
고작 크레파스로 이 정도의 그림을 그리다니.
“이 그림을 보니 알겠네요. 누나가 동생을 정말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서로를 보는 시선이 엄청 따뜻해요.”
“다른 분들은 이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등학교 3학년이 이 정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중에는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기대가 되는 아입니다.”
“우선 아이의 다른 그림을 보고 싶군요.”
“혹시 그려놓은 게 없을까요?”
“물어봅시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그린 아이에게 향했다.
지연은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귀찮아졌다.
“얘야. 네가 정말 이 그림을 그렸니?”
“네.”
누가 봐도 그림에 나온 소녀이기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림 그린 지 얼마나 됐어?”
“3일?”
“3일?!”
지연의 대답에 둘러싸고 있던 어른들이 깜짝 놀랐다.
나도 놀랐다, 이 양반들아.
“혹시 다른 그림도 볼 수 있을까?”
“지금은 없는데. 그리고 몇 개 못 그렸어요.”
“집이 어디야? 아저씨가 찾아갈게.”
“안 알려줄래요.”
다짜고짜 집에 찾아오겠다는 말에 지연이 거부했다.
세기의 미술 천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해진 어른들이 지연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럼 그림만 보게 해주겠니?”
“진짜 몇 개 없어요.”
“나중에 그려서 보여줘도 괜찮단다.”
“언제요?”
지연의 말에 관계자들이 다급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일 보여 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양심도 없지!’
‘일주일 뒤는 어떻습니까?’
‘교수님은 일주일 만에 그림 한 점 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미쳤나!’
우왕좌왕하는 어른들을 보고 지연이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 극적인 합의를 이룬 미술관 관계자의 입에서 기간이 나왔다.
“스케치북 하나 다 그리면 보여주겠니?”
스케치북 하나가 대략 10장 정도 되나?
그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
“거의 다 그렸으니까 괜찮긴 한데. 왜 제 그림이 보고 싶은데요?”
“그게 네가 미술계를 이끌 신ㄷ,”
“애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네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다른 그림도 보고 싶어졌어.”
“제가 잘 그려요?”
“그래. 그래서 앞으로도 네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우리가 조금 도와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제가 나중에 못 그릴 수도 있잖아요.”
붉은 자국이 있는 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지만 지연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지금 네 그림이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란다.”
“맞아. 지금으로도 충분히 멋진 그림이야.”
어른들의 말에 지연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렇게 말하는 거지?
조금 수상했지만 그들의 말대로 나중에 실력이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니.
뭐, 조금 보여줘도 괜찮을까?
“알았어요. 다 그리면 연락할게요.”
“그래. 고맙다. 전화번호가 뭐니?”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먼저 전화드릴게요.”
“그래? 그럼 여기 내 명함이.”
“아니야. 이쪽으로 연락주렴.”
“내가 그림그리는 걸 도와줄게. 나한테 먼저 연락주겠니?”
미술관 관계자들과 오늘 강의를 나온 교수가 대립했다.
서로 경쟁적으로 내민 명함을 전부 받아든 지연이 영훈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른들이 둘러싸기 전에 얼른 탈출해야겠다.
지연이 빠르게 움직여 영훈과 지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 * *
“정말 뜻밖이군. 그 남매는”
지연에 대한 보고를 받은 주민이 실없이 웃었다.
동생은 연기 천재에 누나는 미술 천재인가.
그따위 쓰레기 같은 부모 아래에서 어찌 이런 세기의 천재들이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지?”
“일단 관계자들은 지연이의 다른 그림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지연이가 그림 그린 건 얼마 되지 않았잖나.”
“네. 그래서 그 부분을 고려해서 스케치북 하나를 다 그리면 한번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한번 직접 봐야겠군.”
“그러면 고 매니저를 통해서 사장실에 한번 데려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지.”
제 발걸음을 옮기려는 사장의 말에 비서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내 유능한 비서의 모습으로 돌아와 사장의 일정을 조정했다.
“내일 8시쯤 시간이 빕니다.”
“그래. 고 매니저한테 내가 간다고 하고.”
“알겠습니다.”
추가된 일정을 비서가 다이어리에 메모했다.
다음 날 8시.
아이들의 숙소에 방문한 주민이 눈을 크게 떴다.
거실 바닥에 종이가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물감을 말리는 것으로 보이는 종이 위에는 분홍색 벚꽃이 피어있기도 했고, 파아란 파도가 치는 바다가 너울 치고 있기도 했다.
겨울이 온 듯 눈이 내리는 숲속도 있었고,
단풍에 물들어 붉음이 번진 수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볼에 물감이 묻은 지연이 주민을 반겼다.
“사장 아저씨 안녕하세요.”
소파에 앉아 누나의 그림을 구경하고 있던 지한이 주민을 돌아보고 인사했다.
그림이 주는 여운에 잠겨있던 주민이 아이들의 인사에 정신을 차렸다.
“이거 다 지연이가 그린 그림이니?”
“아니요. 지한이 것도 있어요.”
“이거랑 이거, 저거는 내가 그렸어요!”
동글동글한 동물들과 지연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주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눠보니 아이들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지연은 주로 풍경화, 지한은 동물과 사람들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둘 모두 점점 그림에 숙달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희들 모두 잘 그리네.”
“정말요?”
“그래, 아저씨가 봐도 잘 그렸어.”
교양으로 어릴 때부터 작품을 보는 눈을 길러온 주민이 봤을 때 아이들의 실력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림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보자마자 감정이 움직였던 그림은 마네가 처음이었는데.
“아저씨가 잠시 그림을 봐도 될까?”
“뭐, 네. 괜찮아요.”
지연의 승낙에 주민이 가만히 서서 그림을 바라봤다.
혹시나 자신의 몸에 가려 그림자가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하나씩 찬찬히 감상했다.
“지연이 너는 그림 그리는 게 좋니?”
감상이 끝난 주민이 지연에게 물었다.
비서가 들고 온 케이크를 먹고 있던 지연이 입에 가득한 케이크를 씹어 넘기고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연기는?”
“연기도 잘 몰라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이의 눈을 주민이 유심히 바라봤다.
전해 듣기로는 연기 실력도 나쁘지 않다고 하던데.
둘 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시 돌봐야 하는 동생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부모가 제 일을 뒤로 미루듯이 지연의 경우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른 나이에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됐으니 그럴 수도.
머릿속으로 지연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할지 저울질하던 주민이 입을 뗐다.
“그래. 지금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그리고 싶을 때 그려도 되고, 연기하고 싶을 때 연기해도 돼.”
“감사합니다.”
“다만 진지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될 땐 나에게 말해주렴.”
“왜요?”
“아저씨가 도와주려고.”
주민의 말을 들은 지연이 그를 올려다봤다.
“왜 저를 도와주려고 하시는데요?”
“그게 아저씨에게 이득이 되니까.”
고개를 끄덕인 지연이 대답했다.
기브 앤 테이크라면 인정.
“좋아요.”
“그래. 그럼 아저씨는 이만 가볼게.”
“잠시만요.”
“?”
“많이 도와주셨으니까 저도 뭐 알려드릴게요.”
“그게 뭐니?”
“혹시라도 나중에 큰일이 생겨서 지한이 촬영이 미뤄져도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9월에는 미국 가지 않는 게 좋아요.”
나중에 영훈 오빠를 통해서 넌지시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직접 본 김에 말하는 게 좋겠지.
아리송한 지연의 말에 주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이가 고맙다고 하는 말이니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겠군.
“그래, 고맙다.”
“절대. 절대로 9월에 비행기 타면 안 돼요.”
“알았다.”
사업하는 이에게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아이의 말이었지만 주민의 머릿속에 지연의 말이 한쪽에 자리 잡았다.
지연이 멀어지는 주민의 등을 보았다.
‘어쨌든 나는 경고했어.’
공 사장은 아직 어린 지한의 가능성만 보고 전속 계약을 맺은 사람이었다.
<오싹한 밤> 추가 촬영 후 호텔에 있었을 때, 준호 오빠의 말로는 사장님이 직접 찾아와 계약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과 가출로 인해 오갈 데 없어진 우리를 데려와 숙소에서 머물게 해 준 것도 사장이었다.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하는 줄은 안다.
‘탑엔터만큼 소속 연예인한테 잘 대해주는 곳은 없다고 들었어.’
회사에 오가면서 직원들도 소속 아티스트들도 모두 우리에게 잘 해 줬다.
앞으로도 탑엔터가 건재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아직 망하면 안 돼요, 공 사장님.’
33. 주민의 계획
“우와.”
지한이 그림을 그리는 지연의 옆으로 다가와 감탄했다.
입을 떡 벌리는 동생의 모습이 귀여웠다.
“누나, 어떻게 이렇게 그려?”
“그냥 그리고 싶은 거 그리다 보니까.”
“이 그림 보니까 놀러 가고 싶다.”
새파란 바다를 본 지한이 엎드려서 발을 뒤로 까딱였다.
파도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림에 지한이가 팔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누나 그림에서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