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33/296)

* * *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도저히 믿을 수 없군요.”

LA에서 오디션을 보고 돌아온 주민은 팀장급 회의를 열었다.

짧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팀장들과 실장들이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진짜로 배역을 따오다니!’

무려 할리우드가 아닌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동양계 배우는 손에 꼽을 수 있었다.

한국계 배우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 그곳에 지한이 첫 깃발을 꽂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럴 게 아니라 기자들에게 보도 자료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오디션을 통과했으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할리우드에서 발표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먼저 설레발을 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그쪽에서 기사를 보내면 저희 쪽에서도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배우실 팀장들이 앞다투어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들의 의견을 듣던 주민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건 제작사와 현지 에이전시와 협의해 보기로 하지. 이제 막 시나리오를 돌리고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촬영까지는 못해도 반년 이상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기간 동안 대본 숙지 및 캐릭터 연구에 집중해야겠네요.”

“맡은 배역이 뭐라고 했었죠?”

“자폐증에 걸린 미술 천재입니다.”

“연기 부분은 민재휘 선생님이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술 강사를 데려오는 건 어떨까요?”

1팀 소속 팀장의 말에 주민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지한의 연기는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이미 완성된 수준이고 그 외 경험이나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민재휘 선생이 채워주고 있었다.

그러니 캐릭터를 더 탄탄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좋았다.

“좋군. 지금 당장 강사를 초빙할 수 있도록 알아보도록 하고, 미술관이나 그림 그리기 등을 체험할 수 있게 준비하지.”

“알겠습니다.”

“이번 주 안으로 목록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래.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 * *

“얘들아 선물 가져왔다.”

“선물?!”

“선물이요?”

영훈이 짐을 한 보따리 들고 아이들이 사는 숙소로 들어왔다.

거실에서 지한의 새로운 배역, 리온에 대해서 상상하고 있던 아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훈에게 달려갔다.

“형 그게 뭐야?”

“공책인가?

매니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아이들이 꽤 큰 부피의 짐을 보고 물었다.

“주세요!”

“주세요!”

아이들이 손을 내밀었다.

신발을 대충 현관에 벗은 영훈이 남매를 달고 거실로 갔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아이들이 하나씩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우와. 물감이야.”

“색연필도 엄청 많아.”

“누나, 이거 봐. 붓이야.”

“갑자기 웬 미술 종합 세트지?”

지연이 사실을 말하라는 듯이 영훈을 지그시 쳐다봤다.

“하하하. 사실 회사에서 지한이한테 준 거야. 연기 연습하라고.”

“리온이 미술하는 애라서?”

“그렇지. 역시 지연이는 똑똑하구나.”

똑똑한 게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봐도 알겠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그런 일이 아니라면 뭐 하러 온갖 미술 용품을 애한테 안겨주겠는가.

“누나 나 그럼 달 그려야 해?”

“너가 그리고 싶은 거 그려. 어차피 그림은 다른 사람이 그릴 거고 지한이는 그리는 시늉만 하면 되는걸.”

“그치만 직접 그려보고 싶어.”

“그리고 싶으면 그리면 되지.”

“그게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이 영화에 나왔으면 좋겠어.”

지한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갖가지 미술 도구들을 보고 좋아하던 애가 자신의 그림이 화면에 나왔으면 좋겠다며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음. 불가능한가?’

자신들에게는 그 뱀 새끼가 준 선물이 있지 않은가.

내 생각에는 아마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재능을 빨리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던데….

촬영할 때까지 주구장창 그림만 그리면 한 작품 정도는 영화에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지한아 촬영 시작할 때까지 연기 연습이랑 그림 연습 둘 다 할 수 있겠어?”

“응! 나 할 수 있어!”

지연의 말에 지한이 다시 활짝 핀 얼굴로 말했다.

저렇게 무언가에 욕심을 부릴 줄 아는 앤지 몰랐는데.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한번 해 보는 거지.

언제 촬영이 들어갈지는 몰라도 앞으로 몇 개월 안으로 전세계가 충격에 빠지는 거대한 사건이 터진다.

그러면 영화 촬영도 조금 미뤄질 수 있으니 충분히 미대 입시생 정도까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조만간 영훈 오빠를 통해서 넌지시 알려줘야겠네.’

영화 촬영 미뤄질 수 있다고.

“히히. 그럼 나 누나 그려볼래.”

“그럼 난 지한이 그려볼까?”

“좋아!!”

“저기, 얘들아. 형은? 오빠도 그려 줄 거지?”

“형은 다음에 그려줄게.”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으면 오빠 얼굴도 그려줄게.”

“정말이니, 얘들아? 기대하고 있을게.”

다음에 그려준다는 말에 기뻐하는 영훈을 보고 지연이 고개를 돌렸다.

‘좋아, 영훈 오빠는 이걸로 달랬어.’

기대한다며 기뻐하는 고영훈을 두고 지연이 스케치북을 펼쳤다.

돌아오고 나서 스케치북에 인생 계획을 쓰곤 했는데 이렇게 지한의 얼굴을 그리게 될 줄이야.

가끔 아무런 생각 없이 무언가를 하거나 스트레스받고 지칠 때 수채화를 그리곤 했다.

푸른 나무를 그리다 보면 숲속에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누나, 그리고 있어?”

“어? 어. 그리고 있어.”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지연이 지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예전 일로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야.

이미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사는 삶은 바뀌기 시작했고 자신은 동생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살 거다.

지연이 손을 움직였다.

슥, 슥

스케치북 위에 연한 연필 선이 그어졌다.

직선과 곡선.

선과 면.

동그라미와 삼각형.

지한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씩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좋아했던 녹음을 포기할 수 없어서 지한의 위로 푸른 잎이 얹어졌다.

“우와. 지연아. 너 진짜 잘 그린다.”

“진짜?”

영훈의 말에 지한도 힐끔거리더니 지연의 그림을 보러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연은 영훈이 가져온 색연필 통을 열었다.

학교에서 쓰던 12색이 아닌 72가지 색의 색연필을 본 지연이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녹색을 꺼냈다.

“이거 나야.”

“지한이 너네.”

어느새 구경꾼 모드로 들어간 두 사람이 그림에 색을 입히는 지연을 바라봤다.

탁.

연두색과 청록색 등 갖가지 초록색 계열의 색연필을 이용해 색을 입히다 보니 숲의 요정 같은 동생의 초상화가 완성됐다.

짝짝짝짝짝.

“누나 멋져!”

“지연아, 나도! 나도!”

후우.

나도 그림은 오랜만에 그리는 건데 생각보다 잘 나왔다.

초상화는 잘 못 그렸는데 붉은 자국 덕분인지 수월하게 그려졌다.

몇 번 더 연습하면 사진기처럼 복사하는 수준까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그려볼까?

지연이 오랜만에 들뜬 얼굴로 스케치북을 넘겼다.

“영훈 오빠 앞에 와봐.”

“화장 좀 하고 올까? 머리에 뭐 발라야 할 거 같은데. 잠시만 있어봐.”

“오빠.”

“응?”

“그냥 앉아.”

“응….”

* * *

재휘 선생님과 레슨을 끝난 지한이 누나와 그린 그림을 선생님 앞에 자랑했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누나랑 제가 그린 거예요.”

“이런! 너무 잘 그렸구나.”

빈말이 아니라 진짜 잘 그렸다.

누가 봐도 남매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그림인데 거기에 특색 있게 녹음과 파도가 어우러져 있었다.

지한의 얼굴 위에는 시원한 숲이.

지연의 얼굴 위에는 푸른 바다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모습에 재휘가 감탄했다.

“이게 정말 아이들이 그린 그림입니까?”

“네. 놀랍죠? 저도 아이들이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못 믿을 뻔했어요.”

“놀랍네요!”

영훈의 보증에 재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들의 그림을 번갈아 봤다.

“정말 잘 그리네. 둘 모두 화가 해도 되겠다.”

“히히 화가 될 거예요.”

“지한이 새 역할이 천재 화가래요.”

“그래서 이렇게 그림 연습하는 거야?”

“네!”

“지한이는 정말 멋진 배우구나.”

“저는 앞으로 어어엄청 대단한 스타가 될 거예요!”

“그래. 너는 될 수 있을 거다.”

미국에서 결심한 포부를 말하자 재휘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누구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할리우드 오디션을 통과하다니.

아이의 연기가 물 건너 모든 영화인들이 꿈꾸는 할리우드에도 통한다는 사실에 재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 지한이라면 할 수 있지.’

성인 연기자와 붙어도 지한이만큼의 연기를 할 수 있는 이는 상위 몇 % 안에 들었다.

그런데 또래 중에서 뽑는 거니 당연히 독보적이었겠지.

“저랑 누나랑 내일 미술관 가기로 했어요.”

“영훈 오빠가 데리고 가 준대요.”

내일은 주말이었다.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슬픈 직장인이 애써 웃었다.

“애들이랑 가볍게 바람 쐬고 오는 것도 괜찮죠.”

“하하. 고 매니저도 대단하군요. 저도 가끔 아이와 함께 나들이 가고 싶지만 이 녀석이 싫어해서 어쩔 수 없지 뭡니까.”

“아.”

아픈 아이를 두고 하는 말에 영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는데 자신이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음에 같이 가시죠.”

“네. 다음에요.”

두 사람이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 * *

시원한 바람.

쨍쨍한 햇살.

서서히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에 아이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은 영훈이 입장료를 내고 미술관에 들어갔다.

“얘들아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해. 알았지?”

“알았어, 형.”

“네.”

작게 속삭이며 대답한 아이들이 미술관에 뛰어 들어갔다.

“뛰면 안 돼!”

영훈의 말에 멈칫한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엄청 많다.”

“가정의 달이라 행사가 많나봐.”

“가정의 달?”

“5월에는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잖아? 뭔가 행사가 많아서 붙인 이름인가봐.”

“그렇구나. 그래서 어제 영훈이 형이 우리한테 선물 줬구나!”

“우리도 오빠한테 카네이션 선물할까?”

“좋아!”

“그럼 내일 학교 갔다가 꽃집 들렀다 오자.”

“응!”

순식간에 어버이날 선물을 정한 아이들이 미술관을 구경했다.

“얘들아.”

“응?”

“네.”

“이따가 저기도 한번 가볼래?”

“어디요?”

“저어기. 미술 선생님이 그림 그리는 거 가르쳐 준대.”

영훈의 말에 아이들이 영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벽에 막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미술 선생님이 보이는 것 같아 아이들이 영훈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야외 조각장에서 한대. 형이 어딘지 봐 놨어. 얼른 가보자.”

영훈이 다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야외조각장으로 데려갔다.

“안녕하세요,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이들의 활기찬 대답이 들렸다.

“오늘은 선생님과 함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 볼 거예요. 다들 아셨죠?”

“““네!”””

요즘 한창 그림 그리는 데 빠진 두 남매가 다른 아이들처럼 크게 대답했다.

32. 전화번호 뭐예요?

“오늘은 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 볼 거예요.”

“선생님 저는 꽃 그릴 거예요.”

“저는 공룡이요!”

“자동차가 좋아요!”

아이들이 손을 들고 각자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오늘 하루 행사를 위해 초빙된 강사가 벌써부터 피곤한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들이 그리고 싶은 걸 크레파스로 그려 볼 거예요. 모르는 거 있으면 선생님한테 물어보세요.”

“네에!”

아이들이 도화지를 받아들고 흩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남매 역시 도화지와 연필을 받아 영훈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형! 우리 저기 가자.”

“지한이가 저기서 그리고 싶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