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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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의 말에 재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 지한이 당황해서 이어서 말했다.

“어어…. 저. 선생님이 싫으면 안 가르쳐줘도 돼요.”

“아니다. 선생님으로 왔는데 학생이 가르침을 청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괜찮아요?”

“그래. 지한이 너는 눈이 좋으니까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리송한 재휘의 말에 지한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선생님한테 되물었다.

아이의 말에 재휘가 쓴웃음을 지으며 연습실 벽을 가리켰다.

의자에 앉아있는 누나와 선생님의 아이가 보였다.

“내 아들이 자폐증이 있거든.”

선생님의 말에 바닥에 엎드려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기찬이 보였다.

주변의 시선을 무시한 채 혼자 자신만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지한이 눈을 끔뻑였다.

“죄송해요.”

“뭐가?”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자폐증 있는 사람 연기 가르쳐 달라고 해서요. 그래서 선생님 슬프게 한 거요.”

자신을 배려한 아이의 말에 재휘가 푸근하게 웃으며 몸을 숙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말 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선생님은 괜찮아.”

“진짜요?”

“그럼. 그러니까 지한이가 선생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선생님은 지한이가 멋진 연기 보여주면 그게 제일 기쁘단다.”

선생님의 말에 진심을 느낀 지한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히히힛 하고 웃었다.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웃음에 선생님도 지켜보고 있던 지연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했다.

“그럼 지한이가 볼 때 기찬이는 어떤 아이냐?”

“형은 어어어엄청 열심히 뭔가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신경 안 써요.”

“그래 맞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것에만 몰두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아.”

“기찬이 형은 저거 하는 게 좋은가 봐요.”

“맞아. 그래서 나도 못 건드리게 해.”

“진짜요? 형 아빤데도 그래요?”

“진짜야. 못하게 하면 화내.”

“왜요?”

“흐음.”

재휘가 어떻게 하면 지한이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기찬이 옆에 앉아있는 지연을 보았다.

“지한이는 누나가 좋지?”

“네! 엄청 좋아요.”

“그런데 누가 누나를 데려가서 지한이한테서 떨어트려 놓으면 어떨 것 같니?”

“안 돼요….”

재휘의 설명에 절로 그 상황에 이입된 지한이 눈물을 글썽였다.

누나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싫어.

누나 돌려 줘.

“누나아아아 가지 마아아.”

누나를 찾으며 울음을 터트린 지한을 보고 선생이 귀여움 반, 난처함 반의 마음으로 지한을 달랬다.

지연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달려와 지한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누나 여깄어. 뚝. 괜찮아.”

“흐어어어엉.”

누나의 품 안에 안겨 옷자락을 꾸욱 쥔 지한이 서러운 울음을 토해 냈다.

지한이 아기 곰처럼 지연에게 매달리자 지연이 자리에 앉아 지한의 다리를 허리에 걸었다.

편안하게 누나에게 안긴 지한이 거칠게 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괜한 예시를 들어서 아이를 울린 재휘가 난처하게 웃으며 지한의 등을 토닥였다.

멀리서 기찬이 지연의 품에 안긴 지한을 돌아보더니 다시 종이에 집중했다.

* * *

“…그래서 4월 25일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래. 지한이가 모처럼 마음에 들어 하는 시나리오니까 어쩔 수 없지. 비행기랑 숙소 현지 에이전시까지 모든 준비를 다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본부장이 보고를 하고 사장실을 나섰다.

주민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결국 가야 하겠군.”

자신을 놀렸던 에밀리를 떠올리면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지한이와 회사를 생각하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무려 할리우드가 아닌가.

대한민국의 모든 엔터테인먼트사가 기적처럼 바라던 미국 진출이었다.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이제 데뷔한 지 1년이 안 된 어린 배우가 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 20년쯤 연기만 했던 사람의 영혼이 아이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지한이가 오디션에서 떨어질 리 없었다.’

아이들의 유창한 영어 발음을 보건대 대사도 문제없을 것 같고.

“혹시라도 동양인이라고 무시받지 않도록 에이전시를 잘 구해야겠군.”

인종 차별이 있는 나라다 보니 오히려 연기 외적인 부분들이 걱정되었다.

에밀리에게 인종 차별과 명예 훼손 소송을 잘 하는 로펌을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다.

또 그 여자한테 전화하기는 싫지만 제 배우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 * *

“얘들아. 오디션 날짜 나왔다.”

“와아!”

“언제예요?”

“4월 25일”

“오오.”

“얼마 안 남았다.”

오디션을 본다는 것 자체가 좋은지 지한이 활짝 웃었다.

미국에서 하는 오디션이니 캐리어에 짐을 싸야 하는 지연이 스케치북을 가져와 하나씩 여행 물품을 쓰기 시작했다.

로션은 용기에 담아가고 옷을 위아래 2~3개만 챙기자.

휴대폰이 없으니 충전기는 필요 없고, 또 뭐가 필요하더라?

“그래서 얘들아 너희 여권 만들러 가야 해.”

“여권?”

“!”

그러고 보니 지금 난 여권이 없구나!

“누나 여권이 뭐야?”

“다른 나라에 갈 때 필요한 거.”

“그렇구나.”

다른 나라에 간다는 말에 지한이 까먹고 있었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어로 대사를 외웠음에도 잘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도 그래.

알바해서 번 돈으로 대만이나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는 가본 적 있는데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편하게 있기 위해서 잠옷도 챙겨야 하나?

“영훈이 형. 형은 여권 있어?”

“후훗. 형도 이번에 만든다!”

들어온 지 2년 차인 영훈은 해외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를 담당한 적이 없었다.

자신은 배우 2팀 소속이었고 해외 활동이 있는 배우를 맡은 적이 없었기에 영훈도 아직까지 여권이 없었다.

“오빠, 그럼 우리 다 같이 만들러 가는 거야?”

“그래. 앞으로 지한이가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미리 만들어 놓으려는 거야.”

회사 사람들 모두 연기 외에 불합리한 요소가 있지 않는 한 지한이가 오디션에서 붙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회용이 아닌 일반 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여권 사진부터 찍으러 가자.”

“지금 바로 가요?”

“어. 빨리 만들수록 좋지.”

“알았어요.”

* * *

미국, LA 공항.

“우으으으.”

“아우우우.”

햇살이 따가운 낯선 이국의 땅.

비행기에서 내린 아이들이 두 손을 깍지 껴 팔을 쭈욱 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얘, 얘들아. 잠시만.”

“오빠, 괜찮아요?”

“형, 괜찮아?”

아이들이 뒤에서 허리와 목을 잡고 비틀비틀 걸어 나오는 영훈에게 물었다.

“고 매니저. 앞으로 아이들 스케줄이 많을 텐데 그렇게 체력이 좋지 않아서 어떡하나? 운동 좀 해.”

“사장니임.”

영훈이 원망 어린 눈으로 주민을 쳐다봤다.

우리 사장님은 꺾이는 30대고 나는 창창한 20댄대 왜 나는 죽을 것 같고 사장님은 괜찮지?

“우리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에이전시에서도 사람을 보낸다고 했으니 얼른 나가지.”

“네, 사장님. 그럼 짐을 챙겨오겠습니다.”

듬직한 체구의 사장님의 비서가 짐을 찾으러 갔다.

그 뒤를 영훈이 울상을 하고 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짐을 찾아오자 다 같이 입국장으로 나섰다.

“어. 저기 아닙니까? 한글로 써져 있는데요.”

핼쑥한 와중에 에이전시에서 나온 이를 금방 찾은 영훈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Hello. Mr. Princess?”

“….”

“사장님 공주예요?”

“영어 이름이 공주님인가 봐.”

“그렇구나.”

“지한이도 영어 이름 만들래?”

“좋아!”

“풉!”

“…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말에 영훈과 비서가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누구의 짓인지 뻔한 수작에 주민이 이를 악물었다.

‘에밀리! 두고 보자!’

* * *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전해 듣기로 공주님으로 부르면 된다고 해서 무슨 코드네임이나 예명인 줄 알았습니다.#

#어느 회사 사장이 예명으로 그런 걸 쓴답니까?#

#하하하. 에밀리의 친구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확실하게 말해두는데 에밀리는 제 친구가 아닙니다. 제 누나의 지인이죠.#

조금 전의 오해를 푼 주민과 에이전시의 직원이 차 안에서 담소를 나눴다.

에밀리라는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기에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지, 라며 넘어가는 걸까.

“지연아 지금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에밀리란 사람 친구라면 사장님 이름이 Princess일 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거냐, 그 에밀리란 사람은.”

“사장 아저씨 누나 친구래요.”

영훈은 시나리오를 보낸 제작사의 직원이라는 그 에밀리란 사람에 대한 썰을 들으며 그녀에 대한 첫인상을 머릿속에 기록했다.

왠지 범상치 않은 사람일 것 같은데.

“그나저나 너희들은 저 얘기 다 알아듣는 거니?”

“히히. 나 공부 열심히 했어!”

“디즈니 보면서 공부 열심히 했어요.”

“나도 공주님들 좀 봐야 하나.”

두 아이의 영어 비법에 영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일본이나 대만 등 다른 아시아로 진출하는 한류스타들이 늘어서 일본어랑 중국어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뜬금없이 미국이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지한의 오디션이 결정 나고 나서 자신도 옆에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책만 보고 공부한 모양이다.

리스닝을 더 열심히 공부했어야 했는데!

“형 도와줄까?”

“우리가 도와줄게요.”

“그래, 고맙다. 애들아.”

자신의 가슴에도 못 미치는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를 받게 되었지만 원래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이고 가르침을 청하는데 어른 아이를 가릴 수 없었다.

영훈이 굳은 결심을 하고 있을 때 에이전시에서 나온 직원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가 숙소입니다. 그리고 저기로 쭉 가면 바로 할리우드죠.”

“오오오!”

“와아!”

길게 쭉 뻗은 도로와 양옆에 자리하고 있는 가로수들.

그리고 가로수 옆에 줄지어 세워진 높은 빌딩을 보며 남매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여기가 할리우드!’

연기를 하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 꿈꾸는 곳에 왔다는 사실에 지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 동생을 이곳에서 제일 빛나는 스타로 만들자.’

할리우드에 도착해 수많이 빛나는 스타들이 족적을 남긴 명예의 거리를 떠올리며 지연이 굳게 다짐했다.

30. 할리우드 오디션

“오빠, 오빠! 일어나.”

“혀엉!”

지한이 몸을 날려 영훈의 몸 위로 떨어졌다.

“크헉!”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영훈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어제 시차 때문에 늦게 잤기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이 어린 꼬맹이들은 시차 적응도 다 끝냈는지 아침부터 난리였다.

“얘들아. 무슨 일이야.”

“오빠 차이니즈시어터 가자!”

“응? 가자! 가자, 형.”

아이들의 말에 영훈이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났다.

“거기? 할리우드 배우들 손 찍혀 있는데?”

“애런이 말해줬어. 거기에 어어엄청 유명한 배우들 사인이랑 손이랑 있대.”

“지한이가 가보고 싶대.”

사건의 원인을 들은 영훈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 사람이 원인이구나…!

“일단 형 좀 씻고.”

“응!”

“오빠 빨리 씻고 나와.”

결국 매니저의 숙명으로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한 영훈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이 친절하게 영훈의 이불을 걷어줬다.

* * *

“얘들아. 손 놓으면 안 돼.”

“알았어.”

“네.”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각각 잡은 영훈이 아침부터 붐비는 거리에 잔뜩 긴장하고 말했다.

씻고 아이들과 간단한 조식을 먹은 영훈이 지도를 보고 호텔을 나섰다.

매니저에게 지형 숙지는 기본 스킬이지!

#고는 아이들 엄마 같네요.#

#형은 남잔데요?#

#하하하. 그게 아니라 지한과 지연을 챙기는 모습이 엄마 같아서요.#

#그런가?#

애런에 말에 지한이 긴가민가한 얼굴을 했지만 고개를 돌려 누나를 본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뭔가 납득한 지한이 활기찬 할리우드의 거리를 보고 꺄르르 웃으며 방방 뛰었다.

“지한아 좋아?”

“응! 애런이 거기는 어어엄청 대단한 스타만 손도장 찍을 수 있대. 보고 싶어! 나도 나중에 도장 찍고 싶어.”

“지한이가 앞으로도 계속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면 금방 찍을 수 있을 거야. 벌써 할리우드까지 왔는걸?”

“히히힛!”

영훈의 칭찬에 지한이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지한아.”

“응?”

“아래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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