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놀아주시는데요?”
“하루 종일.”
“예?”
“애들은 눈 뜨고 있으면 절대 안 지쳐.”
“…힘내십시오.”
서글픈 애 아빠의 말에 다른 매니저가 그를 응원했다.
* * *
그 지치지 않는 아이들이 복도를 뛰어 A연습실로 향했다.
지한의 레슨이 있는 곳이었다.
“선생님 저희 왔어요!”
“안녕하세요!”
“오. 왔니?”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을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푸근하게 반겨줬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올해도 경력이 35년이 되는 대선배 민재휘였다.
“오늘도 학교 잘 다녀왔니?”
“네!”
“네에!”
“그래, 그래.”
아이들의 대답에 재휘가 허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그럼 수업하자.”
“좋아요.”
수업을 시작하자 지한이 재휘의 앞에 서고 지연이 연습실 벽 쪽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영훈은 조금 있다가 오겠다며 연습실을 나갔다.
“입부터 풀자.”
“푸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입술을 떨며 지한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재휘가 알려준 스트레칭 방법이었다.
가수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배우도 하는 줄 몰랐었는데.
“배우가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했지?”
“대사 전달이요.”
“그래. 맞다. 오늘도 준비한 문장 10번 읽어보자.”
지연은 지한이 연기 수업을 받는 것을 지켜봤다.
확실히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없는 발성 방법, 발음 교정 등을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슥, 슥.
지한의 연기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옆에서 들리는 거친 펜 소리에 지연이 고개를 돌렸다.
연습실에 엎드려 종이에 무언가를 집중해서 쓰고 있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재휘 선생님 아들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라고 했었나?
아이가 조금 아프다고 들었다.
그래서 연극만 하던 고집쟁이가 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거라고 첫날에 양해를 구하면서 말해줬다.
‘지금 뭐 쓰는 거지?’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를 나열하는 재휘의 아들, 기찬을 쳐다봤다.
선생님이 아들이 무언가 하고 있을 때 강제로 뺏지 말고 간섭하지도 말라고 주의를 하셔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뭐냐 저 알 수 없는 알파벳의 나열은.’
뭔가 나름의 규칙으로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이쪽은 하나도 이해 못 하겠다.
지연은 무언가에 몰두하는 기찬을 내버려두고 다시 지한이 듣고 있는 수업에 집중했다.
* * *
“…그래서 현재 김해 쪽에 있는 것을 확인됐습니다.”
“얼마 멀리 가지도 않았군.”
비서의 보고를 들은 주민이 입술을 비틀었다.
자식 버리고 가기에 얼마나 잘 사나 보려고 했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호텔 청소부로 살고 있다고 한다.
하, 어이가 없군.
“계속 감시할까요?”
“아니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알았으니 감시 인원은 줄이고 행선지만 파악할 수 있게 조치해.”
“알겠습니다.”
보고를 끝낸 비서가 밖을 나갔다.
비서가 정리해 놓고 간 보고서와 몰래 찍은 듯한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의 미란이 청소부 아줌마랑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띠리리리리.
주민의 개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찍힌 번호에 주민이 인상이 더 안 좋아졌다.
-헬로우 미스터 프린세스.
“그딴 별명은 그만둬.”
주민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상대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얼굴을 왕창 구긴 주민이 수화기를 끊으려고 하자 그의 행동을 짐작했는지 수화기에서 웃음이 뚝 끊겼다.
-헤이! 잠시만. 지금 전화 끊으려고 한 거 아니지?
“에밀리, 용건만 말해.”
-최근 보모로 전직했다면서?
“누가 그딴 소릴 한 거지?”
-제시카가!
“하아.”
제 친누나가 전해줬단 말에 주민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망할 누나!
나중에 두고 보자.
“그래서 용건은 언제 말할 건데. 끊는다.”
-잠깐! 네 애가 연기를 그렇게 잘한다면서?
“내 애 아니야.”
-제시카가 조만간 입양할 것 같다던데.
“한 번만 더 그렇게 말해라. 그냥 내가 키우는 연예인이야.”
-그래, 그래. 그 애 좀 보고 싶은데 괜찮지?
지한을 콕 집어 말하는 에밀리의 말에 주민이 허리를 세웠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 프린세스, 알아들었잖아?
한 번 더 들린 공주님 소리에 주민이 이를 악물었다.
“똑바로 말 안 하면 전화 끊을 거야.”
-알았어, 알았어. 네 회사로 시나리오를 보낼게. 네 아이가 우리 영화에 출연해 줬으면 좋겠어.
“너희가 직접 만드는 영환가?”
-만들고 싶었으나 세상에 나올 수 없던 시나리오였지. 그런데 세상에! 이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줄 수 있는 배우가 다름 아니라 바다 너머에 그런 배우가 있을 줄은!
“네가 지한이 연기를 어떻게 알고.”
-얼마 전에 제시카가 LA 왔을 때 얘기해 줘서 구해다 봤지.
하여간 돈 많은 놈들이 하는 짓이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잊은 주민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일단 읽어보고.”
-오케이. 나 지금 뉴욕에 있으니까 정해지면 언제든지 연락 줘.
하아. 정말 전화를 다시 해야 할까?
주민은 시나리오가 제발 별로이기를 빌었다.
* * *
“음. 이상해.”
“그거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닌데.”
남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연습생이 노래를 멈추고 재빨리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 어? 그럼 어떻게 부를까?”
“자, 지한이 시범.”
“옙!”
지연의 지시에 지한이가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같은 노래지만 훨씬 풍부한 감정에 연습생이 잠시 멍해졌다.
“이거 그냥 슬픈 거 아니에요. 저 사람이 날 버리고 가서 슬픈데 화도 나는 거예요.”
“오빠처럼 음정을 잘 지켜서 부를 거면 노래방 가서 부르면 돼요.”
“노래방 가고 싶다.”
“영훈 오빠 우리 이따가 노래방 가요.”
“진정하자, 얘들아.”
어린애답게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을 영훈이 다독여 자리에 앉혔다.
아이들의 독설에 잠시 멍하니 있던 연습생이 감정을 실으라는 조언에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너희들 그래도 오빠랑 형인데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잘못 부른 거 맞는데.”
“누나 말이 맞아요.”
자신이 듣기에도 연습생이 정확하게 음정을 따라 부른 것과 지한이 곡을 해석해 풍부한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달랐다.
후자가 더 좋았달까.
그렇다고 해도 혹시나 다른 이들에게 꼬투리 잡힐까 봐 영훈이 아이들의 말버릇을 단속했다.
“영훈 씨.”
자꾸만 딴 데로 주의가 흩어지는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잔소리를 하려고 할 때 누가 영훈을 불렀다.
“네.”
“지한이한테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한 번 볼래?”
“시나리오는 팀장급에서 정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시나리오가 미국에서 넘어온 거라 애들 의견도 묻고 싶대.”
“네에!?”
아메리카!?
깜짝 놀란 영훈이 굳어 있을 때, 지연이 눈을 빛냈다.
미국?
미국에서 지한이 시나리오가 들어왔다고?
이거 잘하면 지한이를 조금 더 일찍 띄울 수 있겠는데.
벌써 아역 배우로 이름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지연은 제 동생이 아역 배우가 아니라 작품을 견인할 수 있는 위치의 배우로 불리길 원했다.
‘지한이는 할 수 있어.’
자신이 옆에 있으니까 지한이는 더 빨리, 더 높이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지한이의 날개가 되어 줄 거야.
“오빠, 우리 빨리 보러 가요.”
“형! 대본이에요? 저 또 촬영해요?”
아이들이 영훈을 보챘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영훈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데리고 연습실을 나갔다.
남아있던 연습생들이 미국이라는 말에 웅성웅성 떠들었다.
* * *
“지한아 너 영어 할 수 있니?”
회의실에 불려 들어오자마자 지한을 담당하는 2팀의 박 팀장이 지한에게 물었다.
“조금 할 수 있어요.”
“그래?”
할 수 있다는 말에 박 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 잠시만. 그 정도 끝내면 안 되죠. 이건 할리우드에서 넘어온 시나리오라구요!”
“뭐, 어때. 어차피 배역이 자폐아라는 설정이잖아. 대사도 거의 없고.”
“그래도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배우의 경력에 오점을 만들 수 없어요.”
어느 것이 지한이를 위한 일인가로 실무진들이 말다툼을 했다.
“그만.”
공 사장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말렸다.
“지한아 언어라는 것은 큰 장벽이란다. 특히 미국은 영화 산업의 중심지라서 자막 달린 영화는 인기가 없어. 그러니 네가 영어로 대사를 해야 하는데 정말 괜찮겠니?”
“Of course!”
꽤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에 안에 있던 어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공 사장 역시 유학을 다녀온 자신보다 더 나은 것 같은 지한의 발음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 정도면 영화 촬영 때까지 선생을 붙이면 되겠어.”
공 사장의 말에 지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미리 영어 공부를 시키길 잘했다.
고마워요, 디즈니.
“지한이 너에게 시나리오가 들어왔어. 단독 주연이야. 블록버스터급은 아니고 저예산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다. 그런데 주인공이 자폐증이 있는 데다가 그림 그리는 장면도 있어.”
주민의 말이 끝난 후 지연은 옆을 돌아봤다.
지금 주민의 말에서 ‘시나리오가 들어왔다.’와 ‘영화’, ‘자폐증’, ‘그림’만 귀에 들어왔을 거다.
자신이 맡을 역할 외에는 신경도 안 쓰는 동생의 생각을 아는 지연이 고개를 돌려 어른들을 봤다.
“시나리오 보여주세요.”
“내일 줄게. 아직 번역을 안 해서 보기 힘들 거야.”
“괜찮아요. 영어 읽을 수 있어요. 제가 지한이한테 읽어줄게요.”
지연의 말에 모두 깜짝 놀라 아이를 보았다.
내가 이래 봬도 속은 30살이 넘었다 이거야.
고시랑 취업을 위해서 토익, 토스를 공부했던 백수를 얕보지 말라구!
지연이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시나리오를 읽고 쟁취해서 회의실을 나갔다.
주민보다 더 유창한 발음에 모두 넋을 잃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 *
“자폐증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병이야.”
“병인 거야?”
“응. 일종의 발달장애.”
여기저기 뒤져 자폐증이 무엇인지 알아 온 지연이 지한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말하는 게 어려워.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대.”
“으으음. 대략 알 것 같은데. 직접 보고 싶어.”
“아마 기찬 오빠가 그 자폐증일걸?”
“정말?”
“아마도. 내일 선생님한테 물어보자.”
“음. 선생님이 싫어하지 않을까?”
“자폐아 배역이 들어왔는데 도와달라고 하면 선생님도 화 안 내지 않을까? 누나가 먼저 물어볼게.”
“아니야. 내 주인공이잖아. 내가 물어볼게.”
“그럼 같이 물어보자.”
“히히힛. 알았어. 같이해.”
시나리오에서는 자폐아가 주인공으로 나왔다.
어린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부모.
하지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낼 때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게 된다.
그곳에 그려진 자신과 남편의 얼굴을 보고 아이의 세상이 자신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괜찮네.”
“누나, 시나리오 좋아?”
“응. 이거 생각보다 좋다. 지한이 네가 연기하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나올 거야.”
이 영화의 주연은 자폐아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는 아이를 설정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그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를 그림이라는 장치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성인도 하기 쉽지 않은 장애 연기를 어린아이에게 그것도 대사도 거의 없이 내면 연기와 행동으로 하게 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시나리오를 보낸 사람은 운이 좋았다.
‘내 동생이라면 할 수 있지.’
가까이에서 지한이의 연기를 1대1로 보고 있는 자의 확신이었다.
이 영화라면 지한이를 더 높은 곳으로 올릴 수 있었다.
29. 가자, 미국으로!
“선생님, 선생님!”
“그래. 오늘따라 활기가 넘치네. 무슨 일 있니?”
“저 오디션 봐요.”
“호오? 축하한다. 지한이 너라면 바로 붙을 수 있을 거다.”
지한을 가르치면서 아이의 연기를 두 눈으로 지켜본 재휘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이는 기술이 부족하지 감정이나 캐릭터 분석은 자신이 가르칠 게 없는 수준이었다.
부족한 기술과 앞으로의 경험이 더 쌓인다면 아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선생님 저 자폐증 있는 미술 천재 역할이라는데 자폐증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누나도 잘 모른대요. 혹시 선생님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