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할 말을 대신 한 지연을 보고 성준이 눈을 크게 떴다.
“지연아 그거 어떻게 알았어?”
미래 아이들의 그리스 신화 바이블. 만화로 보는 그 책이 있었기 때문이죠.
“책에서 봤어요.”
“지연이는 똑똑하네.”
“우리 누나 모르는 거 없어요.”
누나를 자랑하는 동생의 말에 연습실에 있던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헤라라는 이름의 그룹이라.
잘 기억 안 나는데.
“저 언니들 노래 들어봐도 돼요?”
“너희들 어때? 아이들을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해 볼래?”
““““네!””””
오.
기합이 딱딱 맞는 걸 보니 왠지 잘할 것 같은데?
노래가 틀어지고 소녀들이 대형을 잡았다.
반주가 들리고 네 사람의 안무가 시작됐다.
* * *
조금 숨소리가 거칠어진 헤라 멤버들이 자리에 서서 호흡을 골랐다.
안무 선생님이나 댄서들이 아닌 이들이 앞에 있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노래까지 부른 이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우와.”
“….”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아이돌의 무대에 지한이 박수를 쳤다.
지연은 노래와 안무를 보고 왜 이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지 알아차렸다.
‘노래가 평타도 못해.’
이 시기의 가수들의 보컬 능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춤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노래가 애매했다.
지연의 무심한 얼굴을 본 멤버들이 오들오들 떨며 아이들의 앞에 각을 잡고 섰다.
“지연아. 별로야?”
옆에 있던 성준도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춤은 좋아요.”
아이의 말에 성준이 흠칫했다.
그 말이 노래는 별로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도 춤 좋아.”
지한이가 후렴구 때 나오는 안무를 금세 따라했다.
한 번 보고 따라하는 모습에 헤라 멤버들은 물론 댄서들과 성준이 눈을 빛냈며 감탄했다.
“오 지한이 대단한데? 보고 바로 따라하네?”
“누나랑 같이 본 건 바로 할 수 있어요.”
아리송한 말이지만 어쨌든 아이의 춤 복사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다른 노래 없어요?”
“다른 노래?”
“앨범이면 다른 노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 있지.”
지연의 말에 성준이 멤버들에게 눈짓을 했다.
멤버들이 바로 노래 준비를 했다.
어쩐지 눈앞에 사장님과 실장님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평가받는 자리인 것처럼 멤버들이 잔뜩 긴장하고 투명 마이크를 쥐고 노래를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 함께했던
너와 나
이제는 혼자
가로등 아래 서 있어
‘흐음.’
지연이 팔짱을 끼고 네 사람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볍게 안무를 곁들이는 모습을 보니 이 곡도 미는 것 같은데 이것도 조금 그런데?
보컬 능력이 아예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노래가 저들의 보컬 실력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누구야, 대체? 이딴 곡 고른 사람이.
노래를 끝낸 멤버들이 평가를 기다렸다.
“얘들아 어때?”
“아까 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요.”
“….”
“저기, 지연아. 너는?”
“언니. 이 노래 말고 이정은의 <바보 같은 너> 한번 불러주시면 안 돼요?”
평가가 아니라 또 다른 노래 신청에 멤버들이 조금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성준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말없이 지연의 지시에 따랐다.
<바보 같은 너>는 꽤 히트했던 여성 솔로 곡이기도 했고 멤버들도 숙소에서 자주 부르던 노래기도 했다.
어떻게 알고 이 노래를 요구한 것은 모르겠지만 멤버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뒤 노래를 시작했다.
♬나를 가지고 장난친 거니
그런 줄도 모르고
네 연락을 기다린 나
“흐음.”
본인들의 앨범에 실릴 곡보다 더 잘 부르는 헤라 멤버들을 보고 성준이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모습을 보니 왜 A&R팀과 본부장 및 가수실이 싸우는지 알 것 같았다.
본부장과 가수실에서는 곡이 아이들과 맞지 않다고 했고, A&R팀에서는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곡 중에 이 곡이 제일 앨범 컨셉과 아이들에게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으니 알겠어. 이 노래는 애들과 맞지 않아.’
청순한 컨셉으로 앨범을 꾸몄는데 지금 노래를 들어보니 아이들에게는 카리스마 있고 성숙한 느낌의 노래가 더 잘 어울렸다.
아이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미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이번에는 진짜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얘들아. 이건 아니다. 내가 사장님한테 말하고 올게.”
“선생님.”
“얘들아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두고 너희와 맞지 않는 길을 갈 이유는 없어.”
“하지만 지금 앨범으로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말하고도 그 가능성이 새로 앨범을 꾸리는 것보다 낮다는 것을 느낀 헤라의 멤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노래 안 좋아요. 다른 노래로 해요.”
“<바보 같은 너>가 더 좋았는데 왜 안 해요?”
지한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그 말에 성진이 확신을 바라는 것처럼 남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 언니들은 멋진 게 더 잘 어울려요.”
지금까지 나온 여성 그룹 트렌드를 따른다고 일부러 청순한 컨셉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는 섹시 컨셉으로 나오는 걸그룹들이 더 많아지기도 하고, 저 언니들은 걸크러쉬상이거든.
여덕들을 이끌 얼굴이었다.
“언니들 교복보다 정장이 더 잘 어울려요.”
“맞아. 근데 치마보다 바지가 더 멋질 거 같은데.”
“여자도 정장 바지 입어.”
“아, 맞다.”
아이들의 말에 무언가가 번뜩인 성준이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쥐었다.
“그래. 왜 그걸 생각 못했지? 얘들아, 나 지금 사장실에 갔다 올게.”
성진이 그 말을 남기고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멤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남매를 보고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갑자기 사장실에 뛰어든 안성준의 말을 듣고 공 사장이 본부장과 함께 뛰어온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 * *
“그러니까 지연아, 여기 안성준 안무가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지?”
“맞아요. 제가 노래 별로라고 했고, 다른 노래가 더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그래. 지금 들어보니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구나.”
모호했던 가수실의 주장이 노래 한 곡으로 신뢰를 얻었다.
옆에 따라왔던 본부장이 제 안목이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장님 지금 와서 앨범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안 바꾸면 언제 바꿔요? 다음에요?”
“으음.”
지연이 한 말에 본부장이 신음을 흘렸다.
아직 헤라는 시장에서 자리 잡지 못한 가수였고, 이번 앨범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다음 앨범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연의 말대로 이번 앨범을 바꿔야 했다.
“가서 A&R 팀장 데려오고, 올 때 지금 회사에 있는 곡 전부 다 가져오라 그래.”
“사장님?”
“움직여. 바꿔야 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지.”
“알겠습니다.”
지연의 말 한마디로 회사가 바빠졌다.
멀뚱히 서서 이들의 눈치를 보던 멤버들이 희망이 담긴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고마워.”
옆에 다가온 헤라의 리더 소영이 아이들에게 작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 * *
“사장님 컴백이 다음 달입니다. 앨범을 전부 갈아엎으면 컴백 일정에 맞출 수 없을지도 몰라요.”
“컴백에 맞출 수 있도록 최대한 맞춰보지. 우선 곡부터 찾지.”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사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A&R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가수실의 주장을 이해했지만 대중성을 맞춘 곡이기에 평균 이상은 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성 그룹들은 청순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대부분의 엔터테인먼트에서의 시장 공략법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 곡을 골랐는데 사장의 마음에 안 든다니 고생하게 생겼네.
“일단 지시하신 대로 회사에 있는 곡들을 전부 다 가져오긴 했는데 여기서 고르시게요?”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찾아보고 없으면 작곡가들한테 부탁해야지.”
“어휴. 그런데 애들은 왜 여기 있습니까?”
“지연이가 컨셉을 찾았어.”
“지연이가요?”
사장의 말에 팀장이 지연을 돌아봤다.
나란히 앉아 있다가 자신을 돌아보고 놀라는 팀장에게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전 모르겠습니다. 일단 틉니다.”
회사에 있는 모든 곡들을 가져온 팀장이 플레이어를 틀었다.
음. 이건 별로.
“다음.”
“별론데?”
“이전 컨셉이랑 겹치잖아.”
“이거 아닌 거 같은데.”
사장과 본부장, 그리고 가수실 실장까지 둘러 모여 곡을 들었다.
알아서 잘 거르는 이들을 보고 지연은 괜찮았던 곡들 번호만 종이에 기록했다.
이건 조금 고치면 쓸 만해질 것 같고
아, 이것도 괜찮다.
“다음.”
벌써 꽤 오래 흐린 시간에 다들 목 뒤를 주무르고 있을 때 다음으로 넘어간 곡에 아이들의 고개가 홱 들렸다.
지연이 무의식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테이블에 부딪치며 리듬을 탔다.
“흐흥, 흥.”
“으음. 음.”
지연과 지한이 멜로디를 따라 허밍했다.
노래 위에 얹어진 아이들의 콧노래에 어른들이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 곡 한번 써보지.”
“애들이 불러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회의 끝에 4곡을 건진 실무진들이 이 곡들을 가지고 멤버들에게 맞는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앨범을 엎기로 결정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새 곡들 들어보시죠.”
지난 7일 동안 선정된 4곡을 베이스로 곡을 편곡한 A&R 팀장이 자신 있는 얼굴로 곡을 틀었다.
회의실에서 새 앨범에 대한 방향성 검토를 위해 모인 이들이 각자 신중한 자세로 노래를 들었다.
“호오.”
“흠.”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다들 등받이에 기댔던 허리를 세우고 귀를 활짝 열었다.
짧게 느껴졌던 4곡을 전부 감상하자 새 앨범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던 이들마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매력이 확실히 더 사는군요.”
“이전 앨범보다 확실히 더 좋습니다.”
다수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새 앨범을 보고 가수실 실장과 팀장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이걸로 하지. 돈은 더 들어도 되니까 컴백 일정에 맞춰서 준비가 끝나도록 다들 빠르게 움직여.”
“네.”
“알겠습니다.”
바쁜 일정에 모두가 바쁘게 회의실로 나섰다.
모두가 나간 뒤 남겨진 사장과 본부장이 모두의 앞에서 하지 못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 모두 지연이가 고른 곡들이라면서.”
“네, 그렇습니다. 사실 몇 곡 더 고르기는 했는데 그것을 쓸지 말지는 이번 앨범의 반응을 본 뒤 결정할 생각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땐 진지하게 지연이를 키워볼까 생각중입니다.”
본부장의 말에 공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조금 어른스러운 면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지연이 보여준 면모가 놀라웠다.
매니저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연기도 지한이에게 가르쳐 줄 정도로 수준급이고, 분장도 스태프들이 놀랄 정도로 금방금방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노래를 듣자마자 헤라 멤버들에게 어울리는 다른 곡을 불러보라고 했고, 새 앨범을 구성하는 곡들 모두를 지연이도 골랐다.
“지한이뿐만 아니라 지연이도 괴물이었구만.”
“남매가 모두 대단하네요.”
공 사장과 본부장이 두 아이의 재능에 감탄했다.
앞으로 그 아이들이 또 어떤 놀라운 것을 보여줄지 기대됐다.
28. 바다 너머 온 제의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탑엔터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어. 어서 와라.”
“수업은 잘 들었고?”
“네!”
“열심히 들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직원들이 한마디씩 하며 반겼다.
영훈의 자리에 가방을 던져둔 아이들이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가 연습실로 향했다.
“얘들아! 뛰지 말고!”
“하하하. 애들이 활기차네.”
“영훈아 힘내라.”
“네, 선배님. 얘들아! 잠시만 기다려.”
대충 던진 가방을 자신의 의자에 똑바로 세운 영훈이 외투를 의자에 걸고 아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뒤로 선배들의 덕담이 쏟아졌고, 간신히 예의를 차려 대답한 영훈이 이내 아이들의 뒤를 쫓아 뛰어갔다.
“저 녀석. 애들이 얼마나 힘이 넘치는지 알게 될 거다.”
“임 팀장님은 아직 애가 하나죠?”
“어, 5살.”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어어. 그냥 회사 와서 일하는 게 더 나아.”
“진짜요? 에이 그래도 집에 가서 애들이랑 잠깐 놀아주는 게 더 낫죠.”
“잠깐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