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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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들어와요.”

아이들이 각각 영훈의 한 손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

얼떨결에 끌려가서 앉은 영훈은 밥상다리 부러지도록 올라오는 반찬을 보고 손을 떨었다.

* * *

“꺼윽.”

“오빠 괜찮아요?”

“형 괜찮아?”

아이들이 남산처럼 부푼 영훈의 배를 콕콕 찔렀다.

눕는 것도 힘들어 등을 받치고 기대앉은 영훈이 힘없이 말했다.

“얘들아… 누르지 마.”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데.

눈을 마주친 남매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웁. 소, 소화시키고 가야겠다.”

히히. ‘영훈 오빠 1박시키기’ 제 1단계 성공.

“저기, 어르신.”

“할머니이!”

“할아버지이!”

영훈을 도와 조부모를 부르자 부엌에 들어갔던 할머니와 큰방에 있던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와 부르노?”

“영훈이 형이 할 말이 있대요!”

“얘들아…?”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라고 배운 새나라의 어린이들이 저지른 일에 영훈이 급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그래. 우린 와 불렀노?”

“저 애들 전학 문제 때문에 그러는데, 아이들 엄마가 올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엉? 그게 무슨 말이고?”

“애들 엄마는 이미 서울 올라갔는데?”

“예?”

“여기 없어.”

“예?”

“한참 전에 올라갔어.”

“예????”

* * *

이미란이 사라졌다.

영훈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외삼촌에게 전화했다.

상대편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니 그쪽에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인 것 같았다.

멀뚱히 서 있는 남매를 보고 영훈이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안 봐도 괜찮은데.’

이미란이 어느 날 사라질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돌아오기 전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뒤에 일어날 일이었다.

카드 빚이 터지고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힘들었던 시기에 직장도 그만두고 오형우의 폭언을 들어야했던 이미란이 편지 한 장 남겨두고 가출했었다.

그때 오형우는 뭐라고 했더라?

다른 남자 만나서 떠났다고 했었나?

우느라 지쳐 기절했던 아이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했다.

“지한아 안 놀랐어?”

“음. 나 괜찮은데.”

“정말? 엄마가 없는데?”

지한은 지독한 마마보이었다.

가족 중에서 누구하나 의지할 이가 없었기 때문에 옆에 남아있던 이미란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다고 하다니.

정말 괜찮은 건가?

“누나 나 진짜 괜찮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진짜 괜찮은데.”

“진짜?”

“응. 누나가 있잖아.”

지한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연을 올려다봤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것 같은 누나의 얼굴에 지한이 지연의 손을 잡았다.

서로 자국이 남은 그 손이 이어지자 지한의 마음이 흘러들어왔다.

‘정말 괜찮구나.’

전해져오는 진심에 지연이 손에 힘을 주었다.

* * *

“이기 다 무슨 일이고.”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리에 할머니가 물만 꿀꺽꿀꺽 마셨다.

혹시나 혈압이 있는 할머니가 잘못될까봐 할아버지가 옆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아줬다.

마침 방학이 끝날 무렵이라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준호가 집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준호 오빠 외삼촌 외숙모가 함께 외갓집에 방문했다.

“너그덜 괜찮나?”

홀로 남은 아이들을 어른들이 꼭 안아줬다.

자신을 끌어안는 어른들을 지연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닌데.

어차피 이미란은 우릴 버리고 떠날 여자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돌아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있는 한 이미란이 돌아오게 두지 않을 거다.

“경찰에 신고해야겠습니다.”

“그래. 충만아. 네가 신고 좀 해라.”

“네. 준호야 너는 가서 애들 좀 봐라.”

“예, 아버지.”

오랜만에 본 준호 오빠가 벽에 붙어 앉아있던 우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긴급 가족 회의에 우리 옆에 붙어있던 영훈 오빠도 덩달아 작은방으로 따라왔다.

“아,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이런 자리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준호의 말에 영훈의 표정이 흐려졌다.

“오늘 할아버지 전화가 없었으면 내려오신 줄도 몰랐겠네요.”

“이런 일로 보게 돼서 참 그렇네요.”

그러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아니 서로 언제까지 이런 얘기만 할 거야?

우리 어떡해?

학교 가? 말아?

“저기 오빠.”

“어.”

“그래.”

지연의 말에 영훈과 준호 두 사람이 돌아봤다.

서로 자기를 부른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얽혔다.

“우리 뭐 해?”

“어? 그러니까 일단은 잘 자고 잘 먹자.”

“그래. 나머지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게.”

“형 그럼 우리 여기에 계속 있어?”

“그런,”

“아니. 너희들 형이랑 같이 서울 가자.”

영훈의 말에 준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 사람이 지금 우리 애들을 함부로 데려가겠다는 건가?

준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까 팀장님한테 너희들 일 보고했어.”

“이건 집안일입니다, 매니저님.”

“하지만 회사가 알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죠. 올해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활동하기로 했는데 차질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고모가 없다고 해도 아이들의 보호자는 여기 있습니다.”

“두 어르신들은 지한이의 활동에 대해서 도와주실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냉정한 영훈의 말에 준호가 눈을 찌푸렸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희 나름대로 아이들을 지키려고 정한 일입니다.”

“연예계 활동 외에 회사가 어떻게 아이들을 관리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아직 애들은 어른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압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른들이 없잖습니까.”

점점 언쟁이 심해지는 두 사람을 보고 지연이 끼어들었다.

“서울로 올라가면 이번에 있었던 집에서 살아요?”

“지연아.”

“형, 도우미 아주머니 요리 잘해. 누나도 잘해.”

“너 부엌에 들어갔어?”

“칼은 안 썼어.”

“그 말이 아니잖아.”

준호가 이마를 짚었다.

“영훈 오빠가 우리 잘 챙겨줬어.”

“맞아. 우리 둘이 있어도 괜찮았는데.”

“원래 둘이서 잘 있어.”

남매의 말에 준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부모가 없는데도 둘이서 잘 지냈다는 소리를 편하게 흘러 넘길 수 없었다.

“일단 이 얘기는 밖에 있는 어른들과 더 말해 봅시다. 회사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챙길지 구체적으로 대답해야 할 겁니다.”

“네.”

준호가 잠시 이 일을 전하기 위해서 방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영훈이 막힌 숨을 토해 냈다.

“파하. 힘들었다.”

체하는 줄 알았네.

흐느적 무너진 영훈을 아이들이 콕콕 건드렸다.

“얘들아 장난은 그만.”

“앗!”

“히히.”

방금까지 준호 오빠한테 하나도 안 지고 말 잘 했으면서.

그런데 이렇게 헐렁한 모습이 영훈 오빠답긴 했다.

아깐 영훈 오빠 몸에 다른 사람이 빙의한 줄.

“매니저님. 잠시 나오시죠.”

돌아온 준호 오빠가 한 말에 영훈 오빠가 죽을상을 했다.

힘내요, 고 매니저!

* * *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그동안 이상한 우편들이 계속 도착했다고 한다.

그 우편들은 독촉장.

아마 오형우와의 이혼 때문에 이미란이 조금 더 일찍 빚쟁이가 된 것 같았다.

부부로 살면서 생긴 빚을 나누기도 했고, 이혼하면서 카드 빚을 돌려막을 길도 요원해졌다.

그래도 지한이가 촬영하면서 번 돈으로 어찌어찌 틀어막아 보려 했지만 지한이가 받는 돈으로 그 빚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밖에서 늦은 시각까지 어른들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외갓집 식구들은 우리의 거취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했고, 영훈은 지난 몇 달간 자신들이 아이들을 케어한 것과 회사에서 아이들에게 제공할 혜택에 대해서 하나하나 읊었다.

그리고 영훈이 어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오빠, 우리 서울 가서 살아도 돼? 그, 숙소. 계속 써도 돼?”

“형이랑 또 같이 사는 거야?”

아이들의 말에 영훈이 울컥했다.

저 어린아이가 그래도 누나라고 제 동생을 끌어안고 말하는 게 가슴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신은 이 아이들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가.

“그래. 가자.”

“다른 사람들이 우리 싫어하면 어떡해?”

이미 지한이에게 과한 혜택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업계에서 한 작품, 그것도 엑스트라로 잠깐 나온 아이와 전속 계약을 맺는 것이 흔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렇게 넓은 숙소를 제공해 준 것도 그렇고 시나리오도 엄청 신중하게 고르고 있다고 들었다.

분명 질투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

“괜찮아. 이거 사장님 지시야!”

영훈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오?

“회사에서 너희보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이 오빠가 태평한 소리하네.

그래도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우리 편이라니 그건 좋았다.

사장님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게 지한이 다음 작품도 대박 좀 터트려 볼까?

이럴 때 회귀자 메리트를 써야지 언제 쓰겠어?

27. 복덩이

어른들의 동의를 얻은 아이들은 짐을 들고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전학 수속을 밟는 동안 남매는 영훈을 따라 매일 탑엔터에 왔다.

회사에 들어온 대본으로 연기 놀이를 하기도 했고,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소년 소녀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은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또 왔네.”

안무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유리문 너머로 아이들을 발견한 안무 선생이 문을 열고 남매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뜨려는 아이들을 보고 안무가 안성준이 급하게 아이들을 붙들고 소리쳤다.

이놈의 입.

말도 그따위로밖에 못 거냐!

하마터면 애들을 쫓아낼 뻔한 성준이 땀을 삐질 흘리며 무릎을 굽혔다.

“그, 구경 안에 와서 해도 돼.”

“저기 있는 언니들 모두 열심히 하는데 우리가 구경하면 싫어할 거 같아요.”

“음.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철벽같은 아이들의 말에 성준이 울려고 할 때 안에서 연습하던 가수들이 외쳤다.

“아니야. 얘들아!”

“들어와!”

“제발 봐 줘!”

“안 싫어해!”

정말 다급한 외침이었다.

그녀들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들어와!”

아. 갑자기 들어가기 무서워지는데.

어쩐지 어느 영화가 떠오른 지연이 말을 끌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의도치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지연과 지한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춤을 추고 있는 가수들을 쳐다봤다.

“어때?”

“다들 멋져요.”

“근데 선생님. 왜 누나들만 있어요?”

“지금 여기 있는 애들이 앨범 준비 중이라 그래.”

“앨범?”

“그래. 다음 달에 2집 앨범 낼 거야.”

오?

그래서 이 사람들만 따로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을 하고 있었구나.

그룹명은 뭐지?

나도 들어본 이름이라면 좋겠는데.

“그룹 이름은 뭐예요?”

“헤라.”

“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의 아내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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