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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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성아가 성진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품에 성진을 숨긴 성아가 굵은 눈물을 성진의 등 위로 뚝뚝 떨어트렸다.

“크흡.”

“어흡.”

조정실 여기저기서 숨을 틀어막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옆을 돌아보니 국장이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국장의 머리에 배우 오지한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 * *

“지한이가 병원복 입고 있으니까 왜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냐.”

촬영을 위해서 병원복으로 갈아입는 지한을 보고 영훈이 눈가를 훔쳤다.

하필 어제 그 장면을 보고 자서!

“오빠, 휴지?”

옆에서 지연이 휴지를 내밀었다.

무심코 옆을 본 영훈의 눈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오빠 또 이러네.

“지연이, 너도. 흡.”

“고 매니저님은 정말 눈물이 많네요.”

“하지만, 애들 머리가아아아.”

“저번에 울어놓고 오늘 또 울면 어떡해요!”

“아직 안 울어요.”

그렇게 이상한가?

지연과 지한이 서로를 마주 봤다.

두 아이의 머리가 똑같이 휑했다.

촬영을 위해서 지한이가 머리를 잘라야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작가랑 미팅할 때 미리 아플 거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김은영 작가가 지한이 머리 잘라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으니까.

앞으로 몇 씬이나 찍어야 하는데 분장을 하는 것도 그렇고 지한이 머리를 미는 쪽으로 결정했다.

머리를 미는 것을 결정했음에도 아이답게 지한이 머뭇거렸는데 촬영장에서 혼자 민머리가 되는 것을 무서워하는 지한을 위해서 지연도 머리를 밀었다.

“진짜 머리를 밀어도 너흰 어쩜 이렇게 잘생기고 예뻐?”

분장팀 소영이 두 아이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밀어놓고 보니 두상부터 미인이었다.

동생을 위해서 자신도 머리를 민 지연을 보고 그날 자리에 있던 모든 스태프들이 감동한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유전자의 힘인가?”

“아, 소영 씨. 그건 아니에요.”

“어머, 실수. 가끔 기적이 일어나긴 하죠. 호호호.”

혹시라도 아이의 생물학적 부모에 대한 얘기가 나올까 봐 영훈이 칼같이 차단했다.

“자, 분장 끝. 지한아 오늘도 힘내.”

“네! 고마워요, 소영 누나.”

지한이의 말에 소영이 기특하다며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링거를 달고 창백한 얼굴의 동생을 본 지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한아 어디 아프면 바로 말해.”

“나 안 아픈데?”

“만약에. 나중에라도 아프면 누나한테 바로 말해.”

“알았어.”

“지연아, 이제 곧 촬영한대. 우린 나가 있자.”

“누나 저기서 보고 있을게.”

“응.”

지한이 링거를 단 손을 흔들었다.

이제 마지막 화까지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김 실장. 오늘이 그남그녀 마지막 화지?”

“네, 그렇습니다. 사장님.”

“좋아. 그럼 오늘은 다 같이 회사에서 시청하도록 하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남그녀의 시청률이 14화를 기점으로 30%를 넘었다.

드라마의 인기를 반영하듯이 승진 축하선물로 목걸이를 선물하는 이가 늘었고, 주인공들의 의상,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성진이 쓰고 나온 모자도 매진 행렬이었다.

오늘은 드디어 드라마의 마지막 화가 방영되는 날.

지금쯤이면 유민 역시 종방연 자리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사장님. 아래층에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내려가지.”

갑자기 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이들이 자리에 있었다.

그 속에서 공 사장은 하얀 털모자 두 쌍을 발견했다.

“어? 사장님이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발견한 아이의 말에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한 공 사장이 아이들 옆으로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왔어?”

“영훈 오빠가 회사에서 모두 같이 드라마 본다고 해서 왔어요.”

“함께 보는 편이 더 즐거우니까요.”

남매의 말에 공 사장이 모자를 토닥이고 자리에 앉았다.

영훈이 아이들 앞에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보였다.

“아, 시작합니다.”

실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주제곡과 함께 마지막 화가 방영되었다.

“형. 이제 다 끝났어.”

“아니, 아직이야.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추악하게 발버둥 치는 형을 보고 재욱이 눈을 감았다.

그가 그동안 벌인 악행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준 것.

갑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진 아이를 가지고 성아를 협박한 재성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게 다 끝났어. 내일 형의 해임 건으로 임시 주주 총회가 열릴 거야. 회장님도 막지 않을 거고.”

“뭐라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던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말에 재성이 멍하니 재욱의 말을 되풀이했다.

넋이 나간 듯, 자신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형을 뒤로 한 채, 재욱이 이사실을 나왔다.

드디어 형을 끌어내린 재욱이 차를 몰고 향한 곳은 성아의 동생, 성진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재욱이 주차장에서 성진이 입원한 병실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성진이. 수술할 수 있어.”

-전무님? 지금 그게 무슨,

“구했어. 적합자.”

재욱의 말에 성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성아가 휴대폰을 들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성아의 거친 호흡에 재욱이 쓴웃음을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래, 성진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야 우리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잘됐다. 성진아.”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에 젖은 다른 직원들이 지한이를 안고 볼을 부볐다.

얼마 전에 촬영장에 있었던 이들과 비슷한 반응에 남매가 배시시 웃었다.

다들 성진이를 너무 좋아한다니까.

드라마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부터 지한이가 나올 때마다 눈가를 적시던 영훈과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지한과 지연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성진의 수술을 성공으로 재욱과 성아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게 반대하던 회장님도 재성의 수작을 모두 물리친 성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장에 까까머리를 한 성진이 부모님의 옆에 앉아 있었다.

“어흑. 진짜 살아있어.”

“너무 잘됐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모두가 박수를 쳤다.

김 실장이 휴대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지한아. 드라마 잘 봤다.”

“연기 너무 잘하더라.”

“나도 잘 봤어.”

공 사장의 말에 너도나도 지한이에게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잘 봤다는 말과 연기를 잘한다는 말.

어느 것이 더 배우에게 기쁜 말인지 모르지만 그 말 모두가 지한이를 기쁘게 했다.

“히힛. 감사합니다!”

지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으로 허리를 숙였다.

“막화 시청률 나왔습니다! 34%랍니다!”

와아아아!

늦은 밤. 탑엔터 사옥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KBC ‘그 남자, 그 여자’ 성공적인 마무리]

[‘그 남자, 그 여자’ 종방 기념 파티]

[‘그 남자, 그 여자’ 화려한 피날레]

[이신성 그의 차기작은?]

[모두가 울었다. 시청률을 견인한 배우 오지한]

그남그녀의 마지막 화가 방영된 다음 날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자축하고 있을 때 울리기 시작한 전화기에 영훈이 애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숙소로 도망쳤다.

거기 남아있다가는 자신도 저 전화 지옥에 빠질지도 몰랐으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자, 얘들아 짐 다 쌌지?”

“네에!”

“네.”

“그럼 이제 내려가자.”

회사가 바쁘든 말든 이제 촬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직 머리가 많이 자라지 않아 까까머린데 애들이 지한이를 너무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나한테 시비 거는 놈들이 있다면 어린애라도 봐주지 않겠다.

26. 자유

“얘들아, 피곤하지?”

“아니요.”

“별로 안 피곤해요.”

집으로 가는 차 안.

장거리 이동에 혹시나 아이들이 지루할까봐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내려왔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들은 긴 시간을 잘 버텨 주었다.

“우린 둘이어서 괜찮은데 나중에 오빠 혼자 올라갈 때 어떡해요?”

“형 심심하면 CD 사줄까요? 노래 들으면서 가면 재밌어요.”

“괜찮아. 괜찮아. 이거면 충분해.”

차 안에는 휴게소에서 산 트로트 모음곡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역시 장거리 이동에는 트로트지.

저렇게 말하는데 혼자 알아서 가라고 해야겠다.

“그러면 오빠 우리 데려다주고 바로 가요?”

“에? 형 바로 가요? 잠 안 자고?”

“내일도 출근해야 하지 않겠니. 가야지.”

영훈의 말에 남매가 동정하는 듯한 시선으로 매니저를 바라봤다.

성아도 회사다니면서 엄청 고생하던데 영훈이 형도 그런가 봐.

짧게나마 전직 회사원이었던 지연은 그 심정을 공감하며 영훈을 안쓰럽게 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가수실은 진짜 잠도 못자고 뛰어다니는 일이 예사래. 막 여기저기 행사 다니면서 몇 백 km 이동하는 건 기본이라고 하더라.”

“누나, 그 정도면 어디서 어디까지야?”

“으음.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게 어느 정도 되는데?”

아직 한국 지리를 배우지 않은 지한이 감이 잘 오지 않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가 서울에서 집까지 가는 데 4시간 정도 걸리잖아? 대충 그거만큼 걸린다고 보면 돼.”

“히이익!”

이동 거리를 가늠한 지한이 질린 얼굴을 했다.

어떻게 매일 그렇게 차에 있지?

솔직히 누나 없이 혼자서 4시간 동안 있는 것도 힘든 일인데.

“영훈이 형, 가수실 가지 마. 우리랑 같이 있어.”

“하하하. 걱정하지 마. 나는 너희 전담이야.”

“좋아!”

“나도 좋아!”

자신은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촬영장에서 예쁨 받는 배우 담당이지 아직 어려서 스케줄도 많지 않지 게다가 아이들이 착해서 욕받이가 되지 않는 점까지 완벽했다.

‘내일 출근하면 또 뺑이치겠지. 아아. 지한이는 언제 서울로 전학 오려나.’

전학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데 원래 이렇게 처리가 늦는 건가 싶었다.

아직 아이도 없고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도 없는 영훈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보호자가 그렇다는데 자신이 나서기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럼 영훈 오빠, 지한이 또 언제 촬영해요?”

“회사에서 시나리오 검토 중이야. 지한이 인기가 좋아서 대본이 많이 들어왔대.”

“우와! 형 진짜요?”

“그래, 진짜야.”

“그럼 지한이 금방 또 촬영하겠네요.”

“히히힛. 촬영하는 거 좋아.”

“그런데 지금 학교 개학했는데 전학 갈 때까지 우리 어떡해요? 학교 안 가요?”

“그 부분은 오빠도 잘 모르겠다.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겠다고 했는데 계속 아직이라고 하시네.”

이혼 소송도 끝났겠다 재산 분배도 다 정리됐을 텐데 왜 아직도 이사나 전학 문제가 처리되지 않은 거지?

“엄마가 뭐라고 했는데요?”

“저번에 통화했을 때 방학이라서 조금 걸린다고 하셨어.”

방학이랑 상관이 있나?

그리고 겨울 방학은 진즉 다 끝났었는데.

“그럼 오늘 내려가서 엄마한테 물어봐요.”

“안 그래도 요즘 통화가 잘 안 돼서 내려간 김에 물어보려고 했어.”

말하는 사이 차가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에 지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 * *

“할머니이.”

“할아버지이.”

영훈이 미리 연락한 덕분에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미리 나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드는 아이들을 각자 품에 안은 조부모가 타지에서 고생한 아이들의 등을 잔잔히 쓸었다.

“어이구, 내 새끼들. 거기 가서 밥은 잘 챙기 묵나? 살은 또 와이리 빠졌노?”

“밥 잘 먹었어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맨날 맛있는 거 해 줬어요.”

“머리는 또 이기 뭐꼬?”

“촬영한다고 잘랐어요.”

“아이고.”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 짧은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울상을 했다.

“할머니. 지한이 드라마 봤어요?”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드라마 볼 일이 뭐가 있나.”

“그래도 지한이 첫 드라만데.”

“할아버지 안 봤어요?”

“미안타.”

할아버지의 말에 아이들이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농사짓는 분들이라 일찍 주무시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영화와 달리 TV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만데.

아이들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두 사람이 어르며 말을 덧붙였다.

“할매가 미안하다. 그, 재방송? 그거 챙기볼끄마.”

“진짜요?”

“그래. 진짜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연과 지한이 조부모에게 다시 폭 안겨들었다.

아이들을 달랜 아이들의 조부모의 눈에 뒤에서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영훈이 들어왔다.

“아이고 마. 내 정신이 없어서 손님을 이리 세워두고.”

“거 안으로 들어갑시다.”

“아, 아닙니다. 아이들 데려다주고 다시 올라가봐야 합니다.”

“먼 곳에서 왔는데 밥이라고 먹고 가소.”

“아, 아니. 진짜 괜찮습니다.”

“형 밥은 먹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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